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연(李升淵)1767∼1829


이승연(李升淵)                                                             PDF Download

 

1767(영조 43)∼1829(순조 29). 조선 후기의 문신.

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뇌연(雷淵). 자는 문계(文階) 또는 태초(太初), 호는 연재(衍齋)이다. 세종의 별자(別子)인 광평대군(廣平大君)의 후손(14대손)으로, 아버지는 군위현감 이의화(李義和)이며, 어머니는 통덕랑(通德郞) 유언(兪彦)의 손녀이다.

홍의영(洪儀泳)과 박윤원(朴胤源)에게서 수학하고, 1792년(정조 16) 사마시에 합격한 뒤, 1804년(순조 4) 익릉참봉(翼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어머니의 상중이라 부임하지 않았다. 1810년 제릉참봉에 제수되었다.

이어서 의금부도사․종묘서직장(宗廟署直長)․상의원별제(尙衣院別提)․장악원주부․호조좌랑․영희전령(永禧殿令)․장녕전령(長寧殿令)․전생서판관(典牲署判官) 등을 역임한 뒤, 1817년에는 목천현감이 되었다. 1826년 장악원(掌樂院)과 사옹원주부(司饔院 主簿)를 거쳐 1827년에는 군자감판관(軍資監 判官)을 지냈다.
청렴결백하고 공사를 바르게 집행하여 사람들이 ‘신명같다’고 칭송하였다. 문장에 뛰어났으며 남긴 유고(遺稿)가 있다.

 

[참고문헌]

⌈국조방목(國朝榜目)⌋, ⌈매산문집(梅山文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종선(金宗善)1766∼1810


김종선(金宗善)                                                             PDF Download

 

1766(영조 42)∼1810(순조 10). 조선 후기의 문신.

관은 청풍(淸風). 자는 성보(城甫), 호는 송재(松齋)이다. 할아버지는 청원부원군(淸原府院君) 김시묵(金時默)이고, 아버지는 공조참의 김기대(金基大)이다.

일찍이 이술원(李述源)으로부터 글을 배운 뒤 박윤원(朴胤源)․오윤상(吳允常)의 문인이 되었다. 근재 박윤원과 영재 오윤상은 모두 김원행(金元行)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z

정조에 의해 특별히 척신(戚臣)으로 기용되어 돈녕부주부(敦寧府主簿)가 되었으며, 1800년 순조가 즉위하면서 의령현감을 역임한 뒤 승지와 도승지가 되어 매번 강연(講延)에 나아갔다. 1809년(순조 9) 형조참판을 거쳐 이듬해 우윤(右尹)이 되었다.

 

[참고문헌]

⌈순조실록(純祖實錄)⌋, ⌈매산집(梅山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홍익진(洪翼鎭)1766∼1801


홍익진(洪翼鎭)                                                             PDF Download

 

1766(영조 42)∼1801(순조 1).  조선 후기의 학자.

관은 풍산(豊山). 자는 경진(景進), 호는 남애(南崖)이다. 홍현주(洪顯周)의 아들인데 큰아버지 홍봉주(洪鳳周)에게 입양되었다. 홍익진의 처는 기씨(奇氏)이다.  김이안(金履安)과 김원행(金元行)의 문인이다. 미호 김원행은 도암 이재(李縡)의 제자이며 담헌 홍대용(洪大容)의 스승이다.

1790년(정조 14) 별시에서 부(賦)를 지어 정조로부터 시권(試券)을 하사받았으며, 1799년 왕명으로 「농정소(農政疏)」를 올리자 정조가 이를 가상히 여겨 영릉참봉을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고 학문을 연구하면서 후진들의 교육에 정열을 쏟았다.
특히 문장에 뛰어나 여러 사람의 존경을 받았으며 실천하는데 주력하였다.   뒤에 학행이 인정되어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남애집」 2권이 있다.

남애집(南崖集)⌋은 조선 후기의 학자 홍익진의 시문집이다.   2권 1책으로 석인본이다.   현손인 홍복희(洪復憙)와 홍석희(洪錫憙) 등이 편집하여 간행하였다.   권두에 기노장(奇老章)의 서문과 권말에 홍복희의 발문이 있다.   현재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권1에는 부(賦) 11편, 시 3수, 소 1편, 발 제2편, 일기 1편이 있고, 권2에는 부록으로 가장․묘갈명․묘표․서(序) 각 1편, 서(書) 4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진농정소(陳農政疏)」는 1799년(정조 23)에 농정에 대한 시무(時務)를 진언한 상소로, 먼저 옛 성현들의 정치제도와 그 시행에 대한 뜻을 밝히고, 당시 농정의 폐단을 12조목으로 구분하여 상세히 지적한 다음, 그에 대한 대비책을 제시하였다.
토지가 건조하고 습함에 따라 파종의 시기가 서로 다르다는 점과 곡물도 기후의 특성에 따라 적기에 파종하고 수확해야 한다고 설명하면서, 한발․홍수․역민(役民)․징세(徵稅)․저수(貯水)․동경(冬耕) 등에 대하여 자세히 논하였는데, 이것은 당시의 농업관계를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

일장여소년부(日長如少年賦)」는 봄날의 길고 화사함을 소년시절의 학업에 종사하는 사람에게 비유하여 설명하면서, 봄날이 길고 좋기는 하지만 영구히 계속되지 못하는 것과 같이 소년시절도 오래 가는 것이 아니므로 시기를 놓치지 말고 공부를 열심히 하여 성취해야 된다는 글이다.   이밖에도 자기의 일상생활에서 보고 들은 것을 모아 비망에 대비한 「일기(日記)」가 있다.

[참고문헌]

「남애집(南崖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박동형(朴東蘅)1749~1808


박동형(朴東蘅)                                                             PDF Download

 

1749年(영조 25)~1808年(순조 8) 조선 후기 문신.
관은 죽산(竹山), 자는 태언(台彦), 호는 불변당(不變堂)이다. 아버지는 박원유(朴元)이며 전라도 호곡리(好谷里)에서 태어났다.
아들은 박진호(朴震祜)이고 손자는 순조(純祖) 25년(1825) 을유(乙酉)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에 합격한 박규서(朴奎瑞)이다. 김이안(金履安)의 문인이다.

남원 죽산박씨 종가(南原 竹山朴氏 宗家), 즉 전라북도 남원시 수지면 호곡리에 있는 죽산박씨의 종가 가옥에 가면 효자(孝子) 박동형(朴東蘅) 정려(旌閭)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저서에는 ⌈불변당유고⌋ 2권이 있다.
⌈불변당유고(不變堂遺稿)⌋는 조선 후기의 학자인 박동형의 시문집이다.  2권 1책으로 석인본이다. 1966년 6세손 박환준(朴煥俊) 등이 편집하여 간행하였다.  권두에 김윤동(金潤東)의 서문과 권말에 박중식(朴仲植)의 발문이 있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권1에는 시(詩) 181수, 문목(問目) 6편, 서(書) 16편, 제문 10편, 묘표 1편, 찬(贊) 1편, 서(序) 6편, 잡저 1편이 수록되어 있고, 권2에는 부록으로 언행록 1편, 문(文) 4편, 가장(家狀) 1편, 만(輓) 24수, 제문․행장․묘표 각 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는 차운(次韻) 또는 화답류(和答類)가 많으며, 율시에는 성리학의 이학적 사변을 읊은 것도 있다.  서(書)에는 예학과 경학(經學)에 관한 훈고적인 문답이 많다. 대개 친구 사이에 왕복한 것으로, 그 중 ⌈가례에 관한 문답이 39개 항목, ⌈대학에 관한 문목이 29개 항목, ⌈논어에 관한 문목이 21개 항목, ⌈맹자에 관한 문목이 7개 항목 등으로 되어 있다.
잡저에는 자손들을 경계한 것으로, 선비된 자는 뜻을 세우기에 따라 성공여부가 달려 있다는 내용으로 입지(立志)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참고문헌]
불변당유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낙풍(金樂灃)1786∼1834


김낙풍(金樂灃)                                                             PDF Download

 

1786(정조 10)∼1834(순조 34). 조선 후기의 문신.

관은 의성(義城). 자는 적여(績汝), 호는 삼락재(三樂齋). 김섭(金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김표로(金彪老)이고, 아버지는 김성(金城)이며, 어머니는 장학호(張學浩)의 딸이다. 김이안(金履安)의 문인이다. 김이안의 호는 삼산재(三山齋)으로 김창협(金昌協)의 증손자이며 김원행(金元行)의 아들이다.

1814년(순조 14) 사마시에 합격한 뒤, 이듬해평안도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전적이 되었으며, 온릉령(溫陵令)을 거쳐 예조좌랑과 호조정랑․병조정랑을 역임하면서 춘추관기사관을 겸하였다.

1822년 장령이 되었다가, 같은 해 종부시정 겸 편수관이 되어 선원보(璿源譜)를 찬수한 공으로 1823년 병조참의에 올랐으나 고향으로 돌아갔다. 1824년 돈녕부도정으로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조선 중기의 예학의 대가인 사계 김장생(金長生)의 예론을 열심히 따랐다. 김장생은 구봉 송익필(宋翼弼)에게서 예학을 배우고 후에 율곡 이이(李珥)에게 성리학을 배워서 유학의 거두가 되었다.

 

[참고문헌]

⌈순조실록(純祖實錄)⌋, ⌈철종실록(哲宗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매산집(梅山集)⌋, ⌈노사집(蘆沙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