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사설 초등교육기관, 서당


조선시대 사설 초등교육기관, 서당

 

당은 조선시대에 전국 여러 곳에 널리 퍼져 있던 사설 초등 교육기관으로 글방․서재․사숙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서당의 기원으로는 고구려의 경당이 거론되며, 고려 시대에도 송나라 사람 서긍이 쓴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 초등 교육기관으로 서당의 존재가 보인다.

조선조는 국초부터 인재의 양성과 교화를 위한 제도로 학교를 중시하였다. 이에 서울에 성균관과 사학(四學)을, 지방에 향교 등의 교육 기관을 설치하였으며, 세종조에 그 체제를 완비하였다. 그러나 왕조 체제의 틀이 잡히자 국가 정책은 차츰 경비가 많이 드는 관학의 육성보다 손쉬운 과거를 통한 인재 선발로 돌아섰다. 이에 각 지방의 향교는 국가의 관심 부족으로 능력 있는 훈도를 구할 수도 없었고, 교생들도 군역을 모면하려는 평민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 당시 많은 유생들은 이러한 향교를 떠나 사저에서 면학하거나, 서원․서당, 양사재 등 사학기관을 설립하여 교육에 임하였다.

우리가 조선시대 서당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그림은 김홍도의 <서당>이다. 가운데 훈장을 중심으로 글공부를 하는 아이들이 그려져 있는데, 여기에는 남자아이들밖에 없다. 조선시대는 여성에게 문필 교양이 가로막힌 시대였다. 김홍도의 <서당> 그림에는 발목을 만지며 울고 있는 아이와 어쩔 줄 몰라 하는 훈장의 모습, 이런 모습에 키득키득 웃고 있는 아이들이 보인다. 우는 아이는 필경 잘못하여 회초리를 맞았을 터이다.

또 여기에 보이는 아이들의 모습은 다양하다. 어떤 이는 갓을 썼고 어떤 이는 덩치도 작고 댕기머리를 하고 있다. 이것을 보면 조선시대 서당에 다양한 연령층이 함께 공부했음을 할 수 있다. 가장 덩치가 작은 학동은 옷차림이 남들과 다르다. 나이가 매우 어릴 것으로 짐작된다. 조선시대에 보통 글공부를 몇 살부터 시작했는지는 사람마다 다르므로 분명하지 않지만 대체로 일곱에서 여덟 살에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서당의 하루 일과를 보면 학습 부담이 결코 만만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먼저 새벽에는 훈장에게 전날 배운 것을 확인받은 강(講)을 하여 통과하면 그날의 진도를 나간다. 오전 중에는 당일 배운 내용을 암송하면서 글의 의미를 파악하고, 오후가 되면 배운 내용을 계속 암송하거나 훈장과 함께 산책을 나간다. 저녁에는 배운 내용을 암송하면서 학동들과 함께 당일 배운 내용에 대해 문답하거나 다음 날 공부를 예습한다.

교육 내용은 읽고 암기하는 강독과 글을 짓는 제술, 그리고 글쓰기를 연습하는 습자로 이루어진다. 강독 교본으로는 『천자문』,『동몽선습』,『통감』,『사략』,『소학』,『사기』, 『사서』, 『삼경』,『당송문(唐宋文)』,『당율(唐律)』등이었다. 이 중 『소학』은 아동의 지혜와 덕성을 기르기 위한 중요한 교재였다.

글을 짓는 제술로는 오․칠언절구, 사율, 고풍, 십팔구시의 작품이 보통이었다. 훈장의 자질에 따라 각종 문장체를 학습하기도 했지만 작은 서당 가운데는 제술을 아예 제외한 곳도 있었다. 습자는 정서(正書) 또는 진서(眞書)라 할 수 있는 해서(楷書)와 자획을 생략하여 신속히 쓰는 흘림글씨인 초서(草書)가 주 내용이었다.

서당의 교육법은 생도의 능력과 수준에 따라 교육하는 개별지도였다. 많은 양을 가르치지 않았고, 아둔한 아이일수록 끈기를 가지고 가르쳤다. 서당에서는 계절에 따라 교과를 다르게 운영했는데, 봄과 가을, 겨울에는 경서류를, 여름에는 시를 짓는 문예 수업을 위주로 했다.

조선시대에는 물론 글공부의 중요성이 컸지만, 개인에 따라 몸을 단련하는 법을 가르치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켰던 중봉(重峯) 조헌(趙憲:1544∼1592)은 새끼줄로 줄넘기를 하는 방법을 만들어 아이들의 다리 힘을 키웠다고 하는데, 자신을 찾아오는 선비들에게 글을 가르치기 전에 항상 줄넘기를 삼천 번씩 시켜서 둔한 선비들이 줄넘기를 하느라 몸놀림이 빨라졌다는 구전도 전한다.

서당에는 훈장과 학동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서당에 다니는 학생들이 많으면 서당 운영의 편의를 위해 접장(接長)이라는 사람을 두었다. 접장은 공부와 관련된 일을 하는 자를 말한다. ‘접’은 떼나 무리를 뜻하니, 말하자면 접장은 무리의 우두머리이다. 규모가 큰 서당에서는 훈장을 돕기 위해 학동 가운데 나이와 지식이 많은 자를 두세 명 뽑아 접장으로 세웠다. 이를테면 지금의 학급 반장과 같은 역할이다. 서당에서 접장이 되려면 학동들 중 나이가 많아야 할 뿐 아니라 학업도 일정 수준에 올라 있어야 했다. 접장은 훈장 대신 나이 어린 학동들을 지도하기도 했다.

학동이 책 한 권을 다 익히고 나면 서당에서 스승과 친구들에게 간단한 잔치를 베풀었다. 이를 책거리라고 하였는데, 다른 말로 책씻이[冊施時]라고도 하였다. 책을 한 권 뗀 아이의 집에서는 훈장에게는 약주와 음식을 대접하고, 학동들에게는 떡을 해서 먹였다. 주로 국수․경단․송편 등을 장만했다. 이 중에서 송편을 음식으로 하는 이유는, 송편이 비어 있는 속에다 팥이나 콩․깨 등을 넣어 만들듯 학동도 속을 꽉 채우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했다.

책거리 외에 서당에서 벌어졌던 행사로는 개접례(開接禮)․파접례(罷接禮) 등이 있었다. 개접례는 개학식과 비슷한 행사였다. 파접례는 서당이 일정한 기간의 학습을 끝내고 하는 행사였다. 개접은 3월에서 5월 사이에 적당한 날을 선택하며, 파접은 음력 7월이 지나 날씨가 서늘해지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