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은 폭군이었을까


광해군은 폭군이었을까

 

전에 ‘불멸의 이순신’이라는 TV 드라마가 인기리에 방영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 등장하는 조선의 국왕 선조(宣祖)의 모습은 한마디로 용렬하기 그지없다. 선조는 이순신이 왜군과의 전투에서 연전연승을 거두고, 전라도를 중심으로 선정을 베풀어 민심을 크게 얻자 권좌를 위협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끝없이 이순신을 경계하는 용렬한 군주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반면에 우리가 흔히 연산군과 함께 폭군으로 알고 있는 왕세자 광해군은 드라마에서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광해군은 이순신을 의심하여 죽이려고까지 하는 아버지 선조에 맞서 끝까지 이순신을 감싸 보호하고, 왜란을 극복하기 위하여 온 힘을 다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실제로 세자가 된 광해군은 의주까지 피난간 선조를 대신하여 국가 비상 대권을 맡아 관군을 동원하여 왜군을 무찌르는가 하면, 의병을 독려하고 민심을 수습하는 등 큰 활약을 하였다. 이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광해군에게 갖고 있는 이미지와는 매우 다른 모습이다. 그러면 광해군은 과연 무엇 때문에 왕위에서 쫓겨나고 폭군이라는 오명을 쓰게 되었을까?

조선시대에 정변으로 왕위에서 쫓겨나 시호(諡號 : 임금이나 정승 등이 죽은 뒤에 그 공덕을 칭송하여 주던 이름)가 없는 왕은 광해군 말고도 연산군과, 그에 앞서 숙부인 세조에게 내쫓긴 노산군이 있다. 그러나 노산군은 약 250년이 지난 숙종 때(1698년)에 그 억울함이 풀려 ‘단종(端宗)’으로 복위됨으로써 왕으로서의 자리를 되찾았다. 숙종 이전에는 노산군도 칭호에서 무언가 심히 잘못을 저지른 왕 또는 무도한 왕이라는 인식을 벗어나기 힘들었다. 또한 광해군을 폭정 사실이 두드러지는 연산군과 함께 폭군으로 다루는 것은 아무래도 어색한 면이 있다. 그렇다면 연산군과는 성격을 달리하는 광해군이 복위되지 않은 까닭은 무엇인가?

광해군(光海君 : 1575∼1641)은 선조의 둘째 아들로 이름은 혼(琿)이며, 어머니는 공빈김씨이다. 당시 왕비인 의인왕후 박씨에게서 소생이 없자, 후궁인 공빈김씨 소생의 제1왕자 임해군(臨海君)을 세자로 삼으려 하였다. 그러나 임해군이 광패(狂悖 : 말이나 행동이 예절에 어긋나고 난폭함)하다고 하여 보류하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피난지 평양에서 서둘러 둘째 왕자인 광해군을 세자에 책봉하였다. 이것은 백성들도 바라는 바였다.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이었던 유성룡의 『서애문집』에 따르면,

“선조가 피난을 가자, (서울)사람들이 여러 왕자의 궁은 모두 불태웠어도, 광해군의 궁만은 태우지 않은 점으로 인심의 돌아가는 바를 짐작할 수 있었다.”

라고 하였다.

하지만, 그가 왕이 되는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세자로 책봉되기는 하였으나 적통이 아니었고, 친형 임해군도 있었다. 이 때문에 명나라에서는 광해군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가운데 선조 말에 새로 맞아들인 왕비 인목왕후 김씨에게서 영창대군(永昌大君)이 탄생하자, 광해군이 서자이며 둘째아들이라는 이유로 영창대군을 후사로 삼을 것을 주장하는 소북(小北)과 그를 지지하는 대북(大北) 사이에 붕쟁이 확대되었다. 하지만 1608년 선조가 죽자 왕위에 오르고 이듬해 왕으로 책봉되었다.

그렇다면 왕이 된 광해군은 그 후 왜 쫓겨나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광해군이 쫓겨난 다음 날인 인조 원년(1623) 3월에 인목대비가 내린 왕을 폐하는 교서에 잘 나타나 있다. 그 내용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는 친형인 임해군과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이고, 계모인 인목대비를 유폐하여 인륜을 어겼다는 것이다. 둘째는 전통적으로 우호 관계에 있고, 특히 임진왜란 때 우리를 도와 준 명(明)의 은혜를 배반하였다는 점이다. 이 두 가지 죄목은 광해군을 쫓아낸 인조와 서인들의 주장이었다. 그 뒤 이러한 주장은 오랫동안 정당한 일로 여겨졌다.

광해군은 조선 15대 왕으로 인조반정으로 쫓겨난 왕이다. 따라서 즉위하기 전에 왕자의 칭호였던 ‘광해군’이 그대로 불려지고, 그가 다스린 시대를 기록한 실록도 『광해군일기』라고 이름 붙여졌다. 광해군에게 시호가 주어지지 않은 것은, 그만큼 국가와 민생에 큰 해를 끼친 폭군이었다는 판정인 셈이다. 이처럼 왕에게 어떤 칭호가 붙느냐 하는 것은 그에 대한 후세의 평가에 따라 달라진다. 다만 이러한 판단을 내린 사람들이 일반 백성이 아니라, 정치 권력을 가진 양반들이었다는 점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광해군이 왕위에서 쫓겨난 후 조선이 망할 때까지 그를 다시 평가하는 작업은 없었다. 왜나 하면 인조반정 뒤부터 조선이 망할 때까지 광해군을 쫓아내고 정권을 잡은 서인(西人) 쪽에서 거의 정국의 주도권을 잡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서인 쪽에서는 인조반정으로 얻어 낸 집권 명분을 자칫 흐릴 우려가 있는 광해군의 죄목을 새롭게 검토해 볼 까닭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 인조반정의 명분으로 제시된 광해군의 두 가지 잘못 – 패륜 행위와 명에 대한 배신 행위 -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패륜 행위로 지적된 바와 같이, 광해군이 친형과 이복 동생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궁궐에 가둔 행동은 분명히 도덕적으로 잘못이다. 그런데 앞서 본 것처럼 광해군은 영창대군이 태어난 뒤, 적자가 아니라는 약점 때문에 세자에서 쫓겨날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영의정 유영경은 선조에게 광해군의 책봉을 취소하라고 건의하기도 하였고, 위독한 선조가 광해군에게 선위(禪位 : 왕이 살아 있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일)하는 교서를 내린 것을 감추었다가 발각되어 나중에 사사(賜死)되었다. 따라서 광해군의 입장에서는 세자의 지위에서 쫓겨나게 되면 죽음을 당할 지도 모르는 목숨이 걸린 문제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동생을 죽인 일을 잘 했다고는 할 수 없다. 다만 역대 왕들 가운데 태종이 아우인 방석, 방번 등을, 세조가 조카인 단종을, 심지어 영조는 그 아들 사도세자를 죽이고도 패륜적인 ‘군’으로 강등되지 않았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들의 반인륜, 패륜적 행위는 죽은 뒤에도 정치 세력이 보호해 주었던 것이다. 바로 이 점이 광해군과 달랐을 뿐이다.

다음은 명을 배신하였다는 점을 살펴보자. 당시 국제 정세는 새로이 떠오르는 후금(後金)이 명을 제압하는 형세였다. 그런데 명이 후금과 전쟁을 벌이려고 조선에 병사를 요청해 왔다. 전통적인 관계로 보나 임진왜란 때 원병을 보내준 의리로 보나 명의 요청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곧 대륙의 새로운 지배자가 될 후금(후에 청나라)을 무시하고, 무작정 지원군을 보내기란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이런 어려운 국제 정세 속에서 광해군은 강홍립(姜弘立) 장군에게 명나라 군대를 원조하면서 형세를 보아 적당히 후금에게 항복하되, 어쩔 수 없이 군사를 보냈음을 해명하라고 특명을 내렸다.

그 결과, 명과 후금 두 나라에 불만을 사지 않고 아무런 마찰 없이 외교 관계를 유지하였으니, 참으로 적절한 실리 외교였다. 그런데도 광해군을 쫓아낸 서인들은 광해군이 중립 외교를 내세운 것을 큰 죄목으로 들고 나왔다. 그리하여 새로 왕위에 오른 인조와 서인 정권은 중립 노선을 폐기하고 쓰러져 가는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고집하다가, 결국 청에게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당하여 국가와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고 말았다.

광해군은 미묘한 국제 관계 속에서 자주적이고 중립적인 실리 외교를 펴 대외적으로 안정을 이루었다. 특히 그의 뛰어난 외교 정책은 그를 쫓아낸 서인들의 잘못된 외교로 침략을 당했던 점을 떠올릴 때, 더욱 빛나지 않을 수 없다. 인조를 비롯한 서인 세력들이 정권 탈취를 합리화하려고 광해군을 ‘왕’이 아닌 ‘군’으로 깎아 내렸으며, 뒷날 인조반정을 정당화하기 위한 책략과 명분에 의하여 패륜적인 혼군(昏君)으로 규정하였지만, 실은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희생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같은 반정에 의하여 희생된 연산군과는 성격을 달리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