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예비국왕, 세자로 사는 법


조선시대 예비국왕, 세자로 사는 법

 

선시대 적장자로서 세자에 책봉되는 나이는 대략 8세 전후였다. 아직 성인이 되기 전이었지만, 세자에 책봉되면 바로 관례(冠禮)를 행하고 배우자를 골라 혼례를 치르는 것이 관행이었다. 조선시대 유교예법서인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의하면 관례는 15∼20세 사이에, 혼례는 16∼30세 사이에 치르도록 되어 있다. 또한 『경국대전(經國大典)』에도 남자의 혼인연령을 15세로 규정해놓고 있다.

그러나 세자의 경우에는 이 규정을 지킨 경우가 별로 없었다. 대부분은 원자책봉 후에 곧바로 관례를 행했다. 이는 원자로 책봉된다는 사실 자체가 성인으로서의 책무를 감당할 수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관례는 어른의 표시로 모자인 관(冠)과 성인 복장을 착용하게 하고 자(字)를 지어 주는 의식이다. 본래 관례는 자신의 집에서 치르는 것이지만, 세자의 관례는 나이 많은 종친의 집을 빌려 거행하였다. 대궐 정전에서 관례를 치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관례의 의식을 계획하고 준비하는 주인(主人)은 보통 관례를 행할 사람의 아버지가 되는 것이 상례이나 원자의 아버지는 왕이기 때문에 나이 많은 종친 중에서 선발하였다. 관례가 끝나면 이어서 왕에게 인사하고 종묘에 고했다.

조선시대 왕의 혼례는 대체로 세자 시기일 때에 치렀다. 연령은 대체로 10세 안팎이었다. 예컨대 현종․숙종․영조․정조․헌종 등은 11살에 혼례를 치렀고, 경종은 9살에 혼례를 치렀다. 이는 법보다 상당히 이른 조혼이라고 할 수 있다. 세자빈은 장차 왕비가 될 사람이므로 왕비의 간택처럼 삼간택을 하였고, 선발된 후에는 세자와 마찬가지로 임명장을 받았다. 또한 세자는 세자빈 이외에 공식적으로 후궁을 둘 수 있었다. 세자, 세자빈, 후궁은 동궁(東宮)이라는 궐내의 독립 구역에 거주하였다. 세자는 마치 떠오르기 전의 태양과 같은 존재이므로 궁궐 동쪽에 거처하고 그 명칭도 동궁이라고 하였다.

세자는 엄밀히 말하면 예비왕일 뿐이었다. 따라서 세자로 있을 때에는 철저하게 자신의 주제를 지켜야만 하였다. 세자가 정치에 간여하거나 인사에 개입하게 되면 바로 삼사(三司 : 사헌부․사간원․홍문관) 관료들의 탄핵이 뒤따르게 된다. 그러나 정작 큰 문제는 아버지인 국왕이 이를 가만히 두고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신의 권력에 도전하는 세자는 아들이 아니라 정적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따라서 정상적인 상황에서 세자가 정치에 간여할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세자로서 공식적으로 정치에 간여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대리청정이 그것이다. 보통 왕이 중병에 들어 정사를 살필 수 없거나, 노년에 격무를 감당할 수 없을 때, 또는 국난을 당하여 세자에게 위임통치를 시킬 때이다. 세종의 경우, 말년에 격무를 덜기 위해 세자(후의 문종)에게 약 5년간 대리청정을 시켰다. 임진왜란 때의 광해군, 영조 때의 사도세자, 순조 때의 효명세자도 국난 또는 부왕의 중병으로 대리청정을 하였다.

세자가 대리청정을 하는 상황은 대체로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왕권에 위협을 느낀 국왕이 마지못해 대리청정을 명하는 경우다. 계속해서 흉년이 들거나 전쟁이 발발하면 흉흉한 민심을 달래기 위해 세자가 대리청정을 하는 수가 있다. 더 심하면 국왕이 아예 전위하겠다는 경우도 없지 않다. 이 때 세자의 입장에서 대리청정은 몹시 위험하다. 대리청정을 잘하더라도 모든 영광은 주상에게 돌아가지만 반대로 조금의 허물이나 실정이 있으면 세자의 책임이 된다.

문종을 제외하면 대리청정을 했던 세자의 처지는 매우 불행하였던 사실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광해군은 위임통치를 계기로 부왕 선조와 극단적인 불화를 겪었으며, 효명세자는 약 3년간의 대리청정을 통해 외척 안동김씨를 막다가 의문사를 당하였다. 그러나 누구보다 비극적인 사람은 부왕에게 죽음을 당한 사도세자였다. 사도세자는 14년간 부왕을 대신하여 국정을 처리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사도세자와 영조의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었고 그 결과는 조선 왕실의 최대 비극이라 할 수 있는 뒤주 사건으로 막을 내렸다.

이와 달리 노년의 왕을 대신하거나 병중의 왕을 돕기 위해 대리청정을 할 때는 긍정적인 효과도 있다. 세자의 입장에서는 미리 정치를 경험하는 셈이 된다. 또한 국왕도 자신의 왕권에 부담이 되지 않는 한 굳이 세자의 허물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 군주제도의 허점이 훌륭하게 보완되는 순간이 바로 이때라고 하겠다.

세자는 대리청정 기간 중에 국왕을 대신하여 왕권을 행사하도록 되어 있다. 그렇지만 세자가 전권을 휘두를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우선 세자는 자신이 처리해야 할 중요사항은 일일이 왕에게 보고하고 결재를 받아야 한다. 또한 신료들도 후일 국왕이 친정할 날을 고려하여 세자와 왕 사이에서 눈치를 보며 처신한다. 왕이 받쳐주지 않으면 대리청정을 한다 해도 세자는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비상사태가 해결되면 대리청정은 취소되고 세자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아침저녁으로 문안인사하고 공부에 전념해야 하는 예전의 생활이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그렇게 세월을 보내면서 세자는 자신의 시대를 기다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