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와 달의 운행 속도가 다른 까닭


 

해와 달의 운행 속도가 다른 까닭

 

곡의 「천도책(天道策)」에 등장하는 과거시험의 첫 번째 문제의 답을 살펴보자. 먼저 문제는 아래와 같다.

 

“천도(天道)는 알기도 또 말하기도 어렵다. 해와 달이 하늘에 걸려서 한 번은 낮이 되고 한 번은 밤이 되는데, 제각기 느리고 빠른 것은 누가 그렇게 한 것인가?”

 

여기서 천도는 자연의 원리라고 이해하면 되겠다. ‘해와 달이 하늘에 걸려’ 있다는 말은 땅이 우주의 중심에 있고, 여러 천체들이 하늘에 매달려 있다는 전통의 천원지방의 우주관의 표현이다. 그런데 해가 뜨면 낮이 되고 달이 뜨면 밤이 되는데, ‘제각기 느리고 빠른 것은 누가 그렇게 한 것인가?’라고 묻는다. 여기서 태양과 달이 땅을 도는 속도가 다르다는 점과 ‘누가’가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 따져 보아야 할 문제이다.

먼저 관측상에서 볼 때 태양과 달이 도는 속도가 다르다는 점은 이렇다. 태양은 언제나 변함없이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 그런데 달은 뜨는 곳이 일정하지 않아 매일 조끔 씩 동쪽으로 이동하면서 뜨고 언제나 서쪽으로 진다. 이렇기 때문에 태양과 달이 땅을 도는 속도가 다르다. 사실 이것은 달이 지구를 공전하고 지구가 자전하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이다.

다음으로 ‘누가 그렇게 한 것인가?’의 문제는 그런 자연의 원리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묻는 질문이다. 조물주가 그렇게 창조했는지 아니면 만물을 주재하는 인격체가 있는지, 그것도 아니면 원리 자체가 그래서인지 묻는 질문이다.

그렇다면 율곡은 어떻게 대답했을까?

 

“모든 변화의 근본은 오직 음양뿐입니다. 이 기(氣)가 움직이면 양이 되고 정지하면 음이 됩니다. 한 번 움직이고 한 번 정한 정지한 것은 기요, 움직이게 하고 정지하게 하는 것은 이(理)입니다. 대개 천지 사이에 형상이 있는 것은 간혹 오행(五行)의 바른 기가 모인 것도 있고, 또는 천지의 어그러진 기를 받은 것도 있습니다. 혹은 음양이 서로 부딪치는 데서 발생하기도 하고, 혹은 두 가지 기가 발산하는 데서 생기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해·달·별은 하늘에 걸렸고, 비·눈·서리·이슬은 땅으로 내립니다. 바람과 구름이 발생하고 우레와 번개가 치는 것은 기(氣)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여기까지 보면 자연의 모든 현상의 이와 기의 두 가지 요소로 설명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성리학의 자연관을 가지고 만물의 발생을 음양이나 오행의 기를 가지고 이렇게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리학의 전제에 따라 발생하는 그 자체는 기의 변화이지만 그 변화의 원인은 이(理)라는 관점이 녹아 있다.

 

“그 하늘에 걸리게 하고 땅에 내리게 하며, 구름과 바람이 생기게 하고 우레와 번개가 치게 하는 것은 이 이(理)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음과 양이 조화하면 저 하늘에 걸린 것은 그 절도를 잃지 아니하고, 땅에 내리는 것은 다 때에 맞추어 바람·구름·우레·번개가 다 화창한 기운 속에 있을 것이니, 이는 떳떳한 이치입니다. 음과 양이 조화를 이루지 않으면 그 행하는 것이 절도를 잃고 그 발산하는 것이 때를 잃어서, 바람·구름·우레·번개는 다 어그러진 기에서 나옵니다. 이는 이(理)의 변고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천지의 마음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바르면 천지의 마음도 바르고, 사람의 기가 순하면 천지의 기도 순합니다. 그러면 이(理)의 떳떳함이나 변고를 한결같이 천도에만 맡겨야 되겠습니까? 저는 이 때문에 말하고자 합니다.”

 

여기서 자연현상을 주도하는 것은 음양의 두 기인데, 그것이 조화를 이루느냐 못 이루느냐에 따라 날씨가 기후가 화창하기도 하고 그렇지 못하기도 한다고 보았다. 오늘날 날씨의 변화는 온도와 습도에 따른 기압 차이에 따라 크고 작은 변화가 일어나는데, 온도와 습도의 정도를 음양으로 나누어 보았다는 점에서 다소 추상적이지만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사람의 마음이 바르면 천지의 마음도 바르고, 사람의 기가 순하면 천지의 기도 순합니다. 그러면 이의 떳떳함이나 변고를 한결같이 천도에만 맡겨야 되겠습니까?’라고 하여 인간의 마음과 자연의 변화를 일치시켰다는 데 있다. 오늘날 관점에서 보면 미신에 가깝다고 평가하겠지만, 조선후기까지도 군주의 마음이나 행동이 자연현상에 영향을 미친다고 믿었다. 게다가 최근까지도 관습적으로 지도자의 덕과 자연재해를 연결시킨 것을 보면, 당시는 당연한 것으로 믿었을 것이다.

자연현상과 인간의 일이 관계된다는 사상은 저 멀리 전한(前漢)의 동중서(董仲舒)가 만든 이론에 닿는다. 그는 군주가 포악한 정치를 하면 원망하는 백성들의 기가 하늘에 올라가 음양의 변화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재앙과 이변이 일어나는데, 그래도 군주가 반성하지 않으면 나라를 망하게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의도는 군주의 횡포를 막을 길이 그런 식의 설명 말고는 사실상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후로 변고와 이변이 생기면 군주는 반성하고 삼가서 좋은 정치를 펼쳐야 한다는 전통이 생겼다.

 

“천지의 원기(元氣)가 처음으로 갈라진 이후로 해와 달이 교대로 밝으니, 해는 큰 양(陽)의 정기(精氣)이고 달은 큰 음(陰)의 정기입니다. 양의 정기는 빠르게 운행하기 때문에 하루에 하늘을 한 바퀴 돌고, 음의 정기는 느리게 운행하기 때문에 하루에 다 돌지 못합니다. 양이 빠르고 음이 느린 것은 기요, 음이 느리게 되는 것과 양이 빠르게 되는 까닭은 이(理) 때문입니다. 저는 누가 그렇게 하는지를 알지 못하겠으나, 스스로 그렇게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여기서 율곡은 태양이 빠르고 달이 느린 것은 이치상 음과 양의 성질 때문이라고 풀이했는데, 음양의 이치로서 보면 일리가 있지만, 오늘날 지구과학의 입장에서 보면 음양의 성질을 지나치게 확대 해석한 결과로 보인다. 또 태양과 달의 운동이 느리고 빠른 것을 누가 그렇게 한 것인지 알 수 없고, 또 스스로 그렇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는 점은 조물주나 인격적인 주재자를 인정하지 않는 입장이다. 물론 성리학에서는 그것들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치가 그렇게 스스로 운동하도록 정해져 있다고 행간을 읽을 수 있다. 이글을 읽어보면 서양에서도 그랬지만, 과학과 철학이 완전히 분리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