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학에 대항하는 동쪽의 학문, 동학


서학에 대항하는 동쪽의 학문, 동학

 

곡선생은 조선사회를 적극적으로 개혁하고자 하였으나 결국은 실패하였다. 이후 임진왜란을 맞이한 뒤, 조선 사회개혁의 기회가 있었으나 당시 사회지도층들은 그런 기회를 놓치고 사회는 또다시 혼란에 빠져들어 호시탐탐 한반도를 노리고 있던 일본의 침략으로 결국 국운이 기울게 되었다. 이때 유교의 영향을 받은 동학세력이 등장하여 조선을 일으켜 세우고자 하였는데, 그 창시자 최제우에 대해서 살펴본다.

 

문 : 너의 이름은 무엇인가?

답 : 전봉준이다.

문 : 나이는 몇 살인가?

답 : 마흔한 살이다.

문 : 살고 있는 곳은 어디인가?

답 : 태인 산외면 동곡리이다.

문 :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가?

답 : 글방 선생을 하고 있다.

……………

문 : 너는 고부 군수에게서 피해를 입지 않았는데 왜 군사를 일으켰는가?

답 : 세상이 날로 잘못되고 있어 세상을 한번 건져 보고자 하였다.

문 : 너와 함께 일을 꾸민 손화중, 최경선 등은 모두 동학을 대단히 좋아했는가?

답 : 그렇다.

문 : 소위 동학이라는 것은 어떤 주장을 하고 있는가?

답 : 마음을 지켜 충효로 본을 삼고 보국안민하고자 하는 것이다.

문 : 네가 군대를 일으킬 때 거느린 사람 모두가 동학 교도인가?

답 : 접주는 다 동학이나 그 나머지는 충의를 위해 일어선 보통 사람들이다.

<전봉준공초(全琫準供招: 전봉준에 대한 심문 기록) 중>

 

동학은 1860년(철종 11) 최제우가 창시한 종교 사상이다. 당시 유교는 성리학적 명분주의에 빠져 변화하는 사회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하였고 불교 역시 조선시대 5백여 년간 정책적으로 탄압받아 왔으므로 새로운 사회를 주도할 자체 역량이 부족했다. 또한 서양의 천주교가 서학이라는 이름으로 조선 사회에 들어와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서학의 침투에 대항하는 한편, 새로운 이상 사회의 건설을 목표로 하여 등장한 것이 동학이었다. 동학은 사후 세계에 관해서는 별로 언급하지 않고, 현실 생활의 안정과 평화, 행복을 기원한다. 곧 현세 복리를 추구하는 현실 중시의 사상을 지니고 있어 당시에 먹고 살기에도 급급하여 생활에 위협을 크게 받던 농민들에게 급속히 전파되었다.

 

“최제우는 경주 백성으로 훈장을 업으로 삼았는데 양학(洋學 : 서양의 학문)이 밀려들어온다는 것을 듣고서 양반 유생으로서 양학이 크게 번지는 것을 차마 보고만 있을 수 없어 하늘을 공경하고 따르는 마음으로써 ‘위천주고아정 영세불망만사의(爲天主顧我情 永世不忘萬事宜:천주를 위해 우리의 사정을 돌아보시고 만사 영원토록 잊지 않음이 마땅하다)’란 13자 주문을 짓고, 이름하여 동학이라고 하였음은 동국의 뜻을 딴 것인데 양학은 음이고 동학은 양이라 하여 양으로써 음을 제압하려고 한 것이다.”

『일성록(日省錄)』고종 1년 2월 29일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는 아명이 복술이요, 관명(冠名 : 관례를 치르고 어른이 되고 나서 새로 지은 이름)이 제우(濟愚)이다. 자는 성묵(性黙), 호는 수운(水雲), 본관은 경주이다. 아버지는 옥(鋈)이며, 어머니는 청주 한씨이다. 7대조 진립(震立)은 임진왜란․병자호란 때 많은 공을 세우고 전사하여 사후에 병조판서의 벼슬과 정무공(貞武公)의 시호를 받았으나 6대조부터는 벼슬길에 오르지 못한 몰락 양반 가문 출신이었다. 아버지는 여러 차례 과거에 실패한 유생으로 두 번 상처를 하고 과부이던 한씨를 만나 63세에 최제우를 낳았다.

최제우는 6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8살 때 서당에 들어가 한학을 공부했는데 수많은 책을 읽어 모르는 것이 없었으며, 10세 때에는 이미 세상의 어지러움을 한탄할 정도로 총명했다고 한다. 13세 때에 울산 출신의 박씨와 혼인했고 17세에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농사에는 마음이 없었으며 화재까지 당하여 집안의 형편이 매우 어려웠다. 3년상을 마친 뒤 여기저기 떠돌아 다니면서 활쏘기․말타기 등을 익히고, 갖가지 장사와 의술․복술(卜術 : 점을 치는 술법) 등에도 관심을 보였으며, 서당에서 글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세상이 어지럽고 인심이 각박하게 된 것은 세상 사람들이 천명을 돌보지 않기 때문임을 깨닫고 한울님의 뜻을 알아내고자 노력하게 되었다.

당시 사회는 오랫동안 누적되어온 당쟁과 외척의 세도로 정치는 어지럽고 부패하였으며 양반 토호들의 횡포, 지방 관리들의 포학 등이 극에 달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양 이양선의 출현과 서학의 전래는 왕조 질서의 동요를 가져왔다. 이때 최제우는 ‘보국안민(輔國安民:나라 일을 돕고 백성을 편하게 한다)’과 ‘제폭구민(除暴救民:포악한 것을 물리치고 어려움에 처한 백성을 구함)’에 뜻을 두고 서학․서교에 대응하는 동학이라는 새로운 도를 창시하였다.

동학은 짧은 기간에 교세를 확장하였다. 경상도는 물론이고 그 밖의 지역으로 널리 퍼졌으며 산골 어린아이들도 동학의 주문을 외울 정도였다. 최제우 자신도 1863년 11월에 전라도 포교를 위해 경상도를 벗어나 전라도 남원에 가서 신도를 확보하였다.

정부와 양반 지배층은 동학의 급속한 확산을 우려하였다. 동학이 기존의 성리학 질서를 무너뜨리는 이단 사상으로 보였던 것이다. 따라서 정부는 경상감영에 체포 명령을 내려 1863년(철종 14) 12월 3일 대주인(大主人) 최제우를 체포하였다. 이듬해 3월 10일에 ‘평세사란 암지취당(平世思亂 暗地聚黨: 평탄한 세상에 난을 생각하여 몰래 당을 모았다)’이라는 이유로 최제우를 참형에 처한 동시에 동학 교도를 색출하여 체포하였다.

당시 북도 중주인(北道中主人: 경주 이북을 포교하는 접주)으로 포교하던 최시형은 최제우가 체포되기 직전인 1863년 8월 14일에 대주인이 된 뒤, 관의 체포를 피해 강원도 등지로 도피하는 한편 교세 확장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전부터 내려오던 접주 제도를 확대 개편하여 교인들의 일단(一團)을 ‘포(包)’라 하고 여기에 포주(包主)를 두었다. 이제 동학은 충청․전라도 등에까지 널리 유행하였으며, 그 조직은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운동 전개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