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을 따를 것인가 아버지를 따를 것인가’


‘스승을 따를 것인가 아버지를 따를 것인가’ – 회니시비

 

른바 회니시비(懷尼是非)는 숙종 때 사제 관계에 있었던 송시열(宋時烈: 1607∼1689)과 윤증(尹拯: 1629∼1714)의 불화 때문에 그들의 제자들 사이에서 벌어진 일련의 분쟁으로,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지게 한 사건이다. 회니시비란 용어는 송시열이 현재의 대전 시내 동쪽에 있는 회덕현(懷德縣)에 살았고, 윤증이 현재의 논산군 노성면에 해당하는 니성현(尼城縣)에 살았다는 데서 유래한다.

회니시비의 시원은 1653년(효종 4) 황산서원에서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와 송시열이 윤휴(尹鑴: 1617∼1680)의 학문적 태도를 두고 의견 대립을 보인 데서 찾을 수 있다. 윤휴는 여러 경서에 대한 독자적인 해석을 시도했다. 송시열은 이러한 윤휴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특히 1652년(효종 3)에 윤휴가 『중용』에 대해 새로운 장을 나누고 집주(集註: 여러 사람의 주석을 한데 모음)를 달자 그를 ‘사문난적(斯文亂賊: 유교 교리를 어지럽히고 그 사상에 어긋나는 말이나 행동을 하는 사람)’으로 몰아붙였다. 그러나 윤선거는 학문과 사상에서 비판의 자유를 주장해 윤휴를 두둔했으며, 1659년(현종 즉위)의 예송논쟁에서도 윤선거 부자는 송시열에게 동조하지 않고 윤휴를 될 수 있는 대로 옹호했다.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와 송시열은 김장생(金長生)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친구였다. 1629년에 윤선거의 아들로 태어난 윤증은 송시열보다 22년 아래였다. 윤증의 자는 자인(子仁)이고, 호는 명재(明齋)로 어려서부터 아버지 윤선거에게 주자학을 배웠다. 윤증은 9세에 병자호란이 발발해 그해에 강화도로 피신했는데, 이때 어머니가 자결하는 슬픔을 겪었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은 아픔을 딛고 그는 아버지 윤선거를 비롯해 유계(兪棨: 1607∼1664)와 송준길(宋浚吉: 1606∼1672), 그리고 송시열에게 수학하기 시작했다.

17세에 권시의 딸과 혼인한 그는 일찍이 과거의 뜻을 버리고 학문에 전념하였고, 36세가 되던 해에 뛰어난 학행으로 천거돼 내시교관(內侍敎官)에 발탁됐으나 사양하였다. 이때부터 말년까지 그에게는 여러 관직이 제수되고 81세인 1709년(숙종 35)에는 우의정에도 발탁됐다. 그러나 그는 실제 관직에 나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윤증이 송시열의 문하에서 수학할 때, 아버지 윤선거는 그에게 송시열의 우뚝한 기상을 따라가기 힘드니 그의 장점만 배우되 단점도 알아두어야 한다고 가르친 적이 있다. 윤선거는 남의 말을 잘 듣지 않고 이기기를 좋아하는 것을 송시열의 단점으로 보고, 여러 번 편지를 보내 깨우쳐 주려 하였다. 효종이 죽어서 모후(母后) 조대비가 상복을 3년을 입어야 하느냐 1년을 입어야 하느냐 하는 문제로 논쟁이 벌어져 송시열과 윤후 사이에 심각한 알력이 생겼을 때, 송시열은 윤선거가 은근히 윤휴를 편들었다고 원망했다.

그 후 1673년(현종 14) 윤선거가 죽자 윤증은 아버지의 친구이자 자신의 스승인 송시열에게 제문과 묘비명을 부탁했다. 통상 그런 글을 쓸 때에는 죽은 사람의 결점은 덮어두고 좋은 점, 훌륭한 점만 가려내어 써주는 법이다. 그런데 송시열은 윤선거가 윤휴와 한통속이었다는 것과 강화도의 일을 완곡하게 거론하며 은근히 험담을 했다.

강화도의 일이란 병자호란이 터져 강화도가 함락될 때에 그곳에 있던 윤선거의 작은아버지 윤전과 부인 이씨가 죽고 말았는데, 그때 윤선거가 살기 위해 구차스럽게도 변복을 하고 이름도 바꾸어 몰래 강화도에서 빠져나왔다는 소문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송시열이 이 일을 들먹여 은근히 꼬집은 것이다.

이에 대해 윤증이 죽은 이에 대한 정리가 아니라고 하여 고쳐주기를 청하였으나, 송시열은 자구만 수정하고 글의 내용은 고쳐주지 않았다. 이 일로 인해 윤증과 송시열의 사이가 벌어져 큰 싸움으로 번졌다. 이로부터 사제지간의 의리가 끊어졌으며, 윤증은 송시열의 인격 자체를 의심하고, 송시열을 ‘의리쌍행(義利雙行: 의리와 이익을 같이 행하다)’, ‘왕패병용(王覇幷用: 왕도와 패도를 병용함)’이라고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윤증은 사국(史局: 조선시대 실록청․일기청을 합쳐 부르던 말)에 편지를 보내 아버지 일을 변명하고, 다시 율곡 이이가 초년에 불교에 입문한 사실을 인용하여 이이는 입산의 잘못이 있으나 자기 아버지는 처음부터 죽어야 할 의리가 없다고 하였다. 그러자 유생들이 궐기하여 선현을 모독했다고 그를 성토함으로써 조정에서 시비가 크게 일어났다.

송시열이 변명의 상소를 올려 죄의 태반이 자기에게 있다고 하였으나 왕은 듣지 않고 그를 전과 같이 대우하지 말라는 교명을 내리게 되었다. 이것을 전후하여 사림과 간관 사이에 비난과 변무의 상소가 계속되고, 양파의 갈등도 심화되었다. 송시열의 문도들은 윤증을 스승을 배반한 파렴치한으로 몰았고, 윤증은 아무리 스승이라도 아버지를 욕하는데 어떻게 참고 있으란 말이냐며 항변했다.

이 사건을 회덕에 살고 있던 송시열과 니성에 살고 있던 윤증 사이의 다툼이라 하여 이른바 회니시비라 부르는데, 이것이 서인을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놓은 한 빌미가 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