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과 퇴계의 역사적 만남


율곡과 퇴계의 역사적 만남

 

는 1558년(명종 13) 봄. 당시 23살이던 율곡은 처갓집이 있는 경상도 성주에서 강릉의 외조모 댁으로 가는 도중에 안동에 들려 퇴계 이황을 찾아가 이틀 밤을 묵었다. 율곡을 만나던 해에 퇴계의 나이는 58세로 당대에 가장 명망 높은 원로 석학이었고, 율곡은 일찍부터 천재로 이름을 떨치던 청년이었다. 율곡을 만난 퇴계는 율곡의 영민한 재주와 학식에 깊이 감탄하고 무척 반겼던 모양이다. 율곡은 <쇄언(瑣言)>이라는 글을 통해 당시의 만남을 이렇게 밝혔다.

 

“퇴계선생은 병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가 예안현(禮安縣)의 산골짜기 사이에 터를 닦아 집을 짓고 장차 그곳에서 여생을 마칠 생각이었다. 무오년(1556년) 봄, 내가 성산(星山:성주)으로부터 임영(臨瀛)으로 가는 도중에 예안에 들려 퇴계선생을 찾아뵈었다. 그때 다음과 같은 율시 한수를 올렸다.

 

溪分洙泗派(계분수사파)
시냇물은 수사(洙泗:공자)에서 나뉜 갈래이고

峯秀武夷山(봉수무이산)
봉우리는 무이산(武夷山:주자)처럼 빼어나네.

活計經千卷(활계경천권)
살림살이라고는 천여 권의 경전뿐이고

生涯屋數間(생애옥수간)
살아가는 방도는 두어 칸의 집뿐이네.

襟懷開霽月(금회개제월)
뵙고 싶은 회포 푸니 가슴은 구름 속의 달 보듯 환하고

談笑止狂瀾(담소지광란)
웃음 띤 말씀은 거친 물결을 멈추게 하네.

小子求聞道(소자구문도)
보잘 것 없는 저는 사람의 도리를 얻고자 하니

非偸半日閒(비투반일한)
반나절 한가로움을 훔친다고 나무라지 마소.

 

퇴계선생은 이렇게 화답하였다.

 

病我牢關不見春(병아뢰관불견춘)
병든 나는 여기 갇혀 봄도 미처 보지 못했는데

公來披豁醒心神(공래피활성심신)
그대가 찾아와 내 마음이 상쾌해졌네.

始知名下無處士(시지명하무처사)
이름난 선비에게는 헛된 명성 없음을 비로소 알겠고

堪愧年前闕敬身(감괴년전궐경신)
지난날 공경한 몸가짐 부족한 것이 못내 부끄럽구나.

嘉穀莫容稊熟美(가곡막용제숙미)
좋은 곡식은 잡풀의 무성함을 용납하지 않고

游塵不許鏡磨新(유진불허경마신)
떠다니는 먼지는 거울의 깨끗함을 허락하지 않네.

過情詩語須刪去(과정시어수산거)
기쁨에 겨워 과장한 시어는 지워버리고

努力功夫各日親(노력공부각일친)
노력하고 공부하여 나날이 배움의 뜻에 가까워지세.

 

나는 이틀 밤을 거기에서 묵고 작별 인사를 드렸다.”

율곡전서』권14, <쇄언(瑣言)>

 

율곡은 이 시에서 퇴계의 학문이 공자와 주자의 도통(道統)을 이어받았음을 말하고, 생활은 곤궁하지만 학문은 드높이 쌓였음을 칭송하면서 자신이 찾아온 것은 한가로이 놀러온 것이 아니라 ‘도’를 듣고자 하는 것임을 밝히고 있다.

이에 대해 퇴계도 율곡의 시에 화답하여, 율곡이 찾아와 담소하고 문답하면서 자신의 가슴도 상쾌해진다는 기쁨을 말하고 청년 율곡의 명성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님을 확인하였다. 이어서 형식적인 칭송하는 말은 버리고 공부에 매진하면서 각자 학문과 수양을 향상시켜 보자고 따뜻하게 격려하는 말을 하고 있다.

당시 퇴계는 풍기군수를 마지막으로 50세 때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와 있었다. 퇴계는 일찍부터 자신의 호에 사용한 ‘물러날 퇴(退)’의 의미처럼 평생토록 헛된 이름과 벼슬에 마음을 두지 않고 물러나 앉아 자신의 뜻을 기르고자 했다. 자신이 힘써야 할 평생의 과업은 벼슬의 길이 아닌 학문의 길을 좇아 사람다움의 진정한 도리를 찾고 실천하는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율곡이 볼 때 퇴계는 입신양명과 부귀영화를 멀리 한 채 평생 배움에 뜻을 두고 학문과 사람다움의 길을 좇아 스스로를 갈고 닦아온 존경할만한 선배였다.

처음 하룻밤을 묵을 예정으로 찾아왔으나 비 때문에 사흘을 묵게 된 율곡은 정신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선배를 만났고, 퇴계 역시 젊음과 열정을 바탕으로 훌륭한 선비로 성장할 만한 후배를 만나는 기쁨을 맛보았다.

퇴계가 율곡을 한번 보고 너무 사랑하자 곁에 있던 제자들이 약간 시샘이 났던가 보다. 율곡이 떠난 뒤에 어떤 제자가 율곡이 퇴계에게 올렸던 시를 가리키며 “ 그 사람이 이 시보다 못합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말을 듣자 퇴계는 그 자리에서 “아니다. 그 시가 그 사람만 못하다.”라고 하여, 율곡의 재주와 인물에 대해 깊은 사랑과 기대를 보였다.

훗날 퇴계는 이날의 만남과 헤어짐에 대해 자신이 가장 아끼던 제자 조목(趙穆)에게 보낸 편지글에서 다음과 같이 율곡에 대해 평하였다.

 

“일전에 한양 선비 이이(李珥)가 나를 찾아왔다네. 비가 오는 바람에 사흘을 머물다가 떠났는데, 그 사람됨이 밝고 쾌활하며, 본 것과 기억하는 것이 많아서 자못 우리 학문(성리학)에 뜻이 있었네. 그래서 옛 성현의 ‘후생가외(後生可畏)’라는 말씀이 진실로 나를 속이지 않았음을 알았네.”

이황, 『퇴계전서』<조사경에게 보내다[與趙士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