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은 올바른 정치를 해야 임금이다


임금은 올바른 정치를 해야 임금이다

 

산군의 어지럽고 잘못된 정치로 인한 임금과 신하 간의 권력 관계의 파경은 직접적으로 무오․갑자사화를 겪으면서 신하들에게 성리학적 명분․의리에 따라 그 관계를 재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국가 최우선의 중심 존재인 왕과 왕실이 명분과 예를 잃었을 때 임금을 교체해야만 하는 정치 상황이 신하들에 의해 제기된 것이다.

이 시기에 등장하는 성학군주론(聖學君主論 : 군주로 하여금 성인(聖人)이 되기 위한 학문, 즉 성학을 익혀 성인군주가 될 것을 요구하는 논리)은 이러한 계기를 통해 제기되었다. 수기치인(修己治人 : 자신을 수양한 후에 남을 교화해야 함을 이르는 말)으로 집약되는 주자성리학의 학문론, 정치 이념은 우선 사대부의 도리와 직분을 규정하는 논리면서, 사대부의 주체적인 정치 지향을 정당화한다. 그렇기 때문에 ‘수기치인’의 학문은 바로 성학이었고 이를 익혀야만 양반 사대부층의 반열에 설 수 있었다.

사림이 서서히 정치 주도 세력으로 떠오르면서, 임금이 자기 마음대로 왕권 행사를 해 유교 정치를 구렁텅이에 넣었던 경험을 통해 사림은 ‘수기치인의 학문’을 군주학으로 넓혔다. 중종대의 조광조가 제시한 도학정치도 이러한 의미를 내포하였다.

성학군주론은 이언적(李彦迪 : 1492∼1553)이 본격적으로 거론하였다. 이언적은 중종과 명종에게 올린 상소에서 정치의 성패는 오직 임금의 ‘한 마음[一心]’과 ‘마음의 기능[心術]’ 여하에 달린 문제로 보고 임금의 수신제가하는 방법으로 성학을 당면한 실천 과제로 제안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16세기 중엽 이후 이황(李滉 : 1501∼1570)과 이이(李珥 : 1536∼1584)에 이르러 두 경향의 성학군주론이 일어났다. 이황은 주자학 자체를 성학으로 보고 「성학십도(聖學十圖)」를 당시 군주 선조에게 제시하였다.

 

“다만 옛 현인과 군자들이 성학을 밝히고 심법(心法)을 얻어서 도(圖)를 만들고 설(說)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도에 들어가는 문(文)과 덕(德)을 쌓는 기초를 가르친 것이, 오늘날 해와 별같이 밝았습니다. 이에 감히 이것을 가지고 나아가 전하에게 진술하여, 옛 제왕들의 공송(工誦 : 악공이 시편을 외어서 임금에게 들려주는 것을 말한다.)과 기명(器銘 : 임금의 일용 기물에 명문을 새겨 임금을 깨우치고 경계하도록 하는 것)의 끼친 뜻을 대신하고자 하옵니다………이에 삼가 종전에 있었던 것에서 더욱 뚜렷한 것만 골라 그림 7점을 얻고 그 중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는 정임은(程林隱 : 원대의 성리학자, 이름은 복심(復心)의 그림에다가 신이 만든 작은 그림 2점을 덧붙인 것입니다. 이밖에 그림 3점이 있는데, 비록 신이 만들었으나 그 글과 뜻이 조목과 규획에서 한결같이 옛 현인이 만든 것을 풀이한 것이요, 신의 창작이 아닙니다. 이를 합하여 「성학십도」를 만들어서, 각 그림 아래에 외람되게 신의 의견을 덧붙여서 조심스럽게 꾸며 올립니다.”

『퇴계선생문집』권7, 「진성학십도차도」

 

이황은 임금의 주관적 성취 과정에 따라 성학을 체득할 수 있다고 기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이와 같이 군주를 적극적으로 교도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군주의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의 실천을 소극적으로 권유하는 입장이었다.

반면 이이는 『성학집요(聖學輯要)』를 통해 『대학』체계를 원용하여, 실제로 각각의 사안에 맞닥뜨렸을 때 수행해야 할 규범과 절차를 세세하게 명시하여 군주의 의지와 행동에 대한 객관적 기준을 제시하였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먼저 큰 뜻을 세우셔서 반드시 성현을 표준으로 삼으시고, 삼대(三代)를 본받으십시오. 전심하여 글을 읽으시고 사물에 나아가 이치를 궁구하시어 말이 내 마음에 거슬리면 반드시 도리에 맞는가를 생각하시고, 말이 내 뜻에 순하면 반드시 도리가 아닌가를 생각하시어 곧은 말을 즐겨 들으십시오. 간하는 것을 싫어하지 마시어 착한 것을 받아들이는 도량을 넓히시고, 의리의 귀결을 깊이 살피시며, 몸을 굽히는 것을 부끄러워 마시고, 남에게 이기려는 사사로움을 비리시면, 일용하는 사이에 실천하는 것이 성실해져 한 가지도 실수가 없을 것이며, 한가한 가운데 마음가짐이 돈독하여 한 가지 생각도 잘못이 없을 것입니다. 더욱이 중도에서 게으르지 않으시고 작은 성공에 만족하시지 않으며, 병통의 뿌리를 모두 버리시고 아름다운 자질을 온전히 하시어 제왕의 학문을 이룩하시면 얼마나 다행이겠습니까.”

『율곡전서』권9, 「성학집요」진차(進箚)

 

그러면서 이이는 어진 신하가 나서서 군주가 규범을 준수하도록 적극적으로 교도하여 군주의 기질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일종의 군주개조론에 해당하는 논리를 제시하였다. 한마디로 상징적․이념적 측면에서는 왕권의 절대성을 받아들이면서, 왕권 행사의 현실적 측면에서는 정당성 여부에 끊임없이 제약을 가할 수 있는 논리를 확보하였다.

조선 중기에 반정(反正)이라는 신료 주도의 왕위 교체가 이루어지면서 왕권 위상이 변화하였으나 임금이 왕정의 핵심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연산군의 폭정과 광해군이 어머니를 폐하고 동생을 죽이는 과정을 겪으면서 군주는 성학 군주여야 한다는 논리가 제기되었다. 이는 이념적으로는 군주의 위상이 절대화되지만 실질적으로는 왕권이 제도화되는 단계로 나아가면서 군신공치(君臣共治 : 임금과 신하가 함께 통치하는 것)가 이루어지고, 따라서 임금과 신하 간의 권력 관계도 상대화되는 것을 의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