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년간의 논쟁, 병호시비


260년간의 논쟁, 병호시비

 

호시비란 병산서원(屛山書院)과 호계서원(虎溪書院) 사이의 시비란 뜻이다. 병산서원은 안동에서 서남쪽으로 60여 리 되는 곳, 하회마을에서 낙동강을 따라 10리쯤 거슬러 올라간 곳에 위치한 서애 유성룡(西厓 柳成龍)을 모신 서원이다. 그리고 호계서원은 안동에서 북쪽으로 25리쯤 거슬러 올라간 월곡면 도곡동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 서원에서는 퇴계 이황을 주향(主享)으로, 서애 유성룡과 학봉 김성일(鶴峯 金誠一)을 종향(從享)으로 모시고 있다. 호계서원은 건립 당시에는 여강서원(廬江書院)이라고 했으나, 건립 후 약 100여 년이 지난 1676년(숙종 2)에 ‘호계서원’으로 사액(賜額 : 임금이 서원의 이름을 지어서 새긴 편액을 내리던 일)되어 호계서원으로 개칭하였다.

그러면 병호시비는 어떻게 해서 일어나게 되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시비의 발단은 1620년(광해군 12) 서애와 학봉을 호계서원에 종사(從祀 : 문묘나 서원 등에 학덕이 있는 사람의 신주를 모심)하게 되면서 두 유현 중 어느 쪽을 상위로 모시느냐 하는 문제로 일어났다. 학봉의 후손들은 학봉이 서애보다 네 살 위이니 장유유서로 보아서 학봉을 상위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서애의 후손들은 관위(官位)에서 서애는 영의정까지 지낸 것에 비해 학봉은 경상도관찰사에 불과하였으므로 서애를 상위로 모셔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양측은 당시 영남학파의 최장로(最長老)로 존경을 받고 있던 정경세(鄭經世)에게 석차(席次)의 재정(裁定 :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결정함)을 청하였는데, 정경세는 이 재정에서 “두 선생의 연치(年齒 : 나이)의 차이는 견수(肩隨: 연장자와 함께 갈 때는 조금 뒤에 떨어져서 따라간다는 뜻)에 미치지 않고, 작위(爵位)의 차는 절석(絶席 : 자리를 같이 하지 못함)에 있다”라고 하여 서애를 좌(상위)로 학봉을 우(하위)로 모시라고 판결하였다. 학봉의 후손들은 이 재정에 매우 불만스러웠으나 원로의 재정에 거역할 명분이 없으므로 일단 이에 승복하여 첫 번째 시비는 끝이 났다.

두 번째 시비가 벌어진 것은 그로부터 약 200년 후의 일이었다. 1805년(순조 5) 영남 유림에서 서애 유성룡, 학봉 김성일, 한강 정구, 여헌 장현광의 4명을 문묘에 종사하기 위한 청원을 하게 되었다. 문묘종사의 청원을 위해 4명의 후손들이 회동하여 소장(訴狀)의 기초를 하는 단계에서 또 다시 서열의 문제가 일어났다. 학봉파는 종사할 때의 순서는 연령순으로 할 것을 주장하였고, 서애파는 여강서원에 모실 때 이미 위패의 서열은 정해져 있으므로 문묘에 종사할 때도 선례에 따를 것을 주장하였다.

이 때 한강과 여헌의 후손들은 학봉파의 주장에 찬동하여 연령순으로 모시기로 결정하고 소장을 작성하여 제출하였다. 이에 대해 서애파는 이를 인정할 수 없다 하여 독자적으로 상소하여 서열이 전도되었음을 논하고 그 부당성을 호소하였다. 양쪽의 소장을 접수한 조정에서는 4명의 문묘종사를 모두 기각해 버렸다.

이렇게 되자 한강과 여헌의 후손들은 자신들만으로 문묘종사를 계획하고 대구의 이강서원(伊江書院)에서 회동하여 독자적으로 상소할 것을 결정, 이를 도내의 유림에 통고하였다. 이 통문을 접수한 안동의 각 서원은 호계서원에서 회동하여 그 부당함을 규탄함과 동시에 대책을 강구하게 되었는데, 한강과 여헌의 후손들을 규탄하는 통문을 작성하는 단계에서 일시 중단하기로 되어 있었던 시비가 다시 분출되고 말았다.

당시 통문을 작성한 사람은 학봉파의 유생인 유회문이었는데, 그는 통문의 서술을 학봉‧서애‧한강‧여헌의 순으로 작성하였다. 이에 격분한 서애파의 유생 유형춘이 통문을 찢어버리게 되자, 학봉파에서는 유형춘에게 문벌(文罰 : 죄상을 나열하여 서원의 벽에 붙여두는 벌)을 가하였다. 이에 서애파는 호계서원에 대해 절연을 선언하고, 이후 서애를 모시는 병산서원에서만 모이게 되었고 서애→학봉의 서열을 지지하는 사림들도 모두 이에 따라 절연을 선언하였다. 이에 대해 학봉파 및 학봉→서애의 서열을 지지하는 사림들은 호계서원에 모이게 되어 병론(屛論), 호론(虎論) 또는 병유(屛儒), 호유(虎儒)라는 말이 생기게 되었다.

병유와 호유로 나누어진 양측은 이후 사사건건 대립하게 되었는데, 그 중 큰 시비로는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1710∼1781)의 호계서원합사(虎溪書院合祀) 문제였다. 이상정은 목은 이색의 후손으로 당시 영남지방에서는 퇴계학파의 적통을 계승한 사람으로 특히 학봉파로부터 존숭을 받아왔는데, 그를 호계서원에 합사시키자는 논의가 일어난 것이다. 즉 1812년에 호유측의 주도로 예안향교에서 도회가 열려 이상정의 합사가 의결되어 국왕의 추인을 얻기 위해 상소를 하자는 데까지 이르렀으나, 병유측의 반대로 결국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4년 후인 1816년에 호유측은 또 다시 이를 주장했으나 역시 병유측의 강력한 반발로 끝내 성사되지 못하였다. 병유측이 대산의 합사를 반대한 표면적인 이유는 묘내(廟內)가 좁아서 이 이상 신위를 모실 여지가 없다는 것이었으나, 실상은 대산의 합사를 계기로 호유측이 서애와 학봉의 위패를 나이순으로 바꿔버릴지도 모른다는 의구심 때문이었다.

그런데 1816년 두 번째 대산추향(大山追享)의 논의가 있던 때에 병유측에 한 통의 투서가 날아들었는데 그에 의하면 호계서원 묘우 안의 위패 위치가 어느 사이에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에 놀란 병유측이 즉시 호계서원으로 달려가 묘내를 조사하였는데, 중당(中堂)에 있어야 할 위패가 북벽(北壁) 밑으로 옮겨져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격노한 병유들은 즉각 병산서원에서 회동하여 옮겨진 위패를 원위치로 돌려놓지 않으면 안 된다고 결의하고, 이를 위한 도회를 연다고 도내의 유림에 통지하였다. 이에 대해 호유측에서는 ‘묘내의 위패는 원래 북벽에 안치되어 있던 것으로, 수백년간 한 번도 움직인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유측이 움직였다고 우겨대는 것은, 대산의 추향을 방해하기 위한 트집이다’라고 주장하면서 병유가 소집한 날보다 하루 먼저 도회를 열기로 결정하고 이를 도내에 통지하였다.

도회가 열리던 날은 양측에서 동원 경쟁이 벌어졌으므로 천 명 가까운 선비들이 모여들었고, 양측의 대표가 묘내에 들어가 실지 검증을 하였지만, 한쪽은 옮겼다고 하고, 한쪽은 옮기지 않았다고 하는 논쟁으로 시종일관하였다.

그러자 병유측은 경상도 관찰사에게 고소하여 호유가 부당하게도 묘위(廟位)를 멋대로 이동한 것을 논하고, 서원을 관리하고 있는 하인을 잡아 족쳐서 범인을 찾아내어 엄벌에 처할 것, 그리고 위패를 원위치에 돌릴 것을 청하였다. 그러자 관찰사 김경로(金敬魯)는 ‘묘위를 멋대로 옮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 즉각 원위치에 돌릴 것’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간단히 판결을 내렸다. 병유측은 이 판결문을 가지고 가서 즉시 위판(位版)을 원위치에 돌리려고 하였다.

그러자 놀란 호유측은 다수의 인원을 동원하여 서원의 주위를 지키는 한편, 병유들의 주장이 얼마나 근거 없는 것인가를 논한 소장을 관찰사에게 제출하고, 관찰사가 직접 묘내를 검증하여 이동의 진위를 판정할 것을 주장하였다. 관찰사 김경로는 호유측의 소장을 보고서야 비로소 사안의 중대함을 깨닫고, 심사숙고한 끝에 병유측에 내린 재정을 급거 취소하고 ‘사림간의 분쟁에 관(官)은 개입하는 법이 아니다’라고 판결을 번복하였다.

이로부터 도내의 유림은 두 편으로 갈려서 치열한 싸움이 전개되었다. 이 지방에 전하는 유명한 우스갯소리가 있다. 어느 한 곳에 유생들이 모였는데, 한 사람이 상대방에게 물었다.

“귀공은 호유이오니까, 병유이오니까”

상대방이 대답해 가로되,

“소생은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소. 중립이요”

그러자 처음 물었던 유생은, “흥, 상놈이었구먼”하고 비웃으며 총총히 떠나버렸다는 것이다.

병호시비는 대원군 시대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1870년(고종 7)에 대원군은 안동부사 박재관에게 서한을 보내어, “영남유림에서는 안동이 그 중심인데도 불구하고 같은 남인끼리 병론이니, 호론이니 하고 싸우는 것은 좋지 않다.—-하루속히 화합하여 성은에 보답토록 하라”고 하였고, 병‧호 양쪽에도 같은 내용의 친서를 보내어 화합을 종용하였다. 안동부사 박재관은 대원군의 서한을 받자 즉각 쌍방의 유생을 호계서원으로 소집해서 화해를 도모하였다.

그들 역시 이 시비를 종결지어야 한다고는 했으나, 종전의 조건만은 어떤 일이 있어도 양보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 조건이란, ‘병유측은 위패를 원위치로 돌릴 것, 호유측은 현상을 유지할 것’이었다. 대원군의 대리인으로 중재에 나섰던 부사 박재관은 한결같이 같은 말만 되풀이하는 이 작태에 망연자실, 그저 팔짱을 끼고 있을 뿐이었다는 것이다.

격노한 대원군은 재차 박재관에게 서한을 보내어 쌍방의 유생 중에서 주동적인 인물을 잡아들여 엄벌에 처하고, 또 문제가 된 『대산실기(大山實記)』를 위시하여 관련 서류를 압수해서 올려보내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다음 해 3월, 대원군은 드디어 화근의 원인이 된 호계서원 그 자체를 철거하도록 명하고, 8월에는 강제로 이를 철거해 버렸다. 이로써 약 260여 년을 끌어왔던 병호시비는 대원군의 서원철폐와 함께 막을 내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