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선비의 기상을 보이다.


 

조선 선비의 기상을 보이다.

 

선조수정실록』선조 24년(1591) 3월 1일의 기록이다.

은 생각건대 선비는 자신의 말이 쓰여지지 않으면 말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지만 강상(綱常:조선시대의 윤리인 삼강오륜)이 땅에 떨어질 지경이면 혹 분연히 일어설 수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중략)

신이 삼가 오늘날의 사세를 헤아려 보건대, 국가의 안위와 성패가 매우 긴박한 상태에 있으니 참으로 불안한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속히 왜국 사신의 목을 베고 중국에 알린 다음 그의 사지(四肢)를 유구(오키나와) 등 여러 나라에 나누어 보내, 온 천하로 하여금 다함께 분노하게 하여 왜적을 대비하도록 하는 일만이 전의 잘못을 보완하고 때늦은 데서 오는 흉함을 면할 수 있습니다. 삼가 전하께서는 속히 잘 생각하시어 사람이 못났더라도 말만은 버리지 말고 종묘와 사직의 대계를 위하여 지체하지 않으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중략)

소원(疏遠)하고 천박한 신이 감히 분수에 넘친 일을 청하였습니다만 시사(時事)가 매우 급박한데 미리 대비하지 않아 패망당할까 두려웠습니다. 이에 중국 조정에 변란을 알리는 소장의 초안을 잡았고 유구국의 국왕과 일본과 대마도에 있는 유민(遺民) 중 호걸들에게 적의 사신을 체포하게 할 격문의 초안을 잡았으며, 영남과 호남의 왜구에 대한 대비책에 대해서도 모두 일에 따라 차기(箚記: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상소문의 하나)하여 삼가 별지(別紙) 7폭에 갖추어 기록해서 소매 속에 품고 있습니다. 사대․교린에 대한 법규를 잘 알지는 못합니다만 사리가 정직하지 못하면 도를 드러낼 수 없다고 한 맹자의 훈계가 있습니다. 따라서 스스로 생각건대 이렇게 한다면 사리가 절로 밝아지고 말도 정직하고 의(義)도 장엄하게 되어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그러나 소원한 몸으로 참람스러워 감히 바로 진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만 혹 전하께서 보잘 것 없는 말을 곡진히 받아 주시어 즉시 세숙과 자산(정나라 때 어진 신하) 같은 사람을 시켜 토론하고 윤색하게 하여 승문원으로 하여금 아침에 옮겨 적어 점심 때 봉하게 한 다음 특별히 중신을 파견하여 달려가서 아뢰게 하되 행장을 꾸리는 일순(一旬)안에 먼저 1본을 등사해서 통역관 1인을 붙여 주어 신으로 하여금 먼저 요계(요동지역)에 알리고 나아가 북경에 알리게 한다면, 중국 조정의 임금과 신하들이 우리가 밤낮으로 달려와 제때에 고하는 정성에 감동되어 두루 여러 진(鎭)과 여러 나라에 효유하여 미리 방비하여 은밀히 조처하도록 하고 천하가 다 같이 분노하여 기어코 이 왜적을 천지 사이에 용납할 수 없게 하소서. 그러면 신은 길에서 죽더라도 늙은 어미는 강회(江淮:양자강과 회수)에 포로가 되어 끌려가는 치욕을 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완악한 기운이 풀어지지 않아 하늘의 해가 항상 음산하므로 신은 국가를 위한 걱정으로 피눈물을 흘리는 통분을 견딜 수가 없어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상소를 받들어 올립니다.

 

이 상소문을 올린 사람은 중봉(重峯) 조헌(趙憲:1544~1592)이다. 조헌은 1544년(중종 39)에 태어나 1567년(명종 22)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에 나아갔으며, 1571년 홍주목 교수로 임명되었을 때 이지함과 교유하고 그의 권유에 따라 성혼과 이이를 스승으로 섬겨 가르침을 받았다. 1574년에는 질정관(質正官:글이나 제도 등에 관한 의문점을 중국에 질문하여 알아오는 일을 맡은 임시 벼슬)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89년 동인의 전횡과 시폐를 지적하다가 탄핵을 받아 길주에 유배를 당하였으나, 그 해 정여립의 모반사건으로 동인이 실각하자 귀양에서 풀려났다. 1591년 조선에 온 겐소[玄蘇] 등의 일본사신이 명나라를 칠 길을 빌리자고 청하여 조선침략의 속셈을 드러내자, 고향인 옥천에서 상경하여 대궐 앞에서 일본 사신의 처단을 상소하고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여 국방력의 강화를 주장하는 위의 상소를 올렸다.

당시 일본의 상황은 약 120년에 걸친 전국시대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 의해 통일을 이루어 정국이 안정되고 국력이 크게 신장된 시기였다. 그는 일본 국내가 통일되자 그동안 어떤 통치자도 시도하지 못했던 중국 대륙을 정복하여 자신의 위세를 떨치고자 시도하였다. 또한 토지를 몰수당한 다이묘나 지방 호족세력의 불만이 높아 해외로 관심을 돌리게 할 목적이 있었고, 상업의 발달로 성공한 이들은 해외무역의 필요성 때문에 전쟁에 찬동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 정부에서도 일본의 기미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일본의 정세를 파악하기 위한 통신사로 황윤길과 김성일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그런데 통신사 일행이 귀국하여 황윤길은 반드시 왜군의 침입이 있을 것이라고 보고하였고, 김성일은 그와 반대되는 의견을 보고하였다. 나중에 김성일은 이러한 발언에 대해 일본이 틀림없이 침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장담한 황윤길의 발언으로 인하여 민심이 혼란해지는 것을 완화하려는 의도였다고 해명하였다. 어쨌든 당시 조선의 정부는 동인들이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동인인 김성일의 보고를 신뢰하였다. 일본의 침략할 것이라는 정보는 이미 민간에까지 유포되고 있었으나, 정부 차원의 대책이 나오지 않자 조헌이 이와 같은 상소를 올린 것이다.

조헌이 올린 이 상소는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실록에는 조헌의 상소 뒤에 사관의 평을 싣고 있는데,

“조헌이 대궐 아래 엎드려 상소에 대한 비답이 있기를 기다렸으나 내려오지 않자 머리를 돌에 찧어 피가 얼굴에 가득하여 보는 사람들도 안색이 위축되었다. 그래도 비답이 내려오지 않자 이 상소를 밀봉하여 올렸으나 승정원에서 받지 않았다. 사간원에서 아뢰기를 ‘조헌의 상소를 진달했는데도 승정원에서 받지 않고 있는데 상소의 내용이 어떠한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하면 언로가 막히는 단서가 있게 되니 담당승지를 파직시키소서.’라고 하니, 임금이 추고(推考:상소문의 내용을 따지고 살핌)만 하도록 윤허하였으므로 조헌은 통곡하고 물러갔다.”

고 기록하였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헌은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1,700여 명을 규합하고, 영규대사 등의 승병(僧兵)과 합세하여 청주성을 탈환하였다. 이어서 전라도로 향하는 왜군을 막으려다 금산전투에서 700여 명의 의병과 함께 전사하였다. 율곡 이이의 문인 중 가장 뛰어난 제자로 이이의 학문을 계승하였던 조헌의 이 상소문은 조선 선비들의 기상을 유감없이 드러냄으로써 후대 선비들에게 귀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