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보가 이이·정철을 옹호하다


이산보가 이이·정철을 옹호하다

 

래『선조실록』은 이이가 죽은 지 한 해 뒤 1585년(선조18) 1월의 기록으로, 경연에서김우옹·이산보등이이이·성혼·정철·심의겸의 관계를 놓고 토론을 벌이고 있다.
경연에서 말이 이이의 일에 미치니, 김우옹이 선조에게 말하였다.

“어떤 사람은 이이가 소신(小臣: 김우옹 자신을말함)을 배척했다고 말하지만 이는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신과 이이는 서로 안지가 매우 오래되었는데,  처음 그의 사람됨을 보니 학식이 있고 성품이 평탄하고 막힌 곳이 없어 믿고 사귀었습니다.  그 뒤에 생각이 같지 않고,  또 그가 하는 일에 잘못된 것이 많아 사람들은 그를 많이 의심했지만, 신만은 그의 마음에 딴 생각이 없다는 것을 보증하였습니다.  이이도 신과 교분이 깊었기에 의견은 서로 같지 않았어도 오히려 수습하고자 했는데, 신이 정철을 공격함에 이르러서 비로소 신을 ‘사리에 어둡고 어리석다.’ 고 하였을뿐 별로 배척한 일이 없습니다.”

“배척했다는 말은 나도 듣지 못했다.  다만 이이와 유성룡(柳成龍)이 서로 배척하였다고 하더라.”

라고 선조가 말하니, 김우옹이 또 말하였다.

“이이는 심의겸과 교분이 두텁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승지 이산보(李山甫)를 돌아보면서 물러보니, 이산보가 말하기를,

“교분이 두터운데까지는 이르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김우옹이 또 말하였다.

“정철이 심의겸과 서로 교분을 맺었습니다.”

“그렇게 두터운 사이는 아닙니다.”

이산보가 또 이렇게 말하니, 김우옹이 말하기를,

“이산보가 정철과 교분이 두터워  감히 전하 앞에서 그의 악(惡)을감추고 있습니다.”

라고 하였는데,  말소리와  얼굴 빛이 자못 거칠었다.  선조가 말하기를

“이산보의 사람됨이 임금 앞에서 말을 꾸며대지는 않는다.  성혼(成渾)이 심의겸과 사귀었는가?”

하니, 김우옹이 그렇다고하자 선조가 말하기를,

“성혼이 초야에 있을 때 여러 신하들이 그의 덕행을 말하면서 나에게 등용하기를 권하였는데, 오늘에 이르러서는 또 심의겸의 문객(門客: 권세있는 대가의 식객)이라하니 어찌된 일인가?”

라고 하니, 김우옹이 말하였다.

“어찌 그의 문객이 되기야 했겠습니까.  다만 교분이 두터웠을 따름입니다.  또 정철·신응시(辛應時) 등이 사사로이 무리를 많이 끌어들여 조정의 물을 흐리고 혼란시켰는데,  전하의 밝은 살핌에 힘입어 이산해(李山海)를 이조판서로 삼아 위임하셨기 때문에 저들이 방자하게 행동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선조가 말하기를,

“정철이 등용하려 했던 자가 누구인가?”

하니, 김우옹이 대답하기를,

“신이 다 알 수는 없지만 그가 사귀고 등용시키려고 한 자들은 모두 많은 소인배들로 산해가 배척하여 쓰지 않은 자들이 많습니다. 이산보는같은집안의일이니반드시 모르는것이없을것입니다. 그에게물어보시옵소서.”

라고 하였다. 선조가 이산보에게 물어보니,  그가 그렇지 않다고 답하였다.
선조가 다시김 우옹에게 묻기를,

“그대의 생각으로는 정철이 이산해를 모함하려고 한다고 여기는가?”

하니, 김우옹이 답하기를,

“신이 그것을 알 수는 없지만 정철이 사귀는 많 은소인배들을 이산해가 배척했기 때문에 이 무리들이 갖가지 계책으로 동요시켜 그 형세가 매우 위태롭습니다.”

하였다. 이산보가 말하기를,

“이산해는 신의 사촌형으로 어떠한 잘못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비난하 는사람들이 많으니,  체직시켜 온전하게 해주소서.”

하니, 선조가 말하기를,

“나는 동요되지 않는다.”

하였다. 다음날 판돈녕(判敦寧: 판돈녕부사로 종일품) 정철이 경연에서 나온  말 때문에 죄를 자처하고 면직을 청하니,  답하기를,

“말세의 인심이 서로 등지고 괴이해서 궤변(詭辯)과 분분한 귀설(鬼說: 귀신의 말이라는 뜻이니 출처가 분명치 않고 세상을 혼란 시키는 말)은 나도 어쩔 수  없다.  경은 어찌 기필코 그들과 따지려하는가.”

하였다.  김우옹이 즉시 차자(箚子: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사실만 간단히 기록한 상소문)를 올려 말하기를,

“전하의 분부가 이와  같으니 이는 신이 한 말이 궤변이나 귀설을 면치 못한 것임은 물론 험악한 마음을 품고 재상을 모함한 것이어서 범한죄가 매우 무겁습니다. 벌을내리소서.”

하니, 선조가 말하기를,

“나는 평범하게 말했을 뿐이다.  어찌 유학에 조예가 깊은 신하의말을 지목하여 귀설이라고까지 했겠는가?”

라고 하였다. 얼마 안되어 선조의 특별 지시로 이산보를 가선(嘉善: 종2품의 문무관의 품계로 가선대부)에 올리니,  김우옹은 그 때문에 병으로 사면하고 드디어 향리(鄕里)로 돌아갔다.

이 기록을 읽어보면 비록 율곡이 죽고 없어도 그와 그의 동료들과 심의겸의 관계를 통해 재평가 될 수 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에 놓여 있다. 이 글을 보면 심의겸은 이미 회피 인물로 그려진다.  동인은 율곡과 정철과 성혼을 심의겸과 깊이 사귄 것으로 보려고하고,  이산보는 아니라고 옹호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래서 글 속의 분위기를 보면 상당한 긴장감이 맴돈다.
이렇게 당시 부제학(홍문관의정3품)이었던 김우옹(金宇顒)이 율곡과 정철(鄭澈)을 논박하자 이에 이산보가 반박해 선조로부터 충절이 있다는 칭찬을 받고 대사헌으로 특진한 일의 기록이다.  선조의 마음은 아직 율곡과 그의 동료들을 떠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얼마 뒤 이산보 는율곡과 박순·정철의 공적을 논하다가 사간원의 탄핵으로 지방의 관찰사로 전직되었다.  선조의 마음은 서서히 동인쪽으로 기울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율곡이 죽은 이듬해에 송응개·허봉·박근원 세 사람을 영의정 노수신의 사면 요청으로 풀어 주었다.  삼사를 장악한 동인들은 연일 서인들을 탄핵했다.
탄핵을 당하면 죄가 있든 없든 스스로 물러났으므로,  조정은 점차 동인들이 늘어나게 되었고,  반면 서인들은 위기에 직면했다.
서인이었고 기축옥사(己丑獄死) 사건의 중심 인물이었던 정여립이 동인이 된 것도 이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