이날의 경연 공부


 

1775년 4월 19일 : 이날의 경연 공부

 

동안 1775년 4월 19일의 경연 내용을 살펴보기 위해서 그 배경이 되는 여러 가지 사정을 살펴보았다. 영조와 정조시대가 예술 분야를 살펴보면, 조선의 미술가들이 자기 주변의 풍경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화폭에 담았던 진경산수의 시대였다는 점, 그리고 실학의 시대였으며, 실학과 서학이 유행하고 있던 시대였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1775년의 내외적으로 국가가 평온하였던 시기였으나, 사실상 서구 문명의 폭풍, 즉 천주교가 밀려오기 직전의 시기였다는 점도 살펴보았다. 궁중에서는 영조와 정조의 정권 교체기에 드러나지 않는 조용한 암투가 진행되고 있었다는 점도 살펴보았다.
지금부터는 이러한 시기에 영조와 정조는 경연에서 어떠한 공부를 하고 있었는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그 날의 경연 내용은 일성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일성록⌋은 당시 왕세손이었던 정조가 기록한 것이다.(중간 중간에 설명문을 삽입하여 재구성하여 읽어보기로 한다.)

임금(영조)께서 이어서 홍문관에 나아가셨다. 나(왕세손 정조)도 따라가서 모시고 함께 앉았다. 임금께서 ⌈소학(小學)⌋의 제사(題辭)를 강하셨다.(여기에서 소학의 제사란 ⌈소학⌋의 첫머리에 붙인 글을 말한다.)

임금께서 가르침을 내려 말씀하셨다.

“이는 경연에 참가하는 유신(儒臣, 유학자 신하)이 먼저 읽을 부분이다.”

그래서 두 유신이 먼저 읽고 나서 내(정조)가 명을 받들어 읽었다.
그러자 임금께서 이렇게 말하셨다.

“부지런히 일어나는 사단(四端)이 느끼는 대로 나타나는데, 어떻게 그것을 볼 수 있는가?(藹然四端, 隨感而見, 何以見之乎)”

설명) 이러한 질문을 영조가 하게 된 것은 유신들과 정조가 읽었던 문장 중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元亨利貞, 天道之常,
원형이정은 천도의 변함없는 상(常)이다.

仁義禮智, 人性之綱.
인의예지는 인간 본성의 벼리다.

凡此厥初, 無有不善.
무릇 처음에는 착하지 않은 것이 없으나,

藹然四端, 隨感而見.
부지런히 일어나는 사단은 느낌에 따라서 드러난다.

愛親敬兄,
어버이를 사랑하고 형을 공경하며,

忠君弟長,
임금에 충성하며 어른께 공손함은

是曰秉彛, 有順無彊. 그
것은 천품이니 저절로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4단은 선(善)을 싹틔우는 4개의 단서 즉 실마리를 말한다. 말하자면 측은지심(惻隱之心, 측은하게 느끼는 마음), 수오지심(羞惡之心, 의롭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착하지 못함을 미워하는 마음), 사양지심(辭讓之心, 남에게 사양하고 겸손해하는 마음), 시비지심(是非之心,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마음)이다. 이러한 사단은 다시 각각 인(仁), 의(義), 예(禮), 지(智)의 사덕으로 발전한다. 영조의 질문은 사단이란 마음의 상태인데 그것을 어떻게 볼 수 있냐는 질문이다.

정조는 이렇게 대답했다.

“인(仁), 의(義), 예(禮), 지(智)의 단서가 느끼는 대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영조가 다시 이렇게 말했다.(영조는 이러한 대답이 다소 부족하다고 느낀 것 같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힌트를 준 것이다.)

“느낀다는 글자에 뜻이 있다.”

정조는 그래서 다시 이렇게 대답했다.

“한 가지 단서로 말씀드리면, 어린아이가 우물로 기어 들어가는 것을 보면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일어나니 바로 인(仁)이 느끼는 대로 발현된 것입니다. 이로써 보면 나머지 세 가지의 느낌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임금은 또 이렇게 물었다.

“물을 뿌려 땅을 쓸고 부름이나 물음에 응대하는 일은 지극히 작은 일인데도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태평하게 하는 근본이라 한 것은 어째서인가?”

설명) 이러한 질문이 나온 것은 앞서 읽은 소학 제사의 글에 “어린이의 공부 방법은 물을 뿌려 청소하고 부름이나 물음에 응대하며 집안에서 효도하고 밖에 나가서는 공손하며, 행동 하나하나 어그러짐 없는 것이다(小學之方, 灑掃應對, 入孝出恭, 動罔或悖)”라는 문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정조는 이렇게 대답했다.

“물을 뿌려 땅을 쓸고 부름이나 물음에 응대하는 일은 최초의 공부이기 때문에 먼저 이러한 데에 힘을 써야 하는 것입니다. 작은 일로부터 큰 일에 이르며 아래로부터 잘 배워야 위로 통달하는 공부가 되기 때문입니다.”(말하자면 작은 일을 잘할 수 있어야 큰일도 잘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임금이 다시 이렇게 물었다.

“⌈소학⌋에서 사람을 가르치는 법이 이와 같은데, 사람은 모두가 성인(聖人)이 될 수 있는데도 삼대(三代, 중국고대의 하은주 시대) 이후로는 더 이상 성인이 나오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설명) 이러한 질문을 영조가 하게 된 것은 앞서 읽은 문장 중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성인의 본성은 넓고 넓은 하늘이니, 더 할 것 없이 온갖 선을 갖추었다.
(惟聖性者, 浩浩其天, 不加毫末, 萬善足焉.)

보통사람들은 어리석어 물욕이 앞을 가려, 그 기본을 무너뜨리고 자포자기해버린다.
(衆人蚩蚩, 物欲交蔽, 乃頹其綱, 安此暴棄)

그래서 성인께서 측은히 여겨 학교를 세우고 스승을 두어, 그 뿌리를 북돋아주고 그 가지를 뻗게 했다.
(惟聖斯惻, 建學立師, 以培其根, 以達其支.)

영조와 정조 사이에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은 대화가 이루어졌다.

정조: 삼대 이후로 ⌈소학⌋의 가르침이 분명하지 않았으니, 성인이 일어나지 않은 것입니다.

영조: 그렇다면 어떻게 공자(孔子)가 나오게 된 것인가?

정조: 공자는 태어나면서부터 알았던 성인입니다.
영조: ⌈소학⌋의 편제(篇題)에는 ‘회암(晦庵)’이라고 쓰고, ⌈대학⌋에는 ‘신안(新安) 주희(朱熹)’라고 쓴 것은 무슨 뜻인가?

정조: ⌈대학⌋은 경전이기 때문에 주희라고 쓴 것입니다. (여기서 ⌈대학⌋이란 주자, 즉 주희가 편집한 ⌈대학장구⌋를 말한다.) ⌈소학⌋은 주자가 직접 편집하여 아이에게 준 것이기 때문에 회암(주희의 호)이라고 썼습니다.

영조: ⌈소학⌋은 사도(師道, 선생님의 도)로 자처한 것이기 때문에 그러하였다. ⌈대학⌋과 ⌈소학⌋ 중에서 어느 것이 더 크고 어느 것이 더 작은가?

정조: ⌈소학⌋이 ⌈대학⌋의 근본이 되기는 하지만, 중요한 비중으로 말한다면 ⌈소학⌋이 작습니다.

영조: 책을 읽는 것이 좋은가?

정조: 좋습니다.

영조: 어째서 좋은가?

정조: 성현(聖賢)의 말씀이기 때문에 좋습니다.

영조: 옳다. 세 사람이 같이 길을 가면 그중에는 반드시 내가 스승으로 삼을 만한 사람이 있는 법이다. 어찌 꼭 성인(聖人)만을 스승으로 삼을 것이 있겠는가. 춘방(왕세자 교육 담당 관청)의 관원도 스승이다. 지금 네가 나를 따라와서 여기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데, 즐거운가?

정조: 즐겁습니다.

이어서 영조는 같이 참석하는 관원들에게 글을 읽으라고 명하였다. 보덕 유의양(柳義養)과 설서 조상진(趙尙鎭)이 차례로 읽었다.
읽기가 끝나자 영조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열세 살에 ⌈소학⌋ 공부에 들어갔고, 열아홉 살에 대학 공부에 들어갔다. 오늘 할아비와 손자가 함께 앉아 이미 소학을 외웠으니 또 ⌈대학⌋을 외울 것이다. 경(經) 1장(章)을 진강(進講)하라.”

대학 경1장은 소위 삼강령(三綱領) 팔조목(八條目)이 등장하는 대목이다.
정조는 영조의 명을 받들어 그 부분을 읽었다.
영조는 또 이렇게 질문했다.

영조: 이미 ‘밝은 덕〔明德〕’이라 해 놓고 또 ‘명(明)’ 자를 그 위에 더한 것은 어째서인가?

정조: 밝은 덕은 본래 밝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타고난 기질이 고르지 않아 물욕(物慾)이 번갈아 밝은 덕을 가려 본체(本體)가 때로 어두워지기 때문에 이를 밝히는 것입니다.

영조: 물(物)에는 본말(本末)이 있고 일에는 종시(終始)가 있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정조: 밝은 덕을 밝히는 것이 본(本)이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이 말(末)이며, 앎을 지극히 하는 것이 시(始)이고 능히 터득하는 것이 종(終)입니다. 본과 시가 우선이고, 말과 종이 나중입니다.

영조: 궁관들에게 질문해 보라.

정조: (유의양을 향하여) 물(物)에는 본말(本末)이 있고 일에는 종시(終始)가 있는데, 물에서는 본(本)을 먼저 말(末)하고 말을 나중에 말하였으면서 일에서는 종(從)을 먼저 말하고 시(始)를 나중에 말하여 순서가 다르니, 어째서인가?

유의양: 물은 형체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본말이라고 말하였고, 일은 움직여 작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종시라고 말할 것입니다. 만약 시종이라고 말하였다면 그것이 종에서 그쳐 버리게 될까 염려하였기 때문에 종시라고 말하여 끝났어도 다시 시작하는 뜻을 밝힌 것입니다.

영조: 춘방(유의양)도 세손(정조)에게 질문해 보라.
유의양: 밝은 덕(明德)을 심(心)이라 하기도 하고 성(性)이라 하기도 하는데, 어디에 속해야겠습니까?

정조: 성(性)이라고 한다면 심(心)과 정(情)을 빠뜨리게 되고 심(心)이라고 한다면 뜻이 갖추어지지 않을 듯하다. 선정(先正) 율곡(栗谷)이 설한 대로 본심(本心) 두 글자로 보는 것이 좋겠다.(이어서 조상진에게 이렇게 물었다.) ‘옛날에 밝은 덕을 천하에 밝히고자 한 자’의 주석에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그 밝은 덕을 밝힐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윗사람으로 하여금 밝히게 한다는 것인가, 아랫사람이 스스로 밝힌다는 것인가?

조상진: 윗사람이 밝히는 것입니다.

영조: ⌈소학⌋에서 말한 물을 뿌려 땅을 쓰는 일을 잘하게 되면 대학에 있어 쉬운 것인가?

정조: ⌈소학⌋에 힘쓴다 해도 ⌈대학⌋을 공부하지 않으면 어찌 쉽겠습니까?

영조: ⌈대학⌋과 ⌈중용⌋ 중에서 어느 것이 어려운가?

정조: ⌈중용⌋과 ⌈대학⌋은 서로 표리 관계이니 어찌 쉽고 어려움으로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영조: 너도 나이가 삼십에 가까워 안으로는 근시(近侍, 가까운 시종자)로부터 밖으로는 춘방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을 겪어 보았다. 인심과 세도(世道)가 옛날에 비해 어떠한가?

정조: 신이 옛날을 보지 못하였는데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정조의 기록은 다음과 같이 계속 이어진다.

임금께서 이러한 나의 답변에 칭찬하셨다. 이어 어제(御製) 한 구절을 쓰라고 명하셨는데, 나와 신하들이 명을 받들어 화운(和韻)하여 올렸다. 상께서 가르침을 내리시기를,

“그 관원들은 화운하여 낸 뒤에 상전(賞典)을 내릴 것이고, 홍문관의 이례(吏隷)들에게 먼저 호조로 하여금 전례를 살펴 상을 주게 하라.” 하셨다.

또 말씀하시기를

“아, 오늘 이렇게 거행한 것은 만년의 깊은 뜻이 있으니, 어찌 그럭저럭 돌아갈 수 있겠는가. 화운하라, 화운하라. 상전, 상전 또한 어찌 화운하기를 기다릴 것이 있겠는가. 오늘 나온 춘방 중에 준직(準職)인 자들은 숙마(熟馬) 1필씩을 주고, 나머지는 모두 한 자급씩 올려 주며, 지금 참하(參下)로 있는 자는 6품으로 올려주라”

고 하였다.

이날 영조는 정조와의 경연을 몹시 흡족하게 생각하였다. 이제 자신의 대를 이어 국왕이 될 정조가 소학과 대학, 나아가 중용 등 주요 유학 경전을 열심히 공부하고 있음을 확인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왕세손 정조의 유교 교육을 담당하는 관료들에게 상으로 말 1필씩 내리도록 지시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는 다소 우스꽝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영조와 정조 시대 사람들은 우리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우스꽝스러울 것이다.
우리는 영·정조 이후 서양에서 밀려온 근대문명에 의해서 완전히 서구화되어 있다. 당시와는 전혀 다른 패러다임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정치 지도자란 어떠한 모습이어야 하는지, 수많은 사람들의 모범이 되어야할 정치가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현대를 사는 우리들은 오히려 조선시대 사람들에게 배워야 할 것 같다.

정조가 조상진에게 밝은 덕을 천하에 밝히고자 한다면 그 일을 누가 먼저 하는가 묻자, 조상진은 주저 없이 이렇게 대답한다.

“윗사람이 밝히는 것입니다.”

1775년 4월 봄날 영조와 정조가 유교 경전을 가지고 공부를 했던 그날, 조선의 두 지도자가 가슴에 새기고 있었던 지도자 상은 자기 스스로 밝은 덕, 즉 순수하고 지고한 덕을 스스로 닦은 일이었다.

조선은 비록 시대의 흐름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서양문명의 파도에 휩쓸려 멸망의 길을 걸었지만, 존경받는 조선의 국왕들이 가졌던 정신은 높이 평가해야할 것이다. 조선시대의 유교도 부정적인 측면이 있기는 하였으나, 왕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백성을 생각하게 하고, 당신이 만인의 공인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도덕적으로 최고의 경지에 오르도록 요구하고, 그러한 요구를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게 만들어놓은 제도까지 부정할 일은 아니다.

서구적인 대통령제의 미숙하고도 잘못된 운영으로 파탄 나버린 오늘의 국정을 지켜보며, 조선시대의 황금기라고 할 수 있는 영조와 정조 시대의 하루를 살펴보았다.

율곡의 등장


 

1775년 4월 19일 : 율곡의 등장

 

1775년 4월 19일 ⌈일성록⌋ 기록을 보면 갑자기 율곡 이야기가 이렇게 등장한다.

 

유의양이 물었다.

“밝은 덕(明德)을 심(心)이라 하기도 하고 성(性)이라 하기도 하는데, 어디에 속해야겠습니까?”

왕세손 정조가 답했다.

“성(性)이라고 한다면 심(心)과 정(情)을 빠뜨리게 되고 심(心)이라고 한다면 뜻이 갖추어지지 않을 듯하다. 선정(先正) 율곡(栗谷)이 말씀하신 대로 본심(本心) 두 글자로 보는 것이 좋겠다.”

대학⌋을 가지고 강연 공부를 하다가 이러한 대화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대화에서 우선 궁금한 것은 어째서 갑자기 ‘선정(先正) 율곡(栗谷)’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것일까?

‘선정’이란 뜻은 ‘앞선 바름’ 즉 앞서 이전에 활동한 현명한 ‘신하’를 뜻한다. 신하는 유학 관료, 혹은 유학자라고도 바꿀 수 있다. 조선시대에 현명했던 유학자가 율곡뿐이었을까? 그리고 대학에 대해서 율곡만이 밝은 덕, 즉 ‘명덕(明德)’을 논했을까? 그렇지 않다. 그렇지만 정조는 수많은 학자들 중에서 율곡을 특히 존경했으며, 율곡은 그 시대에 조선의 손꼽는 현인으로 추앙받고 있었다.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율곡은 이렇게 유학에 대한 조예가 깊었던 정조의 존경을 받게 되었을까? 일본학자 야마우치 코이치(山内弘一)가 2006년도 제19회 율곡문화제 국제학술회의에서 발표하였던 논문을 중심으로 소개하기로 한다.

야마우치는 율곡의 사상적인 측면보다는 객관적으로 역사적인 추이를 지켜보면서 율곡이 조선의 국가적인 학자가 되어가는 과정, 즉 문묘에서 종사(從祀)되는 과정을 이렇게 분석하였다.

조선 왕조에서 유학자에게 최고의 영예는 문묘종사(文廟從祀), 즉 문묘에서 종사(從祀, 제사지내 모심)되는 일이다.
문묘종사는 조선의 국왕이 ‘유학자를 숭상하고 도를 중시하며(崇儒重道), 문치를 훌륭하게 치장하고(賁飾文治)’ 나아가 ‘유학의 도를 밖으로 드러내며(表章儒道), 문치를 늘려서 꾸미는(増飾文治)’일을 말한다. 유교의 정신에 따라 시행하는 문치정치(文治政治) 혹은 왕도정치(王道政治)를 표방하기 위한 제일 중요한 의식이 문묘종사였다.
그러나 종사되는 유학자에 대한 평가는, 종사가 행해졌던 시대의 가치관에 근거한다. 그 시대의 평가이며, 그 유학자 자신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율곡이 문묘에 종사되는 것은 율곡이 종사되는 시점에서 율곡의 평가가 작용했다는 것이다.
율곡은 1584년 선조 17년에 병으로 서울에서 사망했다. 그는 이조판서(吏曹判書)였기 때문에 거기에 상응하는 대우를 받았다. 선조 24년에는 일등공신(一等功臣)으로 추존되었다. 그에 대한 당시의 존중은 이 정도에 그쳤다.

그가 후세에 전해진 것과 같이 높은 평가를 받게 된 것은 그 이후의 일이다. 광해군(光海君) 15년 즉 1609년(인조 원년)에 서인(西人) 세력이 주동이 되어 광해군을 폐위하였다. 그리고 능양군(綾陽君, 후일의 인조)이 추대되었는데, 이 사건이 이른바 인조반정(仁祖反正)이다.
이때의 서인 세력은 율곡 이이의 제자들과 밀접히 연결된다. 따라서 율곡은 친구였던 우계 성혼과 함께 새로운 인조 정권에서 특별히 존중되었다. 유교에 근거하는 문치정치 그리고 왕도정치를 표방하기 위한 중요한 인물로서 율곡과 우계 성혼이 이때부터 특별히 부상되었다.

인조반정 직후에 반정에 성공한 공신들에 대한 논공행상(論功行賞)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광해군이나 그를 지지한 북인(北人) 세력에 대한 제거 처분이 분주하게 이루어졌다.
이 해 3월에 이정구(李廷亀)가 경연의 장소에서, 율곡을 유종(儒宗: 유학에 정통한 권위 있는 학자)으로서 특별히 포상해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그래서 율곡에 대해서 영의정(領議政) 등의 관직과 작위를 주고 국왕의 사절에 의해서 제사가 행해졌다.
인조실록(仁祖實錄)⌋ 3월 25일 기록도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즉, 경연의 자리에서 지사(知事) 이정구(李廷亀)가

“근래의 유생 중에는, 이이와 성혼만큼 학문상의 계보가 올바른 사람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절을 보내서 제사를 행해야 한다”

고 주장했다. 이이와 성혼이 훌륭한 유학자로서, 그리고 정통성이 있는 학자로서 강조되었던 것이다.
그 다음 27일, 경연에서 율곡의 문묘종사가 제안되었다. 인조실록에 의하면, 특진관(特進官) 류순익(柳舜翼)이 이렇게 주장했다.

“군주가 ‘숭유중도(崇儒重道), 분식문치(賁飾文治)’하기 위해서 선현 율곡 이이를 문묘에 종사한다면, 선비들의 의견에 찬성한다.”

하지만 인조의 의견은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 별로 긍정적이지 못했다. 인조는

“문묘종사라고 하는 중요한 문제를 경솔하게 행할 수는 없다”

고 하며 신중한 자세를 보였다.

사실상 율곡의 문묘종사를 주장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 아니다. 이미 광해군 2년, 즉 1610년 10월에, 유생 변취정(邊就正)이 율곡 이이와 퇴계 이황에 대한 문묘종사의 상소를 올렸다. 다만 당시는 북인(大北) 세력이 정권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이이에 대한 문묘종사는 실현되지 않았다.
인조가 율곡의 문묘 종사에 대해 신중한 자세를 보이자 경연에 참가하고 있던 시독관(侍読官) 이민구(李敏求), 검토관(検討官) 유백증(兪伯曽), 헌납(献納) 이경여(李敬輿) 등이 각각 다음과 같은 발언했다.

이민구: “이이는 보기 드문 유생입니다. 신속하게 종사를 해야 합니다. 전하는 이이의 학문이 얼마나 깊은 것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경솔하게 행할 수는 없다고 하시지만, 이이의 문집을 보면 탁월한 그의 학문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유백증: “이이의 종사는 나라에서 공동으로 의논할 일입니다. 이전에는 공론이 통하지 않는 상황이었으므로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전하는 문집을 볼 필요도 없이 당장 종사를 해야 합니다.”

이경여: “율곡 이이에 대한 종사 논의가 공론인 것은 전하가 이미 들은 바대로 입니다. 총명한 전하는 이이의 문집을 이미 읽었을 것입니다. 지금은 의리나 도학이 분명하지 않고, 유생의 목표가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그 해결을 위해서라도 당장 종사를 행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발언에 대해서 인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종사가 안 된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중대한 일이니까 경솔하게 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이의 문인 제자나 지인들의 의견에 따라 갑자기 종사를 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을 것이다.”

인조반정으로부터 2주 정도 밖에 시간이 지나지 않았는데, 공론을 내세우며 이이의 문묘종사를 주장하는 신하들에 대해 인조는 당황해하였다. 물론 공론이라고는 해도 이 때 나선 사람들은 인조 등극에 공을 세운 서인 세력의 공론이었다.
광해군 시대에 이러한 공론이 통하지 않았던 것은 그때는 다른, 즉 북인(大北) 세력이 공론의 공론장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인조의 말에 따르면 인조는 이러한 부분의 사정에 대해서는 당연히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이러한 인조의 말에 대해서, 이경여는 이렇게 말했다.

“저희들의 요청은 나라의 공론이고, 종사해야 할 진정한 선현을 알고 있는 것으로, 호의를 가진 인물(즉 율곡)에게 아첨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결국 이날의 경연관들은 인조를 설득하지 못했다. 이이의 문묘종사가 실현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후에도 서인 세력의 인조에 대한 설득은 계속해서 이루어졌다.
이듬해 8월에 이이가 문성(文成)이라고 하는 시호를 수여 받았다. 이정구(李廷亀)가 저술한 「묘표음기(墓表陰記)」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보인다.

“인조가 즉위한 초기에 경연관은 이이의 행장(行状)과 저작인 『성학집요(聖学輯要)』를 인조에게 올렸다. 인조는 이것들을 읽고 감탄하면서 이이에게 영의정(領議政)을 내려주고, 또 문성공(文成公)이라는 시호를 하사했다. 문(文)은 ‘도덕전문(道徳博聞)’의 뜻이며, 성(成)은 ‘안민입정(安民立政)’의 뜻이었다.”

율곡에게 조정에서 영의정이라고 하는 직책을 추증(追贈)한 것은 인조 원년에 있었던 일이다. 시호의 추증과 동시에 행해진 것은 아니다. 이러한 추증이 실현된 것은 서인 세력이었던 경연관들이, 율곡 이이의 저작 등을 올림으로써 인조에게 율곡이 보기 드문 그리고 훌륭한 유학자임을 이해시킨 결과였다.
⌈인조실록⌋에 따르면 율곡에게 시호를 수여한 인조 2년 8월에 행해진 경연의 자리에서, 인조는 이렇게 말했다.

“이이는 치국의 근본을 아는 사람인데, 조정에서 오랜 시간 활약할 수 없었던 것은 유감이다.”

이러한 발언은 이정구가 저술한 ⌈모표음기⌋에서 볼 수 있다. 문성(文成)의 성(成)은 ‘안민립정(安民立政)’의 뜻이라고 한 것과 대응한다고 볼 수 있다. 율곡에 대해서 후세까지 이어지는 대표적인 평가, 즉 율곡은 뛰어난 경세가라고 하는 평가는 바로 이때에 공식적인 견해로 확정되었다.
그 후 이괄(李适)의 난이나 정묘(丁卯) 호란(胡亂)을 거쳐 인조 13년, 즉 1635년 5월에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문묘종사를 요구하는 관학(館学) 유학자 들, 즉 송시형(宋時瑩) 등 270여명의 상소가 제출되었다.
인조는 이러한 상소에 대해서

“이이와 성혼은 착한 사람이지만, 도덕은 아직 높지가 않아서 비판을 받을 만한 결점이 있다. 종사라는 중요한 문제를 경솔하게 논의해서는 안 된다”

라고 대답하며, 문묘 종사를 인정하지 않았다. 인조의 율곡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적극적이지 않았던 것이다.
⌈인조실록⌋에는 인조의 평가 뒤에 다음과 같은 사관(史官)의 논평을 실었다.

“도학(道徳)이 고명한 이이와 실천이 독실한 성혼은 백세(百世)의 유종(儒宗)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종사의 논의가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당론(黨論)이 격렬해진 이래로 현자(賢者)를 질투하고 정의를 싫어하는 소인(小人)이 잇달아 나타나서 근거도 없이 비방하는 사태가 되었다. 인조가 “도덕은 아직 높지가 않아서 비판 받을만한 결점이 있다”라고 대답했던 것도 이러한 소인들의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송시영 등이 신중하지 못한 채 상소를 하여, 이이와 성혼이 오히려 소인들의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어버린 것은 매우 유감이다.”

율곡에 대한 반대파들(주로 남인들. 이들은 주로 퇴계 이황을 존숭했다.)의 입장을 인조가 받아들였다고 지적한 것이다. 그럼 이 사관(史官)이 말하는 ‘소인들의 비방’이란 어떠한 것일까?
먼저 생원 채진후(蔡振後)는 율곡 자신이 쓴 문장에서 ‘일찍 어머니를 잃고 너무 슬픈 나머지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에 귀의했다’, ‘자신만큼 불교에 중독된 사람은 없다’라고 한 것을 문제 삼았다. 율곡이 젊었을 때 불교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문묘 종사에 적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인조는 채진후의 이러한 비판을 접하고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율곡 이이 등의 종사를 요구하는 것은 지극히 주제넘은 짓이니 나도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진사(進士) 권적(権蹟) 등도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지금의 논자가 이이와 성혼을 공맹(孔孟) 정주(程朱)의 학문적인 정통을 계승했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아주 곤혹스러운 일이다. 조선의 유종(儒宗)은 이황이 으뜸이지만, 이황의 이기설은 이이와 차이가 있다. 또 이황은 나정암(羅整庵)을 선(禅)이라고 해서 배척했지만 이이는 자기 스스로 얻은 설이라고 평가하는 것을 보면, 이이가 불교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위 ‘소인들의 비방’은 율곡이 불교에 관여하였던 점과 퇴계 이황과 이기론이 서로 차이난다는 점이었다. 여기에 대해서 율곡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반박하였다.
지사(知事) 조익(趙翼): 소인들은 이이와 같은 대현(大賢)조차도 미워하고 결점을 찾아, 젊었을 때 불교로 흐른 점을 문제로 삼는다. 그러나 예로부터 현인이 도를 추구하는 당초에는 이런 잘못된 사례가 많다. 분명하게 버렸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좌의정 오윤겸(呉允謙): (인조의 ‘비판 받을만한 결점이 있다’, ‘지극히 주제 넘는 짓’이라는 등의 언급에 대해) 지금 이러한 말을 발표하는 것은, 경모존신(敬慕尊信)의 마음이 전혀 없는 것 같은데, 전하는 도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

인조실록⌋에 첨부된 안문(按文):

율곡 이이의 이기설은 탁월하여, 퇴계 이황도 살아 있었다면 인정했을 것이다. 나정암의 이기론은 몹시 뛰어난 자득설(自得說)로서, 그가 선(禪)으로 흘러갔다고 해서 그 논의의 좋은 부분을 버릴 수는 없다. 권적 등이 이 말을 붙잡고 비난하는 것은 도를 어지럽히는 소인의 논의로 취할 가치가 없다.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문묘종사를 요구하는 관학 유생 송시영 등의 상소를 계기로, 유생으로부터 대신에 이르기까지 격렬한 논의가 일어났다.
성균관 유생들의 의견도 분열되고, 그들의 처분 등을 둘러싸고 유생들이 일제히 성균관을 퇴거하여 성균관이 텅비어 버리는 사태로 발전되었다.

송시영 등의 입장을 동정했던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 최명길(崔鳴吉)이 사직을 청해서 해직되기도 했다. 인조는 끝까지 종사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 이후도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문묘종사를 요구하는 상소가 많이 나왔다. 숙종 7년(1681) 9월 27일에 종사에 반대하여 나섰던 박성의(朴性義) 등 두 사람의 상소에 의하면, 효종(孝宗)과 현종(顯宗) 시대에는 유생의 상소가 수십 통이나 되었다. 하지만 효종과 현종도 허락하지 않았다.
효종은 경연의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조시대에 종사 논의가 있었지만 인조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지금은 나를 꺼리지 않고 언제나 이런 곤란한 행동을 일으킨다.”

“인조가 학문의 세계에 대해서 사려함의 높이는 내가 미치는 바가 아니다. 인조는 종사해서는 안 된다고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끝까지 단호하게 물리쳤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경솔하게 허락할 수 있겠는가?”

현종도 율곡과 우계를 문묘 종사하자는 유생들의 상소에 대해서 “효종이 곤란하다고 한 것을 너희들은 왜 상소를 하여 나를 성가시게 하는 것인가?”라고 짜증을 냈다.
효종과 현종의 시대에도 율곡과 우계의 문묘 종사는 인정받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숙종 6년, 이른바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즉 경신환국(庚申換局)에서 남인 세력이 몰락하여 율곡의 문묘종사를 반대하던 상황이 일변했다.
그 다음 해인 7년 9월에 관학(館學)의 학생들과 팔도유생(八道儒生) 이정보(李廷普) 등 오백여명이 송나라 양시(楊時), 나종언(羅從彦), 이동(李侗) 등 세 명과 함께 조선의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 두 사람도 문묘에 종사할 것을 요구했다.
숙종(경종과 영조의 부친)은 일단 신중한 자세를 보였지만, 다음날 경연의 장소에서 검토관(檢討官) 송광연(宋光淵)이 종사를 재촉하고 또 이정보 등이 다시 상소한 것을 받아들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율곡과 우계) 두 사람의 학문은 모든 사림의 존경과 자랑의 대상이기 때문에 누가 안 된다고 할 것인가? 역대 국왕이 허락하지 않고 나도 곤란하다고 한 것은 모두 신중을 기하고자 했던 것이다. 사림의 소원은 절실하기에 거절하는 것은 어렵다. 예조(禮曹)에 명하여 대신(大臣)들더러 도모하도록 하겠다.”

그리고 대신 김수항(金寿恒), 김수흥(金寿興), 정지화(鄭知和), 민정중(閔鼎重), 이상진(李尚真) 등이 모두 인정했다. 이 때문에 율곡의 문묘 종사가 실현되었던 것이다.

그 해 9월 25일 경연 때에는 영의정 김수항이 숙종에게 이이의 서간이나 상소문(上疏文) 외에 ⌈동호문답(東湖問答)⌋이나 ⌈성학집요(聖學輯要)⌋를 읽을 것을 권하고 동지경연(同知經筵) 이민서(李敏叙)의 청으로 이이와 성혼의 저작이 진강(進講)되게 되었다.
숙종이 내린 종사의 명령을 반대한 것은 9월 27일에 나온, 앞에서 말한 박성의(朴性義) 등의 상소다.
그들이 반대하는 논점은 다음과 같았다. 즉 율곡이 불교에 대한 관여하였으며, 이기설이 현사(賢師)인 이황과 다르다는 것이다. 이점은 인조시대 이래 율곡의 문묘종사를 반대하는 남인들의 논점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여기에 새롭게 더해진 것은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인조, 효종, 현종의 3대 국왕이 내린 불허가라고 하는 결정이었다. 박성의 등은 인조가

“도덕은 아직 높지가 않아서 비판받을만한 결점이 있다”

라고 한 말은 만세 불변의 말이라고 주장했다. 나아가 효종과 현종이 허락하지 않았던 것도 단호한 결의에 따른 것이었다고 하였다. 숙종이 말하였듯이 우선 신중을 기해서 장래에 문묘종사를 허가해주기 위해서 그렇게 준비한 것은 아니다고 주장했다. 숙종의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반대파들의 주장에 대해서 율곡의 문묘종사를 찬성하는 유학자들의 반론은 다음과 같았다.
불교 관여에 대해서는 숙종이

“주자도 당초는 불교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이이의 결점이라고 할 수 없다”

고 한 말처럼, 이점에 크게 개의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기설에 대해서는 송광연(宋光淵) 등이 상소문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생각건대 조선의 성리학은 이황에 이르러 많이 명백해졌지만, 이황을 평생동안 존경하고 믿었다는 점에서 이이보다 뛰어난 사람이 없다. 단지 이기설에서는 리기호발설(理気互発説)에 약간 결점이 있어……도리를 철저히 하여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되는데, 리통기국(理通氣局), 리기불상잡(理気不相雑)을 주장하고 지당한 설을 추구했을 뿐이었다.”

이 역시 인조시대의 반론과 기본적으로 별다른 변화가 없다.
3대 국왕이 내린 불허가라고 하는 결정에 대해서는 승정원(承政院)이 다음과 같은 의견을 제시했다.

“오늘 전하가 역대의 국왕이 행하지 않았던 것을 실현하고, ‘숭유중도(崇儒重道: 유학을 존숭하고 도를 중시한다)’의 의도를 분명히 하려고 하는데, 박성의 등이 한때 잠정적으로 제시된 3대 국왕의 왕명을 들어 전하가 사실을 분별하지 못하고 경솔하게 허락했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들의 분개를 금할 길이 없다.”

인조, 효종, 현종 3대의 국왕이 내린 왕명이 율곡이나 우계를 문묘 종사할 수 없다는 단호한 결의에 따랐던 것인가, 아니면 일시적으로 애매한 결정을 한 것인가 하는 것은 당파에 따라서 의견이 완전히 다르다. 그러므로 사실 어느 쪽이 정확한지는 알 수 없다.
승정원은 박성의를 “한쪽으로 치우친 당파의 논의를 계승하여 흉계를 드러내고 있다”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박성의 쪽도 할 말이 있었을 것이다. 즉 그는 숙종이 종사의 가부(可否)를 대신들에게 하도록 한 것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불만을 토로했다.

“전하는 공의(公議)를 구하도록 대신들에게 위임한 것이라 하시겠지만 오늘날 대신은 이전에 (율곡 문묘종사를 요구하는) 상소를 낸 유생이고, 오늘 상소를 낸 대표는 그 대신의 아들이어서 대신과 유생이 서로 기맥이 통한다.”

말하자면, 이번 종사의 결정이 율곡 문묘종사를 지지하는 당파의 당론과 밀접하게 관련된다는 것을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하였던 박성의는 결국 유배라는 처벌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이듬해인 숙종 8년 5월, 송나라 3현에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을 합쳐 5현의 문묘종사가 행해졌다.

그런데 다시 7년 후에는 이른바 기사환국(己巳換局)에서 노론(老論) 소론(少論) 세력의 대부분이 배척되고, 남인 세력이 정권에 복귀하였다. 환국 후인 숙종 15년 2월에는 유학(幼學) 안전(安壂)이, 그리고 3월 12일에는 진사(進士) 이현령(李玄齢) 등이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을 문묘로부터 축출할 것을 요구하는 상소를 제출했다.
숙종은 이러한 상소를 접하고, 일단 축출을 경솔하게 논의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렇지만 15일에 이현령 등이 세 번째로 상소를 하자, 숙종은 “사림이 문묘에서 이이와 성혼의 축출을 요구하는 것은 역대 국왕의 명확한 명령의 말에 따르고자 하는 것이다” 答曰, 我朝儒賢従祀文廟, 輿望洽然, 終無異議, 獨於此両臣, 多士必冀黜享, 盖所以遵□列聖之明教也(『肅宗実録』巻二〇, 一五年 三月 壬午)
라고 대답하고 축출할 것을 인정했다.
그 다음 17일에 축출에 반대하는 진사 심제현(沈斉賢) 등 상소가 제출되었다. 그래서 숙종은 승정원에 다음과 같이 명령했다.

“이이와 성혼은 종사해서는 안 되는데도, 나 때문에 문묘가 더럽혀져서 지금은 통절하게 후회하고 있다. 관학의 유생과 사림이 이이와 성혼의 출향을 요구하는 상소 내용은, 나의 마음에 꼭 맞기에 즐거이 인정한다.”

축출 반대를 주장하는 심제현에게는 유배처분을 내렸다. 그리고 다음 날인 18일에는 이이와 성혼을 문묘로부터 축출해버렸다.

 

또한 ⌈숙종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안문(案文)이 첨부되어 있다.

“종향(従享)은 ‘표장유도(表章儒道), 증식문치(増飾文治)’를 위한 것이며, 문묘종사는 국왕으로서는 성절(盛節)라고 하더라도 종사되는 유현(儒賢)의 도덕성이 거기에 따라 증감하는 것은 아니다. 숙종은 진심으로 유현을 존중하고 믿은 것이 아니고, 단지 시류에 따라서 허례(虛禮)를 유현에 더했다. 이것은 유현에 있어서 영예가 아니고, 군주에게 덕이 갖춰져 있었던 것도 아니다. 때문에 조정의 신하가 바뀌면, 종향(従享)으로부터 10년도 지나지 않아 출향(黜享)을 행했다. 후에 복향을 했지만, 그것도 사림의 요구에 내키는 대로 응한 것일 뿐이지 숙종에게 ‘숭유중도(崇儒重道)’의 아름다운 뜻이 있었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이와 같이 이이와 성혼은 나중에 숙종이 문묘에 다시 복향을 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안문에서 밝혔듯이 숙종이 두 사람의 종사를 행했던 것도 진심으로 그들을 존중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각 당파의 주장을 기초로 한, 말하자면 조정에서 일어나는 공의공론(公議公論)을 기준으로 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후 숙종 20년(1694) 정월에 숙종 다시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문묘종사는 극히 중대한 것으로서 종사해야 할 사람을 종사하지 않는 것은, 한때의 결례로 그래도 나은 편이다. 그렇지만 종사해서는 안 되는 사람을 종사해 버린 것은 문묘나 사림을 욕되게 하는 것으로 돌이킬 수 없다. 나는 이이와 성혼의 경우 도덕이 아직 갖춰지지 않아서 덮기 어려운 결점이 있다는 점을 헤아리지 않고 함부로 종사했다.”

말하자면 자기반성이었다. 그리고 숙종은 향후 공의 공론을 분별하지 않고 이이와 성혼의 종사를 요구하는 사람은 엄벌에 처할 것이라고, 전국의 학교에 포고하였다.
그런데 이 해에 이른바 갑술환국에서 남인 세력이 몰락해버렸다. 그리고 4월 20일에 유학 신상동(辛相東)이 상소하여 이이와 성혼의 복향을 요구했다.

숙종은 그러한 주장에 이해를 표시했지만, 문묘제도가 뒤집힌다고 하여 일단 유보했다. 그러나 21일의 충청도 유학 임봉선(林鳳珍) 등의 상소를 계기로 숙종은 “정의를 증오하는 무리에 속아서 이이와 성혼을 출향한 것을 나는 후회하고 있다. 문묘의 제도가 뒤집히는 것을 심려하여 즉시 행하지 않으면 결례가 된다.”라고 말하고 복향을 명했다. 다시 율곡과 우계가 문묘에 모셔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숙종 자신의 의견은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공론에 따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숙종으로서는 공론이 변하면 그러한 논의에 따른 것일 뿐이었다.

4월 25일에 복향에 반대하여 진사 한종석(韓宗奭) 등이 상소했다. 그 다음날 한종석은 숙종 15년에 출향을 요구하는 상소를 제출했던 안전(安壂)이나 이현령과 함께 유배 처분이 되었다.
6월 23일에는 문묘에서 두 사람의 복향이 행해져 숙종은 전국에 복향을 고하는 교서(敎書)를 반포했다. 이 교서를 제작한 것은 병상에서 상소문을 제출해 인조를 충고한 좌의정(左議政, 후에 領議政)오윤겸의 손자였다. 율곡 문묘에 대한 대를 이은 지지였다.

율곡 이이에 대한 평가는 이렇게 그의 사후 역사적으로 변천해왔다. 율곡의 문묘 종사 과정을 살펴보면 각 시대의 가치관에 따랐다고 할 수 있다. 즉 집권 세력이 주장하는 ‘공론’이라고 하는 가치관을 기준으로 한 것이었다. 어찌 보면 이이 본인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고도 할 수 있다.
현재의 시각에서 본다면 율곡의 문묘종사를 둘러싸고 논의를 일으킨 어느 쪽도 보편성을 가진 근거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위에서 보이는 각종 왕조실록은 사실 율곡 이이의 문묘종사를 찬성하는 서인파, 즉 노론과 소론의 작품이었다. 따라서 반대파 즉 남인세력의 공론에 대해서는 사관(史臣)들이 만하듯이 ‘소인들의 비방’으로 평가절하되었다. 현대의 우리가 본다면 이러한 사관들의 의견 역시 편향되었거나 왜곡되었다고 할 수 있다.
숙종 이후 영조시대에 율곡은 이미 조선의 대표적인 현인으로 자리매김되었다. 그리고 퇴계 이황과 함께 견줄 수 있는 유학자로 위상이 격상되어 있었다.
일본 유학자 야마구치 고이치의 율곡 종사에 대한 역사적 고찰은 율곡에 대한 사상적인 평가는 아니다. 그와는 별개 차원의 다른 이야기다. 율곡에 대한 후세의 평가가 어떻게 변화되었는가를 주목한 것이다. 율곡이 한사람의 유학자에서 조선유학의 대표적인 한 축이 되기까지는 이렇게 기나긴 시간의 치열한 평과 과정이 있었다.
1775년 4월 19일 일성록 기록에, 경연 장소에서 갑자기 율곡이 등장한 사실에 대해서는 그러한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궁중의 암투


 

1775년 4월 19일 : 궁중의 암투

 

사는 사실 하루도 평범한 날이 없다. 역사의 수례바퀴가 지나가는 순간에 그 밑에 깔리는 땅에는 수많은 드라마가 펼쳐진다. 어떤 미물(微物)은 그 바퀴에 깔려서 죽기도 하고 어떤 미물은 아슬아슬하게 살아남기도 하고 어떤 생물은 횡재를 얻기도 한다. 역사는 그러한 점에서 하루도, 한 순간도 평범할 수가 없다. 또 그 이전의 역사와 그 이후의 역사가 같은 경우도 없다.

겉으로 드러난 역사 기록상의 1775년 4월 19일(음력)은 아무 일도 없었던 그저 평범한 한해였고 하루였다. 그러나 궁중 안의 분위기는 상당히 긴장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정권의 교체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당시 81세로 접어든 영조의 건강은 하루하루가 다르게 악화되고 있었다. 1775년 5월 18일(음력 4월 19일) 일성록의 <임금께서 홍문관에 나아가셨는데, 내가 시강(侍講)을 하였다>라는 기사 말미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 약방 관리가 집경당(集慶堂)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임금께서 말씀하시기를,

“오늘 좋은 일을 하였다. 할아버지와 손자가 함께 강연을 한 것은 진실로 특이한 일이다. 세손의 문리(文理)도 아주 많이 나아졌다”

라고 하였다.

 

집경당은 경희궁의 중요한 궁전 건물 중 하나다. 그곳에서 임금 영조가 진찰을 받았다. 그리고 그날 행하였던 경연에 대해서 평가를 하였다. 영조의 말 가운데 오늘 좋은 일이란 경연을 말한다. ‘할아버지’는 영조, ‘손자’는 당시 왕세손이었던 정조를 지칭한다. 세손의 문리가 좋아졌다는 것은 경전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이 향상되었다는 뜻이다.

이러한 분위기가 언뜻 보면 평화스럽고, 혹은 상투적인 표현처럼 보일지 모른다. 영조의 권력은 다음해에 정조에게 넘어갔다. 하지만 당시는 권력의 순리적 이양을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영조의 앞 왕은 그의 형이 되는 경종이었다. 영조가 경종으로부터 권력을 받고 나서 궁중 안팎에서는 경종 독살설이 돌았다. 영조가 형인 경종을 죽이고 권력을 뺏었다는 것이다. 또 영조는 숙종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이야기도 돌았다. 숙종은 경종 앞의 왕이다. 이인좌는 이를 빌미로 반란까지 일으켰다.

또 영조는 자신이 마땅히 권력을 넘겨주었어야할 세자 사도에게 권력을 넘기지 않고 그를 뒤주에 가두어 죽여 버렸다.

이러한 사정을 생각해보면 영조와 왕세손인 정조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은 다양한 가능성이 많았다. 위의 기록 다음에 도제조(都提調, 좌의정) 이사관(李思觀, 1705년∼1776년)과 주고받은 대화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이사관 : 진실로 천고(千古)에 없던 성대한 일입니다.

임금 : 세손이 질문한 글 뜻이 어떠하던가?

이사관 : 신이 강연에 입시하지는 못하였어도 신하들이 전하는 바를 들으니 세손이 말한 글 뜻이 진실로 좋았습니다.

임금 : 그렇다. 오늘 일은 진실로 귀하게 여길 만하다.

 

세손 정조에 대한 영조의 강연 평가를 소개한 문장이다. 이러한 문장이 여기에 들어있다는 것은 바로 영조가 정조를 매우 신뢰하고 있으며 권력 이양이 순조로울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궁중에는 정조로의 권력이양을 방해하는 세력이 있었다. 그들은 물밑에서 치열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해 10월경부터 영조의 건강이 더욱 나빠지자 대리청정의 이야기(代理聽政)가 나왔다. 대리 청정이란 임금의 허락을 받아 다른 사람이 임금 대신해서 국정에 관한 사무를 대신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정조가 대리청정할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1753년(영조 29년)에 문과 급제한 홍인한(洪麟漢, 1722년∼1776년)이 1775년에 좌의정에 임명되었는데, 그는 세손 정조가 대리청정을 맡게 되는 것을 반대했다. 홍인한은 아울러 정후겸, 심상운 등과 함께 정조의 심복이었던 홍국영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 홍인한은 정조의 어머니이자 사도세자의 부인인 혜경궁 홍씨의 작은 아버지이기도 하다.

당시 실권자였던 정후겸(鄭厚謙, 1749년∼1776년)도 적극적으로 반대를 하였다. 평민출신이었던 그는 1764년 영조의 서녀 화완옹주의 양자로 입적하여 음서로 관직에 나갔다. 영조의 외손주가 된 그는 영조의 총애를 받아 호조참판, 공조참판, 병조참판, 승정원 승지까지 올랐다. 그는 정조가 권력을 잡게 되는 것을 반대하여 온갖 모략과 음해를 하였다. 정조의 주의에 사람을 심어두고 정조를 감시하는가 하면, 유언비어를 퍼뜨려 정조의 비행을 사방에 퍼뜨렸으며, 사람을 시켜 정조를 돕고 있던 홍국영의 탄핵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는 영조의 건강이 악화되는 것을 걱정하면서 어떻게든지 정조로 권력이 이양되는 것을 막으려고 하였다.

결국 영조가 1776년 초(영조 52년 음력 3월)에 경희궁 집경당에서 사망하자 왕세손 이산(정조)은 조선의 제22대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자신의 집권을 방해한 홍인한, 정후겸 등을 서인 신분으로 강등시키고 충청도 여산, 함경도 경원, 고금도 등지로 유배한 뒤에 처형하였다.

조정의 중요한 고위 세력가들이 정조의 등극을 반대하고 그것을 방해하였다는 것은 1775년 조정 내에서 왕세손으로서 정조의 위치가 불안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들은 단순한 방해에 그치지 않고 온갖 모략과 적극적인 음해를 시도하기도 하였다.

1775년 4월 19일,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하루였지만 조정안에서는 목숨을 건 암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날 경연의 말미에 영조가

“오늘 좋은 일을 하였다. 할아비와 손자가 함께 강연을 한 것은 진실로 특이한 일이다.
세손의 문리(文理)도 아주 많이 나아졌다”

라고 한 말은 유교 경전을 잘 읽고 이해하는 세손 정조가 다음 왕으로 등극할 자격이 충분이 있음을 선포한 것이었고, 정조의 등극에 반대하는 대신들을 향하여 정조를 왕세손으로 지지하는 자신의 마음이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말이었다.

 

평범한 하루


 

1775년 4월 19일, 평범한 하루

 

1775년 4월 19일은 그저 평범한 하루였다. ⌈일성록⌋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은 일들이 있었다.

〇 내(왕세손 정조)가 임금(영조) 옆에서 탕약 시중을 들었다.
〇 임금께서 연화문에 나아가 향축(香祝, 향과 축문)을 맞이하고 전송하셨는데, 내가 따라가 참석하였다.
〇 대신과 비변사 당상(堂上, 정삼품正三品 이상의 고위 관료)이 들어와 임금을 뵈었는데, 내가 옆에서 모셨다.
〇 약방 관리가 임금을 진찰하는데 내가 옆에서 모셨다.
〇 임금께서 홍문관에 나아가셨는데, 내가 시강(侍講, 임금께 강의)을 하였다.
〇 과거 시험관이 남도(南道)와 북도(北道)의 제술인(製述人, 문장 시험을 본 관리들)을 거느리고 임금을 뵈었는데, 내가 옆에서 모셨다.
〇 저녁 진료할 때 내가 옆에서 임금을 모셨다.
〇 과거 합격자 등수를 매기려고 신하들이 들어와 임금을 뵙는데, 내가 옆에서 모셨다.

임금의 몸이 편찬하여 약방 관리가 수시로 임금을 진찰하였다는 이야기, 탕약을 올린 이야기, 홍문관에서 강연한 이야기, 그리고 과거 시험에 관한 이야기가 나열되어 있다. 이중에서 홍문관에서 강연한 이야기는 상세한 내용까지 기록되어 있다. 다른 기록에는 제목만 있을 뿐이다.
이날 기록을 보면 외국인의 침범이나 전란이 있었다든가 내란이 발생하였다든가 혹은 천재지변과 같은 큰 사건의 기록은 없다. 평상시의 과거시험 혹은 비변사 업무 관련 기록이나 임금의 건강 문제만 적혀 있다.

영조실록⌋ 124권, 영조 51년 4월 18일(병신)의 기록도 마찬가지다.(⌈영조실록⌋의 날자와 ⌈일성록⌋의 날자가 서로 다른데, 착오로 보인다.)

〇 향을 맞이하는 예를 행하다.
〇 대신과 비국(備局비변사, 군사업무 담당 관청)이 당상(堂上)을 접견하다.
〇 서북 지방의 무사에게 시사를 행하고, 소학과 대학을 강하다.
〇 남북 지방의 문관(文官)·음관(蔭官)을 대상으로 제술 시험을 행하다.

동일한 날짜의 기록이기 때문에 일성록과 유사하다. 다만 이 기록은 국가의 기록이기 때문에 일성록의 “내(정조)가 옆에서 모셨다”는 이야기는 없고, 이날의 중요한 사항만 기록한 것이 특징이다. 소학과 대학에 관한 경연이 있었다는 기록은 일성록에 시강을 하였다는 항목과 동일한 것이다. 경연 외의 기록은 모두 간단하지만 경연 기록만은 상세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다만 일성록의 기록보다는 분량이 적다.

경연(經筵)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임금을 교육하는 일이다. 특히 유교의 경전이나 역사 서적을 바탕으로 강의를 하고 논의를 하는 일이다. 고려 문종시기에 처음 도입되었는데, 조선시대에 들어와 기능이 더 강화되고 제도가 정비되었다. 세종 임금과 같은 경우는 학문을 좋아하고 경연을 여는 일을 좋아 하여 2천 여회에 달할 정도였다고 한다. 재위 기간이 1418년부터 1450년까지 32년이었기 때문에 연평균 62회에 이른다. 일주일에 한차례 이상 경연을 개최하였다. 경연은 하루에도 여러 차례 열리기도 한다.
이러한 경연은 정치적인 기능도 가지고 있었다. 임금과 대신들이 모여서 책을 읽는 자리니 자연스럽게 정치 이야기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특히 유교 경전 가운데 정치와 관련된 내용이 나오면 당시 정치 현안이 화제로 등장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성격 때문에 경연은 또 정치적 측면에서 경연정치라고 불리기도 한다. 세종 임금 이후에 이러한 기능이 강화되었다.

고종 10년(1873년) 12월 24일『고종실록』을 보면 우의정 박규수(朴珪壽)가 다음과 같은 간언을 한다.

 

“우리 왕조는 나라를 세운 규모가 광명정대하며 모든 다스림과 정책이 모두 경연에서 나왔습니다. 하루에 세 번 신하와 만나서 경서와 사서를 토론한 것은 바로 의리를 강구하고 치란을 거울삼기 위해서입니다. 이 때문에 진강하는 여가에 연석에 나온 여러 신하들이 그 자리에서 일을 아뢰었던 것입니다. 대관(大官)은 나랏일을 건의하여 재가를 받았고, 유신(儒臣)들은 옳은 일을 권하고 잘못된 것을 고치게 했습니다. 따라서 조강의 규례를 보면 다스림과 정책이 경연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경연의 자리에서 경서와 사서를 토론하면서, 경우에 따라서는 관료가 나랏일을 건의하고 결재를 받으며, 유학자들을 그러한 사항에 대해서 시비판단을 하였다는 것이다. 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전하께서는 왕위에 오른 이래로 날마다 경연을 열어서 참으로 예모(禮貌)를 간소하게 하시고 친근하게 신하를 불러서 만나신 것은 도리어 법강(法講) 때보다 나은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글의 음과 뜻을 강독하는 것은 10번 정도이고 위에서 문의하면 아래에서 진술하는 정도에 그쳤습니다. 비록 대관이 연석에 나온 날이라도 반드시 급한 일을 아뢰어 재가를 받고 잡다한 일을 평의(評議)하는 것은 아니니, 경연의 강독은 따로 한 가지 일이 되고 다스림과 정책의 토론은 따로 한 가지 일이 될까 염려됩니다.”

 

경연을 하면서 임금의 질문에 대해서 소극적으로 대답만 할 뿐, 적극적인 평가나 건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을 말한 것이다. 또 대관들은 그 자리를 빌어서 급한 일에 대한 결재만을 받고 끝난다고 한다. 이어서 그는 경연제도에 대해서 이렇게 건의하였다.

 

“만일 현재 긴급한 백성들의 근심거리와 원대한 경세제민의 계책에 대해서는 일의 기미에 따라서 그때그때 묻고 지루함을 꺼려하지 않는다면, 어느 누가 임금의 뜻을 우러러 본받아 올바른 말씀을 들려드리지 않겠습니까? 오직 우리 임금께서 반드시 이를 즐거워하여 피로해하지 않으신다면 일체의 치도(治道)가 경연에서 나오게 될 것입니다.”

 

경연이 소극적인 경전 읽기에 그치지 않고 원대한 경세제민의 계책까지 논의할 수 있는 자리라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그는 모든 정치의 방도가 이 경연에서 나올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조선시대의 경연은 이렇게 폭넓은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그 전제조건은 유교 경전이었다. 그 경전에 기초해서 유교 정신에 입각한 교육이 이루어지고 그러한 정치가 이루어질 수 있는 구조적인 장치가 바로 이 경연이었다. ‘조선은 유교 국가다’라고 말할 때, 그러한 유교적 통치가 가능하도록 한 핵심적인 제도 중 하나가 바로 이 경연제도였다.

1775년 4월 19일 하루는 평범했지만,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의 궁정에서는 가장 중요한 정치적 행위가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유교와 기독교


 

1775년 4월 19일, 유교와 기독교

 

-1-
선교사 아담 샬의 모습
선교사 아담 샬의 모습
금 우리나라는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이 불교나 유교를 믿는 사람들보다 많다. 유교를 세상의 유일한 진리라고 생각했던 조선시대 지식인들은 상상을 할 수 없는 일이다. 기독교는 천주교와 개신교로 나뉘는데 천주교가 먼저 들어오고 나중에 개신교가 들어왔다.
천주교는 1700년도 말엽에 조선에 본격적으로 전파되기 시작했다. 1791년, 정조 15년에 조정은 천주교 신자 2명을 참수형에 처했다. 당시 북경 천주교의 지시를 따른 전라도 선비 윤지충 등이 천주교 방식으로 장례를 치렀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신해박해(辛亥迫害)라고 하는데 이는 그 뒤에 일어나는 여러 차례 천주교 탄압사건의 시작이었다.

당시 국왕 정조는 사실 천주교 탄압에 소극적이었다. 천주교 같은 사교(邪敎)는 유교를 이길 수 없고, 결국에 소멸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정조는 유교에 대해서는 상당히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던 학자 군주였다.
하지만 정조의 예상과 달리 천주교는 갈수록 세력이 커져갔다. 정조 뒤를 이은 왕들은 본격적으로 천주교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천주교는 왜 그렇게 탄압을 받았을까?

앞의 그림에 보이는 사람은 중국에서 활동한 천주교 선교사 아담 샬(Adam Schall, 중국이름 湯若望, 1591∼1666)이다. 그는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중국이름 利瑪竇, 1552∼1610)의 요청으로 중국에 파견된 예수회 선교사였다. 특히 그는 중국 선교에 활용하기 위해서 중국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서양 천문학과 역법분야에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고 중국으로 들어왔다. 앞의 그림에 나타나있는 지구의나 세계 지도, 그리고 방안 곳곳에 그려져 있는 도구들은 그가 그런 분야의 전문가임을 표현한 것이다.
지구가 둥글다는 것은 이미 15세기 말엽에 이탈리아 천문학자 토스카넬리(Paolo dal Pozzo Toscanelli, 1397∼1482)가 주장하였으며, 독일사람 마르틴 베하임(Martin von Behaim, 1459∼1507)은 그런 주장을 바탕으로 위와 같은 지구의를 만들었다. 또 마젤란(1480∼1521)은 1521년에 태평양을 건너 필리핀까지 항해함으로써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실제로 증명하였다.

아담 샬은 1622년에 중국에 건너와 명나라 학자인 서광계(徐光啓 1562∼1633) 등과 함께 새로운 역법(崇正曆法)을 제작하기도 하고, 같이 서양식의 대포를 만들기도 하였다. 또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로 바뀐 뒤에는 청나라 조정에서도 인정을 받아 천문관련 업무를 담당하고 선교활동을 계속하였다.
지구가 둥글다는 것은 결국에 논리적으로 지구가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지동설(地動說)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나 당시만 하더라도 지동설은 아직 서양에서도 인정을 받지 못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가 지동설 주장을 담은 서적을 피렌체에서 발간한 것은 1632년이었다. 아담 샬이 중국에 건너오고 나서 10년이 지난 때다. 로마 교황청은 갈릴레이의 책 배포를 금지하고 그를 종교재판소에 회부하였다. 그 다음해, 1633년에 갈릴레오는 유죄 판결을 받았다. 로마 교황청은 지동설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예수회 출신 아담 샬은 지구가 둥근 것은 인정하지만, 지동설은 아직 인정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이 지동설도 조선에 알려지면서 조선 사람들의 세계관과 우주관에 커다란 혼란을 일으켰다. 예를 들면 1766년에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이 지은 의산문답(醫山問答)은 오늘날의 지동설과는 다소 다르나 지구가 스스로 돌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아담 샬은 1644년에 조선에서 볼모로 잡혀 와 있는 소현세자(1612∼1645)와 만났다. 소현 세자는 나중에 조선의 왕이 될 수 있는 사람으로 아담 샬에게는 조선을 선교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는 그해 9월부터 11월까지 2달여 동안 소현세자에게 자신의 과학지식과 함께 천주교에 대해서도 다양한 지식을 소개하였으나, 소현세자는 조선에 귀국한 뒤에 곧바로 사망하여 아담 샬의 기대는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아담 샬의 꿈은 엉뚱한 루트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조선에서 서학에 관심을 가진 학자들이 천주교를 신앙으로 삼기 시작한 것이다. 선교사도 없는 조선에서, 사람들은 스스로 서학 책을 통해서 신앙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물론 일부 유학자들은 ‘서학’이 상당히 위험한 사상이라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서양의 천문, 지리학과 천주교 사상이 동양의 유학사상과 너무 극단적으로 충돌한다는 것을 직감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직접적으로 조선의 왕권을 위협하는 사상이기도 하였다.

-2-

조선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일월오봉도(日月五峰圖)가 있다. 일월도(日月圖) 혹은 일월오악도(日月五嶽圖), 일월곤륜도(日月崑崙圖)라고도 불리는 이 그림은 병풍으로 되어 있어, 항상 왕의 뒤편에 위치한다. 달과 해, 그리고 다섯 봉우리가 그려져 있는 이 그림은 그 자체로는 완성품이 되지 못하고 그 앞에 왕이 앉거나 위치하여야 하나의 그림이 된다고 한다.

일월오봉도와 왕이 앉는 옥좌·
일월오봉도와 왕이 앉는 옥좌·

 

위 사진을 보면 일월오봉도 앞에 옥좌(혹은 용상龍床)가 있다. 비어 있는 이 옥좌에 임금이 앉으면 일월오봉도의 완성된 모습이 된다. 그렇다면 이 일월오봉도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일월오봉도는 진안 마이산의 풍경을 그린 것이라고 한다. 다섯 봉우리 앞에 두 줄기의 폭포가 보이고 그 폭포가 흘러내리는 곳에 노란 색의 물결이 보인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한반도에 많이 보이는 구릉들을 묘사한 것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물결을 묘사한 것이다. 그곳이 바다일 수도 있고, 하천이나 호수일 수도 있다. 그런데 소나무가 양쪽에 그려져 있는 데 소나무가 서있는 곳에는 육지가 보인다. 흙무더기 위에 소나무가 두 그루씩 세워져 있다. 실지로 마이산을 가보면 위 그림과 비슷한 경치를 볼 수 있는 곳이 있다.

탑영제에서 바라본 마이산 풍경
탑영제에서 바라본 마이산 풍경

 

진안의 마이산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작은 호수가 있다. 탑영제라고 하는 곳인데, 마이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고여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사진의 건너편에 높이 솟아난 산들이 일월오봉도에 나타난 다섯 개의 봉우리들이라고 할 수 있다. 앞쪽의 봉우리는 비교적 펑퍼짐하지만 뒤쪽의 봉우리들은 일월오봉도에 나타난 산들처럼 뾰쪽하게 솟아 있다.
이곳 마이산은 태조 이성계와 관련된 유적지다. 이성계는 고려시대 말엽, 즉 1380년, 우왕 6년에 남원 부근의 운봉에서 왜구를 물리치고 이곳을 지나가다가 마이산을 보고 깜짝 놀랐다. 자신이 이전에 꿈을 꾸면서 하늘로부터 금으로 된 자(尺)를 받았는데 그 장소와 똑같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이곳 마이산은 조선 건국의 영산으로 추앙을 받았다. 그 이유로 그 마이산을 상징적으로 그려낸 일월오봉도가 왕의 권위를 나타내는 그림으로 추앙을 받았다고 한다.
물론 이 그림은 마이산을 있는 그대로 그린 것은 아니다. 상징화시킨 것이다. 하늘에 떠 있는 달과 해가 그것을 증명한다. 그리고 이 그림에서 중요한 것은 이성계가 하늘로부터 왕의 권위를 계시 받은 꿈과 관련된다는 점, 그리고 이 그림 앞에 왕이 위치함으로써 비로소 그림의 의미가 완성된다는 점이다. 즉 왕의 권위가 드러난다고 한다. 이 그림은 심지어 왕이 죽고 나면 왕의 어진(御眞, 초상화) 뒤에도 놓인다. 그만큼 왕의 권위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화가 오태환의 일월오봉도(2012년작)
화가 오태환의 일월오봉도(2012년작)

조선은 유교 사상을 바탕으로 건국된 나라이다. 유교는 바로 조선의 건국이념이었다. 이 때 유교는 성리학, 즉 주자학이다. 주자가 집대성한 유학을 바탕으로 조선을 기획한 유학자는 정도전(鄭道傳)이다. 정도전은 주자가 바라는 국가를 조선이라고 하는 나라를 통해서 실현해 내고자 하였다. 이 그림도 당연히 정도전의 유교 국가인 조선의 설계안에서 같이 구상되었을 것이다.

성리학은 우주와 천하만물을 논의하는 이기론(理氣論)과 인간의 마음과 도덕을 논의하는 심성론(心性論)으로 이루어진 사상이다. 이 사상의 체계화에 중요한 기여를 한 사상가가 북송사상가 주돈이(周敦頤, 1017∼1073)다. 주돈이의 ⌈태극도설⌋에 이러한 내용이 있다.

태극(太極)이 움직여 양(陽)을 낳고 음(陰)을 낳는다. 그것이 서로 뿌리가 되어 움직임이 극에 달하면 멈추고, 멈춤이 극에 달하면 움직이면서 음양이 이루어진다. 음양은 수화목금토(水火木金土)의 다섯 가지 기를 낳아 오행(五行)이 이루어진다. 이것들은 다시 서로 다양하게 조합하여 운행함으로써 건도(乾道)는 남성적인 기를 이루고, 곤도(坤道)는 여성적인 기를 이룬다. 이 두 기가 서로 감화하여 만물이 형성되고 인간이 생겨난다.
인간 중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인 성인(聖人)은 중정(中正)과 인의(仁義)로 기준을 삼고, 고요함을 주로 하여 인극(人極), 즉 표준을 세웠다. 성인은 그 덕성이 천지와 합치되고 그 밝음은 일월(日月)과 합치하며 순서는 네 계절과 합치된다. 말하자면 음양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우주만물이 생성, 발전하고, 그러한 이치가 인간의 덕성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것이 주돈이 태극도설의 주요 내용이다. 일월오봉도는 이러한 사상을 구체적인 이미지로 표현한 그림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일월오봉도와 이 주돈이의 사상을 결합하여 해석해보면 다음과 같다.

임금이 이 그림 앞의 옥좌나 용상에 앉으면 태극이 드러난다. 임금은 태극이다. 태극은 성리학에서 말하는 리(理)이기도 하다. 태극이 움직여 하늘에 그려져 있는 해와 달, 즉 그것이 상징하는 양과 음을 낳는다. 그 음과 양이 서로 뿌리가 되어 움직임이 극에 달하면 멈추고, 멈춤이 극에 달하면 움직이면서 음양이 이루어진다. 음양은 수화목금토(水火木金土)의 다섯 가지 기를 낳아 오봉으로 상징된 오행(五行)이 이루어진다. 이것들은 다시 서로 다양하게 조합하여 운행함으로써 건도(乾道)는 남성적인 기를 이루고, 곤도(坤道)는 여성적인 기를 이룬다.

그림에서 흘러내리는 두 줄기 폭포는 바로 그러한 남성의 기와 여성의 기를 상징한다. 이 두 기가 서로 감화하는 곳은 오봉 앞의 호수다. 이 호수에서 이 두 기가 서로 감화하여 만물이 형성되고 인간이 생겨난다. 두 기가 감화하는 모습은 호수 위의 작을 물결들이고 감화한 결과는 호수의 흙 위에 솟아난 소나무들이다. 화가 오태환의 그림을 보면, 꽃도 보이고 바위도 보인다. 오행은 그러한 것들을 만들어내며 인간도 만들어낸다.

여기까지는 임금을 중심으로 한 이 세상, 즉 조선이라고 하는 국가의 구조, 즉 천지자연과 백성들을 포함한 우주론적인 구조를 설명하였다. 이 다음은 그러한 태극으로서의 임금은 어떻게 행동해야하는지 하는 문제를 규정한 것이다.

인간 중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인 성인(聖人)은 바로 임금이라고 할 수 있다. 임금은 이 그림에서 주인공이다. 그리고 조선에서 가장 훌륭한 존재다. 왕의 권위를 갖춘 성인, 즉 임금은 중정(中正)과 인의(仁義)로 기준을 삼고, 고요함을 주로 하여 백성들이 행해야할 도덕적인 표준을 세운다. 즉 그러한 표준을 세우려고 노력을 해야 하고 또 세워야한다. 임금의 가장 큰 의무가 이것이다. 이 표준은 임금의 심리적인 내면의 마음에서도 그렇게 해야 하며, 정치적인 행위를 통해서도 그렇게 해야 한다. 법을 만들거나 집행할 때도 마찬가지다. 임금의 행위는 그 덕성이 천지와 합치되어야 하고 그 밝음은 일월(日月)과 합치하며 순서는 네 계절과 합치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음양의 움직임과 오행의 운행, 우주만물의 생성, 발전과 임금의 덕성 및 행위가 완전히 일치되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조선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자연 현상이며 인간의 행위가 원활하게 운행되고 이루어질 것이다.

1775년 4월 19일 눈의 띠는 궁중의 일상은 경연(經筵, 유교 경전 공부)이었다. 선조가 왕세손이었을 때 당시 임금인 영조를 모시고 유교 경전을 읽고 공부하는 일이 궁중의 중요한 일이었다. 이 날 뿐만 아니라 조선의 왕들은 수시로 그러한 경연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경연을 실시할 때도 임금은 항상 일월오봉도 앞에 앉았다. 일월오봉도는 왕에게 왕의 권위를 내려주는 그림이기도 하지만, 왕의 존재 이유를 상징한 그림이기도 하였다. 왕에게 항상 자신의 임무를 잊지 않게 하는 그림이었으며, 경연의 목표를 이미지로 분명하게 드러낸 그림이었다.
그런데 서학, 즉 서양 과학과 천주교가 조선에 전래되면서 일월오봉도 자체가 부정되는 상황이 발생되었다. 동양에서 지구는 네모형태라고 생각했다. 그 사방에는 바다가 있고 더 나아가면 낭떠러지가 있다고 생각했다. 일월오봉도가 전제로 된 이 세상은 그러한 세계이었다. 또 지구의 중심에는 중국이 있고, 조선은 중국 옆에 붙어 있다. 지구가 둥글다는 것은 이 세상에는 중심이 없다는 것이다. 중국의 존재도 의미가 달라지는 것이다.

물론 일월오봉도에는 중국이 없다. 조선이 비록 표면적으로는 중국이 천하 국가임을 인정하고 조공을 받치기도 하였지만, 실질적으로 조선은 중국과 대등한 주권국임을 일월오봉도는 상징하고 있었다. 조선 국왕은 중국 천자에 뒤지지 않는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표현한 것이 일월오봉도였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조선의 국왕은 중국의 제후국으로 자처해야 했고 중국에 조공을 보내야 하는 입장이었다. 중국 천자의 권위에 부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 그러한 구조가 무너지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서양 천주교는 이 세상을 여호와가 창조했다는 것이다. 이 세상은 음양의 조화와 오행의 운행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최고신이 어느날 갑자기 창조하였다고 한다. 일월오봉도에서 표현된 음양(해와 달)이며 오행(오봉)이 모두 서양 천주교의 신이 창조했다고 한다면 음양오행이 시작되는 태극은 여호와인가? 조선 국왕의 권위는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또 조선 국왕이 경연을 통해서 유교 사상을 배우는 행위도 더 이상 필요 없는 것인가? 참으로 많은 문제가 발생된다. 정조 15년에 유교식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고 천주교 신자 2명을 처형한 것은 오히려 작은 일이었다. 조선 왕의 권위를 위험하게 만드는 사상이 천주교였다.

천주교의 내용을 보아도 유교와 비교해보면 극히 위험스러운 사상이 내재되어 있다. 천당과 지옥, 만민 평등의 사상, 그리고 그 사상을 전파하는 신부나 선교사들의 헌신적인 사랑은 유교가 따라가지 못한다.

-3-

이러한 천주교가 1775년에는 표면에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서서히 조선 조정을 위협하면서 성장하고 있었다. 당시 천주교를 신앙으로 삼기 시작했던 주요 인물 몇 사람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권철신(權哲身, 1736∼1801)은 1775년 당시 39세(만 나이, 이하 모두 같음)였다. 그는 1771년 경기도 양주에서 정약용, 이벽 등 남인(南人) 실학자들이 개최한 연구회에 참여하면서 천주교를 신앙으로 삼기 시작했다. 1801년(순조 1년) 신유박해 때 사형되었다.

이벽(李蘗, 1754∼1786)은 1775년에 21살이었다. 정조 1년, 1777년에 권철신, 정약전 등의 서학 토론회에 참석한 후 천주교에 관심이 커졌다. 그 후 적극적으로 천주교를 신앙으로 삼고 선교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나중에 이승훈이 북경에서 영세를 받아오자, 그 자신도 이승훈으로부터 영세를 받았다. 1785년, 정조 9년에 조정이 천주교 탄압을 시작하자 천주교를 잠시 멀리 하였으나 그 다음해 병으로 죽었다.
이승훈(李承薰, 1756∼1801)은 1775년에 19살이었다. 정조 4년, 1780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이후 남인학자들과 함께 ‘서학’에 심취하여 그것을 실천의 학문으로 간주하여, 신앙으로 삼기 시작했다. 그러다 27되던 1783년에 북경으로 가서 천주교 영세를 받고 이듬해 귀국했다. 천주교 영세를 받은 것은 지금까지 기록 중, 조선 사람 중에서는 최초였다. 귀국 후 1년 뒤인 1785년부터 그는 지금의 명동에 천주교회를 세우고 적극적으로 신앙활동과 선교활동을 하였다. 1795년에 주문모 신부 입국 사건에 연루되어 충남 예산군에 유배되었다가, 1801년 신유박해 때 처형되었다.

정약전(丁若銓, 1758∼1816)은 1775년 당시 17세였다. 그는 성리학자이자 생물학자로 정약종, 정약용의 형이다. 정조 14년, 1790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다. 1798년에는 ⌈영남 인물고⌋를 편찬하기도 하였는데, 나중에 천주교 신앙생활에 전념하기 위해서 벼슬을 버렸다. 1801년 신유박해 때, 흑산도에 유배되었는데, 그곳에서 서당을 열어 학생들을 가르치고, 흑산도 물고기를 관찰하여 ⌈자산어보(玆山魚譜)⌋를 지었다. 유배지에서 16년간 활동하다 사망하였다.

황사영(黃嗣永, 1775∼1801)은 1775년에 태어났다. 그가 16살 때인 1790년(정조 14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당시 임금이었던 정조는 아주 어린 나이에 과거에 합격한 그를 특별히 불러 격려하였다. 그리고 나이가 어려서 벼슬을 못주니 20세가 되면 벼슬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황사영은 20세가 되기 전에 천주교도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북경에 있던 천주교 주교에게 편지를 보내 조선 내에서의 천주교 탄압이 심하니 조선에 군대를 보내 진압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러한 내용이 그가 지참한 백서(帛書)에 담겨 있었는데 발각되어 1801년 신유박해 때 다른 100여명의 천주교 교도들과 함께 처형당했다. 이를 황사영 백서사건이라고 한다. 조선의 미래를 기대했던 젊은이가 천주교에 빠져서, 외세까지 끌어들이고자 한 이 사건은 당시로서도 매우 충격적이었다. 천주교는 18세기 후반 조선의 젊은이들을 매혹시키면서 그 세력을 넓혀가고 있었다.

당시 18세기 후반 19세기 초반은 서구의 기독교 문명이 동양으로 진출하고, 동양의 기존 문명은 바야흐로 몰락해가기 시작하는 시기였다. 일본은 이미 그 전부터 서양의 과학문명을 신속히 받아들여 근대화를 성공적으로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의 지식인들은 서학의 종교적인 부분에 더 매력을 느꼈다. 종교적인 부분이라도 그것을 신앙으로 수용한다면 차츰 서양의 본질을 접하게 되고 조선을 개혁해나갈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조정은 줄곧 강경한 탄압으로 대응했다. 이러한 탄압이 조선의 몰락을 재촉한 것이다.

1775년 4월 봄은 조선 전체를 혼동에 빠뜨리게 될 새로운 종교세력이 태동하기 시작하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실학에서 서학으로


 

1775년 4월 19일, 실학에서 서학으로

 

조와 정조 시대에 학자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던 학문적인 경향을 ‘실학’이라는 개념으로 묶어서 보고자한 것은 1930년대 일제 시대 때 부터였다. 일본의 침략이나 도움 없이도 조선은 스스로 근대를 맞이할 수 있었다는 좋은 증거로서 ‘실학’이 주목받은 것이다.
이후 다양한 논의를 거쳐서 오늘에 이르고 있으나 실학은 우리나라 역사에 어떤 역할을 하였을까? 1770년대 영조에서 정조로 권력이 바뀌어가던 시기에 실학은 조선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을까?

한 가지 추측해볼 수 있는 것은 실학이 현실사회와 실용에 관심이 컸던 만큼 조선사회는 전체적으로 그러한 것들을 중시하는 사회로 발전하였을 것이라는 점이다. 1770년대부터 정약용의 활동이 펼쳐진 1810년대까지의 다양한 실학적인 성과물들이 그러한 상상을 가능케 한다.

특히 정조 시대는 “조선의 르네상스”라고 불릴 만큼 괄목할 만한 발전을 보았다. 그렇다면 실학의 성과를 바탕으로, 그러한 “르네상스” 뒤를 잇는 시대적인 발전이 그 후의 역사에 보이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잠시 그 뒤의 역사를 살펴보자.
정조의 뒤를 이은 23대 국왕 순조(1800∼1834) 시대에는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가 기승을 부리고, 평안도와 제주도 등지에서 민란이 발생하였다. 또 서양 기독교가 전래되어 사회적인 혼란이 가중되었다. 민란이 발생하였다는 것은 사회가 불안하고 민중들의 불만이 증대되었다는 뜻이다.

그 뒤를 이은 15년간의 헌종(1834∼1849)시대에는 서양의 함선들이 전라도, 경상도, 황해도, 강원도, 함경도 등 각지에 출몰하였으며 25대 철종(1849∼1863) 때에는 1862년에 진주 민란이 일어나는가 하면, 서양 기독교를 본받아 국내에서 창시된 동학 세력이 성장하여 조정을 긴장시켰다.
그 다음은 16대 고종(1863∼1907)의 시대다. 고종의 즉위와 함께 흥선 대원군이 정권을 장악하였는데, 이쯤에 조선은 이미 시대에 뒤쳐져 몰려오는 서양의 근대화 물결에 제대로 적응을 하지 못하고 일본의 침략을 맞이하게 되어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

정조가 사망하고 난 뒤에 전개된 조선의 현실은 실학자들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방향이었다. ‘실학’이 철저한 현실에 근거한 과학적인 사유의 성과물이 아니라는 것은 이렇게 역사가 보여준다. 현실 사회를 개선해나갈 수 있는 이론이 아니었다. 또 장차 전개될 조선의 미래를 책임질 수 있는 사상도 아니었다. 설사 그러한 학문이었다고 하더라도 역사는 그것이 더 발전될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이러한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실학자가 있다. 기학(氣學)을 제창한 혜강(惠岡) 최한기(崔漢綺·1803∼1877)이다. 최한기는 순조 시대에 태어나 고종시대까지 활동한 철학자이자 실학자다.

그는 당시 물밀듯이 쏟아지던 서구 과학사상을 중국을 통해 수용하였다. 그의 실학은 서구 과학을 수용하여 구축되었지만 과학이 아니라 철학이었다. 당시 일본에서도 많은 지식인들이 서구의 과학 사상을 수용하고자 노력하였는데, 그들은 서구의 언어를 배우고 서구의 과학 문명을 정확히 번역하는데 힘썼다. 그러한 번역을 바탕으로 서양에서 벌어지는 새로운 현상을 정확히 이해하고 그것을 서양의 방법론으로 탐구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최한기는 서구의 과학을 번역하여 정확히 이해하는데 관심을 두지 않고, 그것을 유교적인 관점에서 해석하고, 또 유교적인 방법론으로 탐구하고 실천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최한기의 노력은 당시 조선 사람들에게서도 외면을 받았다.
당시 세계 역사의 큰 흐름은,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듯이 서구문명의 길을 따라가는 것이었다. 서구의 새로운 과학문명을 배우고 서구 사회의 작동원리를 조선에 구현하지 않으면 조선은 멸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현대 200여국이 넘는 나라가 존재한다. 그런데 전통시대의 가치관이나 세계관을 그대로 유지하여, 그것을 바탕으로 존재하는 나라는 거의 없다. 서구식의 국가관, 세계관, 가치관을 바탕으로 현대 사회는 재편성되었다. 근대 직전의 시기에 이러한 준비를 잘 하지 못한 나라는 대체로 멸망하였거나 다른 나라에 흡수되었거나 식민지가 되었다. 조선은 그러한 준비를 잘 하지 못한 나라였다. 영조와 정조시기에 융성한 실학은 사실상 그런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역사를 뒤에서부터 거슬러 올라가면서 살펴본다면 영조와 정조 시대의 실학은 재빨리 ‘서학(西學)’으로 전환되어야 했다. 이익이나 정약용 등 실학자들의 사상에서 보이는 서구 기독교적인 사상의 흔적들이 좀 더 전면에 드러나 조선의 사상계를 이끌어 갔어야 했다. 그것이 자발적 서구화의 빠른 길이었기 때문이다.
실학자들 가운데는 ‘서학’에 주목한 경우도 있었다. 당시 서학이란 서양에서 전래된 과학기술이나 종교를 뜻했다. 초기에는 서양 기독교나 천주교도 서학이라 불렸고, 서양의 총포에 관한 지식도 서학이라 불렸다.

이렇게 서학의 뜻이 서양 종교와 과학을 겸하게 된 것은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에서 천주교를 전파할 때 서양의 과학지식, 즉 천문, 역법, 수학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한 손에는 성경을, 다른 한 손에는 과학책을 들고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했다.
그러한 서학이 조선에 전래되었다. 명나라 시기 1631년에 정두원(鄭斗源, 1581∼?)은 자명종(自鳴鍾), 망원경(千里鏡), ⌈직방외기(職方外記)⌋, ⌈서양풍속기(西洋風俗記)⌋ 등 서학 서적을 들여오고, 청나라에 인질로 가있던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1645)는 서양인 선교사 아담 샬과 교류하고 서학을 접했다. 1645년경에는 서양 과학 서적들을 가지고 귀국하였다.

실학자들은 이러한 서학에 대해서 일찍부터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하였다. 예를 들면 김석문(金錫文), 서명응(徐命膺), 홍대용(洪大容) 등이 서학서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주위에 그러한 지식을 알렸다.
아울러 실학자들은 과학과 기술 관련 부분은 이용후생(利用厚生)의 학문으로 수용하고, 천주교에 대해서는 긍정하기도 하고 부정하기도 하면서 이해를 깊이 하였다. 일부는 천주교를 학문적인 탐구 대상으로 살펴보기도 하고 일부는 신앙으로 수용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실학자 이익의 종손이자 그의 영향을 받은 이가환은 천주교를 종교 신앙으로 수용하였으며 그의 조카인 이승훈도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오늘 우리나라에서 천주교는 불교, 개신교와 함께 3대 종교에 속한다. 2005년 기준으로 불교 인구는 1072만 명, 기독교는 862만 명, 천주교는 514만 명이다. 천주교와 개신교를 합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많이 신앙하는 종교가 서구 기독교다. 실학은 비록 과학적이고 실용적인 지식을 추구했지만, 실질적으로 우리나라 역사에서는 종교적 공헌이 가장 컸다고 할 수 있다.

1775년 4월 19일 조정 안팎에서 실학자들은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학문을 추구하면서 자연스럽게 중국에서 전래된 서학, 즉 서양의 종교와 과학기술을 주목하고 주변에 알리고 있었다. 조선의 ‘근대’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달리 말한다면 유교 중심사회의 붕괴를 준비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실학의 시대


 

1775년 4월 19일, 실학의 시대

 

전적인 의미로 실학(實學)은 17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전반에 걸쳐 등장한 일련의 사회 개혁적인 조선 유학의 학풍을 말한다. 그동안 조선 시대 들어와서 학문의 주류였던 주자학, 즉 성리학과는 다소 성격을 달리하는 학문으로 크게 보면 성리학 일파에 속한다고 할 수 있으나 그 내부에는 성리학과 대항하는 내용이 담겨 있는 학문이다. 예를 들면 경세치용(經世致用)과 이용후생(利用厚生), 실사구시(實事求是)의 내용이 담겨 있다.

이러한 실학은 사실 근대에 한국학계에서 발굴해낸 개념이다. 17세기 후반 이후에 실학에 관심을 가진 학자들이 스스로 실학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스스로는 누구나 정통 주자학자로 자처했다. 단지 학문의 대상이 다소 현실적이며 이론에 치우치지 않았다는 점이 다르다.

실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한중일 삼국 학자들을 모아 국제실학 학술대회를 개최하기도 한다. 그런데 중국에서 온 학자들이나 일본에서 온 학자들은 이 ‘실학’의 개념에 대해 생각이 다르다.
중국의 어떤 학자는 ⌈중국실학사상사⌋를 집필하여 중국실학을 제시하기도 하였는데, 거기에는 송나라 시대의 주자학부터 명나라의 양명학, 그리고 청나라의 고증학까지 모두 포함하여 ‘실학’이라고 보았다. 중국인들에게는 주자학 자체도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문이며 양명학도 실사구시의 학문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우리나라 조선시대 학자들이 초, 중기에 집중하여 연구한 성리학은 아주 특수한 ‘비(非) 실학적’인 주자학이다.

일본의 학자들도 한국의 ‘실학’ 개념에 적응을 잘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래서 나온 것이 ‘실심실학(實心實學)’ 개념이다. 한국의 실학은 ‘실심(實心, 진실한 마음)’의 실학이며, 일본의 경우를 보면 그러한 실심의 실학을 구마자와 반잔(熊沢番山, 1619∼1691)과 미우라 바이엔(三浦梅園, 1723∼1789)의 철학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구마자와 반잔은 양명학자이며, 미우라 바이엔은 서구 자연과학에 관심이 많았던 유학자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지적은 동경대학 교수 오가와 하루히사(小川晴久)의 주장이다.

사실 일본의 경우, 우리나라 실학에 견줄 수 있는 학문분야는 난학(蘭學)이다. 난학은 ‘네덜란드 학문’이라는 뜻으로 ‘서구학문’이다. 이 역시 실질적인 실용주의적 학문, 즉 ‘실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의 난학은 철저하게 서양의 방법론으로 그들의 과학 지식을 수용하고자 하였으며, 철학적인 사유는 최대한 배제되어 있다. 이 점이 우리나라 실학과는 차이가 있다. 철학 자체도 과학의 일종으로 수용하고자 한 것인 일본 난학의 특징이다. 이 난학은 양학(洋學)으로 발전하여 나중에는 일본 근대학문의 튼튼한 기초가 되었다. 우리나라 실학은 일본 난학과 비교해보면 주자학적인 틀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한 고대 동양철학의 한 분야일 뿐이다.

1775년 영조시대 말기에 실학은 충분히 숙성해 있었다. 나중에 정조가 등극을 한 뒤에 활약한 실학자들의 면면과 그들의 대표작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안정복(安鼎福, 1712∼1791): ⌈동사강목(東史綱目)⌋(1760)
홍대용(洪大容, 1731∼1783): ⌈의산문답(醫山問答)(1766년)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열하일기(熱河日記)⌋(1780년)
이덕무(李德懋, 1741∼1793):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이가환(李家煥, 1742∼1801): ⌈기전고(箕田考)⌋(1790)
유득공(柳得恭, 1748∼1807): ⌈발해고(渤海考)⌋(1784년)
박제가(朴齊家, 1750∼1815): ⌈북학의(北學議)⌋(1778년)
정약전(丁若銓, 1758∼1816): ⌈자산어보(玆山魚譜)⌋(1814)
정약용(丁若鏞, 1762∼1836): ⌈목민심서⌋(1818), ⌈경세유표⌋(1817)

1775년을 기점으로 보면, 안정복의 ⌈동사강목⌋은 이미 15년 전에 발간되었고, 홍대용의 ⌈의산문답⌋은 9년 전에 완성되었으며, 박제가의 ⌈북학의⌋는 3년 뒤에 발간된다. 그리고 ⌈열하일기⌋와 ⌈발해고⌋ 등이 1780년대에 완성되고,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정약용의 작품이 약 35년 뒤인 1810년대에 줄줄이 발표된다.

1775년에 홍대용은 만 나이로 44세, 박지원은 38세, 이덕무는 34세, 이가환은 33세, 유득공은 27세, 박제가는 25세, 정약전은 17세, 정약용은 13세였다. 실학파의 주요 학자들이 이미 당시 학계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실학은 사실 임진왜란 뒤인 광해군 시대에 활동한 이수광(李睟光, 1563∼1628)이나 영조 시대 초기부터 활약한 남인계 실학자 유형원(柳馨遠, 1622∼1673), 이익(李瀷, 1681∼1763) 등의 활약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이수광은 1614년(광해군 6년)에 일종의 실학적인 백과사전인 ⌈지봉유설(芝峰類說)⌋을 지어 새로운 학문의 등장을 알렸다.

유형원은 국가 개혁과 운영에 관한 내용을 정리하여 ⌈반계수록(磻溪隨錄)⌋을 지었는데, 1670년(현종 11년)에 완성하여 1769년(영조 45년)에 간행하였다. 이익의 대표작은 ⌈성호사설(星湖僿說)⌋로 1720년경부터 집필을 시작하여 1760년경에 편찬되었다. 이 책은 독서하거나 제자들과 나눈 대화 가운데 중요한 내용을 모아 만든 저술이다.
1775년에 <세한도>로 유명한 김정희(金正喜, 1786∼1856)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지만, 이후 정조 10년에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나중에 ‘추사체(秋史體)’로 불리는 자기 나름의 독특한 서법을 만들었으며 금석문 연구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는데 이러한 실학적인 분위기가 영조와 정조시기를 통해서 형성되어 있었으며, 1775년은 그러한 실학의 영향력이 한층 고조되고 있었다.

실학은 근본적으로 조선의 내부에서 발전된 것인가, 아니면 중국의 영향을 받은 학문일까?
기본적으로는 중국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중국의 영향이란 구체적으로 중국을 통한 서구 문화의 영향이다.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북경으로 들어가 선교활동을 시작한 것은 명나라 말기인 1601년경이었다. 이후 서양의 선교사들이 북경이나 중국 각지에서 활동하면서 서양 과학문명이 중국 지식인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이러한 중국 지식세계의 동향을 잘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17세기 후반에 시작된 실학은 그러한 움직임에 대한 반응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 중국내부에서 일어난 고증학도 함께 조선의 실학파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사실은 서구 문명의 전파는 일본 쪽이 중국보다 좀 더 빨랐다. 서양 선교사들은 일본을 통해서 중국으로 진출했다. 예를 들면 프란시스 자비에르(Francis Xavier)는 이미 1549년경에 일본에 도착하여 선교활동을 하였다. 일본의 난학이 그렇게 발전한 것은 서구 선교사들의 영향과 그들과 함께 들어온 서구 상인들의 역할이 컸다. 임진왜란 때 일본이 조선을 쉽게 침범할 수 있었던 것은 일찍 수입한 서구 문명의 힘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지식인들은 그때까지만 해도 여전히 중국을 중심으로 세계를 생각하고 있었다. 일본의 지식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시대였다.

실학의 발생 배경으로 중국으로부터의 영향 못지않게 조선 내부의 변화도 중요하다. 이미 앞서 소개하였듯이, 영조와 정조 시대에 조선의 화가들은 자기주변의 사물을 과거와는 다른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소위 미술계의 ‘진경문화’ 시대와 똑같이 유학계에서도 ‘진경문화’의 시대가 펼쳐진 것이다. 그동안은 중국에서 받아온 주자학의 이론에만 몰두하였으나 차츰 자기 주변의 환경과 사회를 주자학적인 이론으로 바라볼 수 있는 역량이 생긴 것이다. 그러한 역량이 새로운 학풍인 실학 등장에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1775년의 조정은 그러한 시대적인 분위기 속에 있었다.

그저 평범한 한해


 

1775년, 그저 평범한 한해

 

일성록⌋과 ⌈영조실록⌋을 보면,

1775년 즉 영조(英祖, 1694년 ∼ 1776년) 51년(을미년) 음력 4월 19일(양력 5월 18일) 임금 영조는 손자인 이산(李祘) 즉 훗날의 정조(正祖, 1752년∼1800년)를 데리고 같이 홍문관(弘文館)에서 글을 읽었다.

그 날 임금의 공부 내용을 살펴보기 위해서 앞서 글에서는 영조·정조시대의 문화적인 분위기, 즉 미술계의 사정을 살펴보았다.
1775년 한 해는 어떤 해였을까? 그 해의 분위기를 살펴보기 위해서 당시 조선시대의 1770년대를 살펴보기로 한다.
영조가 자신의 둘째아들 사도세자(莊獻世子, 1735∼1762)를 사망하게 한 것은 1762년(영조 38년)이었다. 그 뒤 시간이 8년이나 지나, 사도세자의 아들 이산은 벌써 만 18세의 나이로 성장해 있었다.

1770년. 영조 46년. 정조 만 18세.
이해에 전국적으로 가뭄에 대비하여 저수지나 강둑을 수리하고 보완하였다. 오늘날의 백과사전과 같은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100권이 완성되었다. 조선의 문물제도 전반에 관하여 소개한 책으로 당시로서는 국가를 다스리기 위해서 꼭 필요한 지식을 모아놓은 기초 필수 문헌이었다.
이 서적의 주요 편찬자는 홍봉한(洪鳳漢, 1713년∼1778년)이다. 홍봉한은 사도세자의 부인이자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로, 정조에게는 외할아버지에 해당한다. 1744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나중에 좌의정과 영의정까지 역임하였다.

1772년. 영조 48년. 정조 20세.
구리 활자인 갑인자(甲寅字)를 보수하여 15만 자의 활자를 만들었다. 갑인자는 세종 시기 1434년(세종 16년)에 주조한 것인데, 그것을 추가하고 보완한 것이다. 변계량(卞季良)은 이 활자 덕분에 세종 시대 때에 조선에서 “인쇄되지 않은 책이 없다”고 하였다.

1772년에 만든 활자는 임진년에 만들었다고 하여 임진자(壬辰字)라고 하는데, 세손(世孫)이었던 정조가 명을 내려 만든 것이다. 이 활자로 이해에 ⌈역학계몽집전(易學啓蒙集箋)⌋을 찍었다. 다음해 1773년에는 ⌈신정자치통감강목속편(新定資治通鑑綱目續編)⌋을 출판하고 1775년에는 ⌈경서정문(經書正文)⌋을 찍었다. 1777년에 정조는 왕에 즉위하여 다시 활자를 만들게 하였는데, 이 때 활자는 정유자(丁酉字)라고 불린다. 이 해에 ⌈원속명의록(原續明義錄)⌋을 인쇄하고 1779년에는 ⌈아송(雅誦)⌋을 찍었다.

1773년. 영조 49년. 정조 21세.
서울의 청계천 강둑을 돌로 쌓기 시작했다. 청계천은 서울 중심을 흐르고 있어서 조선시대에는 준설작업과 둑 쌓기 등 치수 사업의 중요한 대상이었다. 1760년에 이미 영조는 한차례 개천 준설작업을 지시하여 하천 바닥의 흙을 파서 물 흐름을 개선하였는데, 이 해에 백운동에서 흐르는 물과 삼청동에서 흐르는 물이 만나는 지점에서 시작하여 오간수문(五間水門)까지 직선으로 석축을 쌓게 하였다.
이해 11월에 총융청(摠戎廳)에서 새로운 포탄을 만들어 사격 실험을 하였다. 총융청은 조선의 5군영 중 하나로, 서울의 북부 방비를 담당하는 수비군이다.

1774년. 영조 50년. 정조 22세.
등준시(登俊試)를 실시하여 15명이 급제하였다. 조선시대 과거시험은 3년마다 정기적으로 시행하는 식년시(式年試)가 있고, 부정기적으로 실시하는 여러 종류의 과거가 있었다. 등준시는 현직 관리나 왕의 친척 등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임시과거인데, 이 해에는 종 1품에서 당상 정3품을 대상으로 실시하였다.

1776년. 영조52년. 정조 24세.
영조가 향년 82세로 사망하였다. 왕세손 이산인 정조가 조선의 22대왕으로 즉위였다. 정조는 억울하게 죽은 부친 사도세자를 기리기 위해서 경모궁(景慕宮)을 다시 세우고, 억울하게 죽은 부친 영전에 다음과 같은 글을 지어 올렸다.

“너무도 슬프면 말이 길지 않고, 지나치게 애절하면 감정이 오히려 무뎌집니다. 소자(小子)가 지금까지 15년 동안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은 죽을 줄 몰라서가 아니라 선왕의 은혜를 입어 왕위를 이어받기 위해서입니다. 선친께 장헌이란 시호를 올리고 경모궁을 다시 짓고 선친의 묘소 이름을 영우원(永祐園)이라 지었습니다. 예조판서에게 이와 같이 모든 의식을 정하도록 시키고, 의식에 쓸 제기와 악기 등은 종묘에 비해 한 단계 낮게 정하였습니다. 저 세상에 계신 영령께서 이 소자의 마음을 알고 계실는지요. 숭정(崇禎) 이후 세 번째 병신년에 피눈물로 삼가 서문을 씁니다.”

(⌈홍재전서⌋ 권8)

 

이해에 창덕궁 후원 부용지 옆에 규장각(奎章閣)을 새로 지었다. 규장각은 세종대왕 때의 집현전과 같은 기관으로, 왕실 도서관이며 학문 연구 기관이다. 숙종 때 규장각이라는 작은 도서관이 있었는데, 이 때에 이르러 시설을 확충하고 직제를 갖추고 조직을 강화해나갔다. 예를 들면 3년 뒤인 1779년에는 내각검서관(內閣檢書官)을 설치하였는데, 내각은 규장각으로 그 안에서 검서(檢書), 즉 도서를 관리하는 공무원을 둔 것이다.

규장각 규모는 문관이 모두 6명, 기타 잡직 총 35명, 그리고 거기에 따른 인원 등으로 모두 80명이 넘었다. 원래는 역대 왕들의 글과 책을 수집하고 보관하는 도서관 기능이 컸으나, 정조는 더 많은 임무를 규장각에 부과하였다.
비서실의 기능과 문서, 서신관리 그리고 과거 시험을 주관하게 하고, 문신들을 교육하는 임무까지 부여하였다. 또 규장각에서 많은 책을 편찬하도록 하였는데, 이러한 환경에서 박제가(朴齊家, 1750∼1815), 유득공(柳得恭, 1748∼1807), 이덕무(李德懋, 1741∼1793) 같은 지식인들이 성장하게 되어 학문이 발전하고 새로운 학술사상이 싹텄다.

1780년. 정조 4년. 28세.
창덕궁에 측우기를 설치하고 천문, 지리, 책력 등을 담당하는 서운관(書雲觀)에 명하여 ⌈천세력(千歲曆)⌋을 만들게 하였다. 당시는 세종 때 만든 역법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 결함을 시정하고 좀 더 세밀한 역서를 만들도록 한 것이다. 역서는 농업이 국가의 기간산업이었던 당시로서는 국가의 부강과 국민들의 생활에 직결되는 중요한 자료였다.

또 10년 전에 제작한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가 너무 급히 편찬되어 잘못된 점과 누락된 것이 많았는데 이를 수정하고 보완하기 위한 보완작업이 시작되었다. 이 작업은 이후 16년간 진행되어 1796년 ⌈증정문헌비고(增訂文獻備考)⌋라는 이름으로 146권의 책으로 출판되었다. 이후 이 책은 고종 때에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라는 이름으로 총 250권의 방대한 백과사전으로 발전하였다.

그 주요 내용을 보면 상위(象緯), 여지(輿地), 제계(帝系), 예(禮), 악(樂), 병(兵), 형(刑), 전부(田賦), 재용(財用), 호구(戶口), 시적(市糴), 교빙(交聘), 선거(選擧), 학교(學校), 직관(職官), 예문(藝文) 등이다.

조선의 1770년대는 이렇듯 대외적으로 특별한 위협이 없이, 대내적으로도 큰 혼란이 없이 국가 사회가 안정적으로 내실을 다지고 있던 시기였다. 1775년은 크게 특기할 만한 일도 없었다.
전란으로 점철되었던 16세기 말의 임진왜란(1592∼1593), 정유재란 (1597∼1598), 그리고 17세기 초반의 정묘호란(1627년), 병자호란(1636년∼1637년) 등 전화에서 벗어나 100여년이 지나면서 조선사회는 바야흐로 태평성대라고 불리는 시기를 맞이한 것이다. 1775년은 그러한 시기의 중간에 있었던 평범한 한해였다.

영조와 정조의 시대


 

1775년 4월 19일, 영조와 정조의 시대

 

조(英祖) 51년 을미년, 즉 1775년 음력 4월 19일(양력 5월 18일)에 영조는 손자인 정조(正祖), 즉 당시의 세손(世孫)을 데리고 홍문관(弘文館)에서 글을 읽었다. 이 기록이 ⌈일성록⌋과 ⌈영조실록⌋에 보인다.

율곡 이이(1537년∼1584)가 사망하고 191년이 지난 뒤의 일이다. 이 때 율곡은 ‘선정(先正)’이라 불리며, 퇴계 이황과도 같은 훌륭한 유학자이자 국가적인 스승으로 존경을 받고 있었다.

여기에서는 우선 그 날이 어떤 날이었는지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음력 4월 19일 이 날은 육십갑자로 병신일(丙申日)에 해당하는 날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기록은 1775년, 즉 을미년(乙未年)의 음력 4월 19일 ⌈일성록⌋과 ⌈영조실록⌋의 기록이다.

1775년은 조선시대 500년 역사를 100년씩 나누어 구분해본다면 300년이 지나고 400년에 가까운 시기이다. 조선이 4/5정도 지나면서 조선은 이미 임진왜란(1592년)과 병자호란(1636년)을 겪었다. 임진왜란은 일본이 침략하여 한반도의 남부 지역이 병란에 휩싸인 사건이며, 병자호란은 청나라의 침략으로 한반도의 북부가 유린된 사건이다.

이러한 커다란 혼란을 이겨내고 피폐해진 국가 재정을 극복하여 영조시기(영조 재위 시기, 1724년∼1776년)는 조선의 국력과 문화가 새롭게 부흥하는 시기였다. 역사가들은 영조 재위시기와 이 뒤를 이은 정조 재위시기(1776년∼1800년)를 합하여 조선의 르네상스기, 혹은 조선 문화의 중흥기라고 높게 평가한다.

이 시기에는 그러한 평가에 걸맞게 조선시대 대표적인 예술가들, 학자들이 출현하여 활약하였다. 문화는 사회 안정과 발달의 척도라고 할 수 있다. 사회가 안정되고 발달하면 문화가 흥성한다.
예를 들면 ‘진경산수(眞景山水)’를 즐겨 그린 정선(鄭歚, 1676년∼1759년)이 영조 재위시기에 활약하였다. 이른바 ‘진경산수’란 ‘산수(山水)’ 즉 물과 산을 그린 경치가 ‘진경(眞景)’ 사실적인 경치에 가깝다는 것이다.

정선(鄭歚)의 광나루 그림 . 중국 산수화처럼 기이하고 웅장한 멋은 없지만 포근하고 친근한 풍경이 그려져 있다.
정선(鄭歚)의 광나루 그림 <광진(廣津)>. 중국 산수화처럼 기이하고 웅장한 멋은 없지만 포근하고 친근한 풍경이 그려져 있다.

그 전에 조선의 화가들은 자신이 사는 산천 경치를 그리는 것보다는 중국 사람들이 그린 산수화를 배워서 경치를 그렸다. 예를 들면 조선시대 초기에 활약한 안견(安堅)의 그림을 보면 그러한 점을 느낄 수 있다.

안견의 중 만추(晩秋)
안견의 <사시팔경도(四時八景圖)> 중 만추(晩秋)

 

그림을 보면 높이 속은 봉우리와 구름에 잠긴 산 중턱, 기다랗게 떨어지는 폭포수 등이 아름답기는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쉽게 보는 경치가 아니다. 중국의 황산(黃山) 어느 골짜기에서 그린 듯한 이러한 그림은 중국화가의 작품을 모방하고 상상하여 창조한 것이다. 정면의 조그마한 산봉우리에 지어놓은 정자도 중국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모습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저렇게 산꼭대기에 지은 정자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안견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도 환상적인 이상의 세계를 아름답게 표현하였지만 우리가 현실에서 찾아볼 수 있는 모습은 아니다. 그 그림이 담고 있는 자연의 세계는 말이 자연이지 사실은 추상적인 피안의 세계일뿐이다.
안견의 그림은 비록 조선시대 미술사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고 있지만 독창성의 측면, 그리고 사실성의 측면에서는 영조·정조 시대의 작품들에는 미치지 못한다.

조선 초기와 중기의 그림들이 중국 그림을 적극적으로 모방하고 중국 경치를 이상적인 모델로 삼는 이면에는, 달리 말한다면 자신들이 사는 곳은 경치를 그리기에 부족하다는 생각을 전제로 한 것이다. 말하자면 일종의 열등감이 내재되어 있다. 중국의 문화, 그리고 그러한 문화가 그려내는 중국의 자연이 중심이고 자신의 문화나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의 자연은 주변인 것이다.

그러한 열등감이 임진왜란과 정묘호란 등의 시기를 거치면서 어느 정도 사라지면서 변화를 맞게 되었다. 민족적인 위기와 그 위기를 극복하고 수습하면서 사상적으로 문화적으로 성숙되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 사람들이 이제는 자신들이 사는 곳의 경치도 화폭에 옮겨서 그릴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기게 된 것이다.

진경산수화의 등장은 바로 조선의 문화계가 중국 중심적이고 중국 위주의 사대주의적인 관념에서 벗어나기 시작하였음을 나타낸다. 마치 조선의 유학 사상이 퇴계와 율곡을 거치면서 추상적인 주자 철학이나 이기론(理氣論)보다는 현실적인 문제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된 것과 유사하다. 중국 송나라 시대 주자학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수용하는 입장에서 그러한 가르침을 우리나라의 현실 상황에 어떻게 활용하고 변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관심이 옮겨간 것과 같다.

이러한 영조·정조 시대 정선 외에 풍속화 화가로 잘 알려진 김홍도(金弘道, 1745년∼1806년)와 신윤복(申潤福, 1758년∼1814년?)도 등장하여 활약하였다. 그리고 김득신(金得臣, 1754년∼1822년), 강세황(姜世晃, 1713년∼1791년) 등 인물도 이 시기에 활약하였는데, 이들이 자기 주변의 자연이나 풍속을 즐겨 그렸다는 사실은 바로 당시 조선의 문화계가 높은 수준에 도달했으며, 중국과 비교하여 자기들 나름의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 시기 화가들이 자기 주변의 풍속을 즐겨 그렸다는 사실은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기 사회와 문화에 대해 자신감을 갖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윤복 그림 이 시기 화가들이 자기 주변의 풍속을 즐겨 그렸다는 사실은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기 사회와 문화에 대해 자신감을 갖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윤복 그림 <젊은이들의 봄나들이>
이 시기 화가들이 자기 주변의 풍속을 즐겨 그렸다는 사실은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기 사회와 문화에 대해 자신감을 갖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시기 진경산수화 중에 볼만한 것이 강세황(姜世晃, 1713년∼1791년)의 그림이다. 그는 장원 급재하고 예조판서까지 지낸 문인이자 화가였다. 그는 김홍도의 스승이기도 하였는데, 그의 그림은 중국 사람들에게도 알려져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그가 중국인들이 하는 것처럼 중국의 경치를 그렸어도 그럴 수 있었을까? 그의 그림을 구경해보자.

강세황의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 일부
강세황의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 일부

 

커다란 바위들이 나지막한 산등성이 아래에 몰려 있다. 그런데 바위 오른 쪽으로 길이 나 있고 그곳에 사람들이 지나고 있다. 사실은 거대한 돌들과 웅장한 산의 모습이다. 그래도 전체적으로는 매우 친근하고 정겨운 풍경이다. 우리나라 자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에게는 기이한 풍경일 것이다.

강세황, 백석담(白石潭)
강세황, 백석담(白石潭)

 

위 그림은 <송도기행첩(松島紀行帖)>에 실려 있는 그림으로 수많은 바위가 인상적이다. 바위들이 널려 있는 모습이 마치 고인돌 군락지와도 같다.
우리나라에는 전 세계 고인돌의 50%정도가 몰려있는 고인돌 대국이다. 왜 이러한 고인돌이 우리나라에만 많이 몰려 있는지 그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약 4만기 정도의 고인돌이 우리나라에 있다. 고인돌이 집중되어 있는 지역은 전라도 지역이지만 개성의 관산리도 유명한 고인돌 군락지다. <송도기행첩>의 송도는 바로 개성이고, 저 바위들의 모습은 그곳의 고인돌을 그렸을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영조·정조시대의 화가들은 자기 주변의 풍경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화폭에 담았다. 1775년 5월 18일 당시의 사회, 문화적인 분위기를 그림으로 살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