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의 『천도책(天道策)』과 자연과학


 

율곡의 『천도책(天道策)』과 자연과학

 

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율곡의 학문적 업적은 철학·교육·정치·사회개혁 등의 다방면에 걸쳐있지만, 자연과학적 견해를 살펴보는 일이 좀 생뚱맞다고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의 글에는 그런 자연과학과 관련된 내용이 분명히 있다. 바로 그가 쓴 과거시험의 답안인 「천도책(天道策)」이 그것이다. 이 글은 1558년(명종13) 율곡이 23살 때 별시의 과거시험에서 장원하였을 때의 답안(答案)이다. 현재 『율곡전서』 권14 「잡저」에 실려 있고, 한국고전번역원에서 제공하는 누리집에서 원문과 번역문을 다운받을 수 있다. 여기서 인용한 「천도책」도 그 번역문을 참고하였다.

이 글이 워낙 유명해서 후대 조선 학자들의 수많은 문집에서 그것을 거론하였고,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중국사신이 왔을 때 그것을 보고자 했다고 전한다. 그러니까 당시 과학의 수준에서 볼 때 첨단 이론이라 할까? 그게 아니면 자연과학적 견해를 성리학의 논리에 맞게 잘 진술한 명문장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 답안을 말하기 전에 당시 과거시험 문제를 보면 어떤 내용 답할지 상상할 수 있다. 가령

“천도(天道)는 알기도 또 말하기도 어렵다. 해와 달이 하늘에 걸려서 한 번은 낮이 되고 한 번은 밤이 되는데, 제각기 느리고 빠른 것은 누가 그렇게 한 것인가?”

와 같은 질문이 그것이다. 여기서 천도(天道)를 직역하면 하늘의 길인데, 요즘말로 자연의 원리나 자연법칙이다. 그러니까 하늘에서 태양이 도는 속도와 달이 도는 속도가 다른 원인을 묻는 질문이다. 요즘에는 웬만한 초등학생들도 알 수 있는 내용을 물었으니, 과거시험이라는 게 수준 낮다고 여길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근대적인 자연과학이 아직 발달하지 않았을 때라 그 답을 안다는 것이 쉬운 문제는 아니었다.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대부분의 과학지식은 대개 서양에서 르네상스를 거쳐 17세기 과학혁명이 일어난 이후에 알 게 된 것들이다. 그 이전에는 동서양 모두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근대 자연과학이 밝혀낸 지식과 일정한 거리가 있다.

우선 율곡의 답안을 살펴보기 전에 당시 성리학의 배경을 이룬 자연과학과 우주관을 알아 둘 필요가 있겠다. 왜냐하면 율곡이 답한 내용이 성리학의 배경을 이루는 자연과학 지식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오랜 옛날부터 동아시아인들이 생각했던 우주는 둥근 하늘이 네모진 땅을 덮고 있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설이었다. 마치 네모난 네 벽을 둥근 지붕이 덮고 있는 초가집을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런 모양의 우주를 개천설(蓋天說)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개천설은 너무 단순하고 문제가 있어, 훗날 마치 계란껍질이 노른자를 둘러싸고 있듯이 둥근 하늘이 네모난 땅을 둘러싸고 있다는 혼천설(渾天說)로 바뀌었다.

그러나 개천설이든 혼천설이든 모두 땅이 네모지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고, 땅은 언제나 한결같이 정지해 있고 하늘이 돈다는 천동설이다. 그래서 앞의 질문에서 해와 달과 별들은 하늘에 걸려 있고, 하늘이 하루에 한 번씩 땅을 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해와 달이 하늘에 걸려있다고 여겼을까?

이것을 이해하려면 먼저 성리학을 이루고 있는 기본 개념 가운데 이(理)와 기(氣)를 알아 둘 필요가 있다. 그걸 다 말하려면 매우 복잡하기 때문에, 인간의 문제는 일단 제외하고 내용을 단순화시켜서 자연과학과 관계되는 자연철학의 영역에서만 설명해 보겠다. 자연과학의 입장에서 볼 때 이(理)는 사물의 원리 또는 법칙으로 볼 수 있고, 기(氣)는 사물을 이루거나 또는 우주와 자연 속에 가득 차 있는 물질의 근원이라 말할 수 있다.

어쨌든 모든 사물은 기가 엉겨서 이루어진다고 믿었다. 기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음기(陰氣)와 양기(陽氣)가 그것이다. 양기는 따뜻하고 운동하며 적극적이고 뻗어가는 성질이 있는 반면 음기는 차갑고 정지하며 소극적이고 움츠려 드는 성격을 갖는다. 물론 이것은 하나의 기이지만 상황이나 조건에 따라 두 기로 나누어 본다. 그리고 더 나누면 수(水)·화(火)·목(木)·금(金)·토(土)의 다섯 가지 기로 나눌 수 있다. 이 다섯 가지 기를 오행(五行)이라 일컫는다.

따라서 우주는 기로 가득 차 있고 우주 속의 만물은 기가 엉겨서 질(質)을 이루면서 생성된다. 태양은 양(陽)의 정기(精氣)가 달은 음(陰)의 정기가 하늘에 올라가 된 것이며, 그리고 남은 정기가 올라가 별이 되었다고 믿었다. 정기란 만물을 생성하는 원기(元氣)이다. 그리고 지상의 온갖 사물들도 제각기 맑거나 탁하거나 밝거나 어두운 기가 섞여서 해당 사물의 특징을 이룬다. 여기서 성리학을 완성한 주자(朱子)나 주자에게 큰 영향을 끼친 정자(程子)는 이런 기가 계속해서 생겨나며 일정한 기한이 지나면 소멸한다고 설명한다.

그럼 이(理)는 어떤 역할을 하는가? 성리학에서 말하는 이는 기의 운동이 그렇게 운동할 수밖에 없는 원리이다. 겨울이 가면 봄이 오고, 봄이 가면 여름이 오듯 사시의 변화가 질서 있게 이루어지는 것은 이(理)가 그렇게 하도록 만든다고 한다.

따라서 자연의 변화를 이렇게 이와 기라는 두 가지 요소로 설명이 가능하게 된다. 요즘 식으로 말한다면 물질과 그 법칙 또는 현상과 원리로 자연을 설명한다고 말할 수 있겠으나 꼭 그것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원래 이와 기는 자연을 설명하기보다 인간을 설명하기 위해서 고안한 성리학의 주요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자연을 이와 기의 개념에서 완전히 분리시켜 이해한 것은 아니다. 자연을 이해한다는 것도 바로 이렇게 인간적 가치나 원리로부터 완전히 배제된 것은 아니므로 순수한 자연과학이라 보기가 어렵다. 이 점은 뒤의 율곡의 답을 더 보면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