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과 선조


율곡과 선조

 

늘날 선조는 당쟁의 폐단과 임진왜란의 참화를 부른 암군(暗君 : 사리에 어둡고 어리석은 임금)이라는 혹독한 비평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사실 그는 처음부터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임금은 아니었다. 선조는 1552년(명종 7) 덕흥대원군과 하동부 대부인 정씨 슬하의 3남으로 태어났다. 초명은 균이었으나 개명하여 공으로 바뀌었고, 명종의 사랑을 받아 어린 나이에 하성군에 봉해졌다가 명종이 후사 없이 죽자 1567년 6월 16세의 나이로 조선 제 14대 국왕으로 등극하였다. 선조는 16세의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명종 비 인순왕후 심씨가 수렴청정을 하였으나 선조의 정사처리와 업무에 재능이 있다고 판단됨에 따라 1년 후 즉 17세의 나이에 편전을 넘겨주었다.

즉위 초 선조는 오로지 학문에 정진하고 매일 경연에 나가 정치와 경사를 토론하고 제자백가서 대부분을 섭렵할 정도로 뛰어난 군왕의 자질을 보였다. 또한 성리학적 왕도정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정계에서 훈구, 척신 세력을 모두 몰아내고 사림의 명사들을 대거 등용하였다.

이로써 민심은 안정되고 정계는 사림의 어진 선비들로 넘쳐나서 잠시나마 문치(文治 : 학문과 법령을 근간으로 하여 다스리는 정치)의 깃발 아래 조정은 평화를 되찾았다. 이 때문에 후대의 일부 학자들은 선조를 두고서 호학군주(好學君主 : 학문을 좋아하는 임금)라거나, 선조의 시대를 일컬어 목릉성세(穆陵盛世 : 목릉은 선조의 능호)라고까지 높게 평가했다.

율곡도 처음 선조에게 무한한 가능성과 성군이 되리라는 희망을 품었고,

“이제 임금이 성군의 뜻을 세우고, 조정과 재야의 훌륭한 선비들이 스승으로 나서 성군의 방향을 잡아준다면 조선은 세종대왕 이후 다시 한 번 나라와 백성이 모두 평안한 태평성대를 이룰 수 있을 것”

이라고 생각했다. 선조 2년의 경연에서 율곡은 다음과 같이 ‘성군의 뜻’을 세워 ‘성군의 길’을 가도록 깨우쳤다.

 

“임금께서는 한 시대의 사조가 어떤 것인지를 살펴서 그것이 잘못되었다면 폐단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지금은 권세 있는 간신들이 나라와 백성을 억압한 뒤라 선비의 풍습이 시들고 게을러져서 오로지 녹봉이나 받아먹고 제 몸이나 살찌우는 것만 알 뿐입니다. 임금께 충성하고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습니다. 세상의 흐름이 이러하니 임금께서는 마땅히 ‘크게 일을 성취하겠다는 뜻’을 분발하여 사기를 진작시키십시오. 그래야만 세상의 도리가 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경연일기(經筵日記)』선조 2년(1569) 8월

 

그러나 율곡의 노력과 헌신에도 불구하고 선조는 성군의 뜻을 세우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시간이 지나자 신하들의 간언을 뿌리치는 방법까지 나름대로 터득했다. 그 방법이란 말을 아주 드물게 하거나 신하들의 주청에 아예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알겠다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것인지 종잡을 수 없도록, 언제나 대충 얼버무리며 넘어가려고만 했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율곡만큼 실용적인 개혁안을 많이 제시하고 임금에게 실천을 강하게 주장한 인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임금을 잘못 만난 탓인지 율곡의 불행은 마치 벽을 보고 이야기하듯 어떤 이야기도 귀담아듣지 않는 임금에게 평생을 두고 최선을 다해 간언해야 했다는 것이다. 선조는 계속되는 율곡의 간절한 간언을 받아들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율곡이 향촌으로 물러나 처사(處士)의 삶을 사는 것을 허락하지도 않았다. 율곡의 거듭된 사양과 사직에도 불구하고 선조는 끊임없이 벼슬을 내려 율곡을 자기 곁으로 불러들였다.

1582년 정월 이조판서에 임명된 율곡은 8월에는 형조판서에, 그리고 9월에는 다시 의정부 우참찬에 이어서 의정부 우찬성에 승진 임명되었다. 율곡은 세 번이나 그 자리를 사양했으나 선조가 끝내 허락하지 않자, 다시 한 번 이 기회를 빌어서 시대의 폐단을 개혁할 것을 주청한 <만언소(萬言疏)>를 올렸다. 이 상소문에서 율곡은 마치 작정이라도 한 듯 선조의 무사안일과 무성의를 강하게 질타했다.

 

“전하께서는 지금 전복(顚覆 : 뒤집혀 엎어짐)당할 운세요, 위태로워 망할 상태에 빠져 있음이 불을 보듯 뻔합니다. 세상은 낡은 관습으로 인해 더럽혀지고, 공적은 뜻을 행하지 않아서 무너지고, 다스림은 헛된 의론으로 인해 어지러워지고, 백성들은 오래 묵은 폐단으로 말미암아 곤욕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 네 가지가 전하께서 전복의 운세와 몹시 위태로워 망할 상태에 빠져 있다는 증거들입니다.”

율곡전서』<연보>

 

어느 때보다 지극하고 간곡한 심정을 담은 상소문을 접한 선조는 친히 율곡에게 술을 내리면서 “내가 분발하여 시행해보고 싶지만, 이 몸이 부족하고 어리석고 재주와 식견이 미치지 못해 오늘날에 이르렀소. 다시 더욱 경계하고 반성해 유념하겠소.”라고 답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 조정 일각에서 경장의 그릇됨을 지적하는 상소가 올라오자, 선조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개혁 논의를 덮어버렸다.

이처럼 선조는 훌륭한 스승을 얻어 옳은 길을 가는 방향은 잡았지만 한곳에 머무르며 더 나아가려 하지 않았다. 선조는 결국 죽을 때까지도 이러한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의 말뿐인 선비주의로 인해 정국은 이른바 동인과 서인 간의 당파싸움에 휘말리기 시작했다. 이처럼 불안한 정국은 결국 임진왜란이라는 크나큰 역사적 상처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