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과 우계의 도의지교(道義之交)


율곡과 우계의 도의지교(道義之交)

 

곡이 평생을 함께한 가장 절친한 벗은 우계 성혼(成渾)이었다. 율곡이 1536년생이고 성혼이 1535년이라 한 살 터울이었지만, 이들은 나이에 상관없이 친구로 사귀었다. 율곡과 성혼이 이른바 도의지교를 맺은 것은 1554년 율곡의 나이 19세, 성혼의 나이 20세 때로 율곡이 금강산에 들어가기 직전이다. 두 사람의 도의지교가 지닌 남다른 역사적 의미 때문인지, 이들의 개인 문집 연보에는 당시의 상황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갑인 33년(1554) 선생 19세. 우계 성혼 선생과 더불어 친구로 사귀었다. 성혼 선생은 나이가 한 살 더 많았지만 처음에는 율곡 선생을 스승으로 섬기려고 했다. 그러나 율곡 선생이 굳이 사양하고 마침내 도의지교를 맺고 서로 옛 성현의 사업을 기대했다. 그때부터 죽을 때까지 교분이 변하지 않았다.

율곡전서』<연보>

 

갑인 33년(1554) 명종 9년. 율곡 선생과 도의지교를 맺었다. 성혼 선생은 학문에 뜻을 둔 이후 마음을 진실하게 닦고 배움에 힘써서 규모가 엄격하고 정밀했다. 일찍이 율곡선생이 칭찬하기를 “만약 학문에 도달한 수준을 말한다면 내가 다소 낫지만, 마음의 지조 그리고 행실의 독실함과 확고함은 내가 우계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했다.

우계집』<연보>

 

두 사람이 만난 때는 율곡이 삶의 방향을 잃고 어느 한 곳 의지할 데를 찾지 못한 채 정처 없이 헤매던 시기였다. 그 무렵 만나 도의지교를 맺고 마음을 나눌 정도였으니 성혼의 학문과 인품에 대한 율곡의 생각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성혼은 서울의 순화방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정암 조광조의 제자였던 그의 아버지 성수침(成守琛)은 기묘사화 이후 두문불출하다가 훈구파와 척신들이 장악한 세상에 대한 모든 미련을 버리고 경기도 파주에 은둔해 살았다. 성혼이 10세 무렵 파주의 우계에 집터를 정해 거주한 성수침은 따로 스승을 두지 않고 직접 성혼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성혼은 15세 때 이미 경서와 사기에 통달했고, 행실 또한 의로워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율곡은 일찍부터 성혼의 아버지인 성수침을 마음속 깊이 존경했고, 율곡의 선영이 파주에 있었기 때문에 성혼에 대한 소문도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실제 성혼을 만난 율곡은 그의 학문과 삶에 대한 태도에 감동했고 평생토록 도리와 의로움으로 맺어진 우정을 쌓아 나갔다.

성혼은 약관의 나이에 병을 얻어 평생토록 병마와 싸우는 고통스러운 세월을 보내야 했다. 조선의 이름난 유학자들 중 퇴계 이황과 우계 성혼 두 사람보다 더 많은 병을 앓은 분이 없다는 말까지 생겨날 정도였다. 그러나 성혼은 단 한시도 병을 핑계 삼아 정신을 놓거나 몸가짐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우계선생은 약관 시절에 병에 걸렸고, 뒤이어서 친상(親喪 : 부모의 초상)을 연달아 당했는데 너무 슬퍼한 나머지 몸이 심하게 상하여 마침내 고질병이 되었다. 그러나 하루에 한 끼만 먹고 겨울옷으로 여름까지 지내면서도 끝내 병을 핑계로 삼아 자신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평소에도 삼가고 엄숙하게 지내어 마치 손님을 모시거나 제사를 받들 때처럼 공손하고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낮에는 눕지 않았고, 마음이 나태해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그때마다 용모를 정돈하고 수습하여 정신을 바로잡았다. 때로 기운이 쇠진해 지탱할 수 없으면 병풍에 기대고 앉아서 눈을 감고 숨을 고를 뿐이었다. 그러다가 잠시 후 기운이 다시 소생하면 곧 일어나 앉아 책을 보았다.”

우계집』<연보보유 덕행(年譜補遺 德行)>

 

율곡은 이러한 성혼의 근독하는 삶을 자신의 단점을 깨닫고 고치는 본보기로 삼고 늘 공경했다. 율곡은 그의 저서 『격몽요결』<지신(持身)>장에서 “자기 몸을 이기는 공부는 날마다 행동하는 일을 삼가는 것보다 더 중한 것이 없다.”며 이런 자세가 공부하는 자들에게 꼭 필요한 것임을 강조하였다.

율곡과 우계의 도의지교와 근독하는 삶의 자세는 후대까지도 널리 전해져 많은 사람들의 모법이 되었다. 특히 임진왜란 때 금산 전투에서 7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왜적과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한 의병장 조헌은 일찍이 선조에게 근독의 근본정신, 곧 마음을 깨끗이 하고 욕심을 적게 하며 행동과 실천을 깊고 두텁게 하는 것으로 세상의 본보기가 될 만한 사람은 이지함과 더불어 성혼과 이이가 있을 뿐이라고 밝히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