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왕의 일상은 어땠을까


조선시대 왕의 일상은 어땠을까

 

조선시대의 왕은 참으로 바쁜 사람이었다. 흔히 왕이 처리하는 군국기무는 만 가지나 되기 때문에 왕의 집무를 일컬어 ‘만기(萬機)’라 부른다. 왕의 기상시간은 늦어도 해가 뜨기 이전이라야 하였다. 조선시대의 한양에는 밤 10시쯤에 통행금지를 알리는 종인 인경을 28번 쳐서 인정(人定)을 알리고, 새벽 4시경에 통행금지의 해제를 알리는 33번의 파루(罷漏)를 쳤다. 밤사이 침전에서 잠들었던 왕도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해 파루에 일어나야 했다.

왕은 일상적으로 침전의 동쪽 온돌방에서 밤을 지냈는데, 조선 전기에는 경복궁의 강녕전, 그리고 조선 후기에는 창덕궁의 대조전이 대표적인 침전이었다. 침전 주변에는 왕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사람과 시설들이 있었다. 왕의 침실 밖에서는 지밀상궁(至密尙宮)들이 침실을 둘러싸고 있는 사방의 방에서 숙직을 서고, 식사와 세숫물, 옷 등을 담당하는 대전차비(大殿差備)들은 침전 근처에서 상시 근무하였다. 왕이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지밀상궁들은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식사를 담당한 수라간의 요리사들은 음식을 만들고, 세숫물을 대령하는 시녀들은 물을 준비했다. 내시들도 일어나 왕의 명령을 기다렸다.

왕의 하루 일과는 먼저 대비와 왕대비 등 웃어른에 대한 문안인사로 시작되었다. 바빠서 직접 인사를 할 수 없을 때에는 대신 내시를 보냈다. 해가 뜰 무렵인 평명(平明)에는 학문 토론 겸 정치 토론을 위해 경연(經筵)에 참석한다. 경연이란 신료들과 더불어 경전을 토론하는 자리라는 의미이다. 경연은 세자 때의 수업과 비슷하게 진행되는데, 학문 토론을 하는 중에 종종 현안문제들이 논쟁점으로 제기된다. 이 과정에서 문제점이 부각되고, 보통은 토론을 거쳐 해결방안이 제시된다.

경연이 끝나면 아침식사를 하고 조회를 시작하는데, 왕의 공식집무는 여기서 부터다. 조회에는 백관이 모두 참여하는 정식 조회와 매일매일 시행하는 약식 조회가 있다. 정식조회는 조참(朝參)이라 하며, 매월 5일, 11일, 21일, 25일 네 차례에 걸쳐 대궐의 정전에서 백관들이 왕을 알현하는 의식이다. 약식조회는 상참(常參)이라 하고, 대신 ․ 중신 ․ 중요 아문의 당상관 ․ 경연관 ․ 승지 ․ 사관 등이 왕을 알현하는 매일 매일의 의식이다.

아침조회인 상참이 끝나면 이어서 승지를 비롯하여 공무가 있는 신료들로부터 국정 현안을 보고받는다. 이는 아침에 업무를 보고한다고 해서 조계(朝啓)라 하는데, 이때에는 반드시 사관이 동석한다. 승지는 왕의 비서로서 중앙과 지방에서 올라오는 모든 공문서와 상소문, 탄원서 등을 접수해 미리 검토하였고, 보고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되는 상소문이나 탄원서는 되돌리기도 하였다. 승지들은 꼭 필요한 현안을 골라 왕에게 보고했는데, 내용이 긴 공문서는 왕이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도록 간단하게 정리하였고, 일상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처리 방침까지 보고서 말미에 첨부하였다. 따라서 왕은 보통의 사안은 승지가 제시한 대로 따랐으며, 왕의 결재 문구는 “그대로 하라”는 의미의 윤(允), 의윤(依允), 지도(知道) 등 한두 자에 불과했다.

또한 승지는 왕이 중앙 부처나 지방 행정 조직에 잘못된 명령을 내렸을 때, 다시 검토할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이는 왕에게 올라가는 모든 보고가 승정원을 경유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왕이 내리는 모든 명령 역시 승정원을 통하기 때문에 가능했다. 승지의 역할이 이처럼 막중하기에 문과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한 인재들만이 승지에 임명되었다.

업무보고를 받고 나면 이어서 윤대관(輪對官)들을 만나야 한다. 윤대관이란 상참이나 조계에 참석하지 못하는 각각의 행정부서에서 순번에 따라 1명씩 왕에게 파견한 관료들이다. 이들은 조계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왕을 알현하고 자신들의 부서와 관련된 업무를 보고한다. 윤대관은 하루에 5명 이하로 제한했고, 문신은 6품 이상, 무신은 4품 이상이 될 수 있었다.

아침조회부터 시작해서 윤대관들까지 만나고 나면 벌써 정오가 가까워온다. 정오가 되기 전에 점심을 간단히 하고, 정오가 되면 바로 주강(晝講)에 참여해서 학문을 익혀야 한다. 주강 이후에는 지방관으로 발령받고 떠나는 신료나 지방에서 중앙으로 승진해오는 관료들을 만나야 한다. 특히 팔도의 관찰사나 중요지역의 수령들은 왕이 친히 만나 업무를 당부하고, 그 지역의 민원을 들어준다. 이렇게 몇 명의 신료들을 만나고 나면 벌써 해질 때가 가까워온다.

한편 오후 3시에서 5시 사이에는 왕 자신이 반드시 챙겨야 할 업무가 있다. 바로 야간에 대궐의 호위를 맡을 군사들 및 장교들과 숙직관료들의 명단을 확인하고, 야간의 암호를 정해주는 일이다. 이는 왕 자신의 안전 및 비상사태에 대처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다.

이것으로 하루 집무가 끝난 것이 아니다. 왕은 해지기 전에 다시 저녁 공부인 석강(夕講)에 참석해야 한다. 석강이 끝나면 저녁을 먹고 잠시 휴식을 취하는데, 저녁 후에도 낮 동안의 업무가 밀려 있으면 야간집무를 본다. 그리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다시 대비와 왕대비 등에게 문안인사를 드려야 한다. 이제야 겨우 공식적인 하루의 일과가 끝난 것이다.

이외에도 왕이 참석해야 하는 무수한 공식행사나 국가제례 등이 있으며, 대소신료들과 전국의 양반 그리고 일반 농민이나 노비들이 올리는 상소문과 탄원서도 적지 않다. 공문서 처리는 비교적 간단했으나, 상소문이나 탄원서의 처리는 쉽지 않았다. 비중 있는 인사가 올린 상소문은 왕이 직접 읽어야 했는데, 상소문은 격식을 차리고 글 솜씨를 뽐내느라 아주 길뿐만 아니라 난해했다. 왕은 긴 상소문을 다 읽고 직접 대답을 써주어야 했기 때문에 이런 상소문은 하루에 열 통만 올라와도 다 읽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므로 왕이 상소문에 대한 비답(批答 : 상소에 대해 왕이 내린 답변)을 내려 주는 일은 통상적으로 오래 걸렸다. 특히 왕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상소문은 아예 무시하거나 심지어 상소문을 올린 사람에게 중벌을 내려 필화(筆禍) 사건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이처럼 업무가 산적해 있기 때문에 왕이 자기 자신만의 호젓한 시간을 갖기란 쉽지 않다. 조용히 명상에 잠기거나 보고 싶은 책이라도 뒤적이려면 한밤중에나 가능하다. 과거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 왕이 한밤중에 조용히 독서하거나 상소문을 읽는 것을 을람(乙覽)이라 했다. 이는 밤 9시에서 11시 사이인 을야(乙夜)에 책을 열람한다는 의미인데, 밤늦도록 열심히 공부하라는 뜻 외에도 실제로 이 시간이 되어야 틈을 낼 수 있었다.

왕이 챙겨야 하는 업무는 만기라 불리듯이 산처럼 많다. 그러므로 왕에게 병이라도 생기거나 또는 왕이 업무에 싫증을 내고 정사를 돌보지 않으면 결재해야 할 문서들이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적체되는 문서 하나하나가 왕에게는 지겨운 업무일 수도 있지만, 이 문서가 결재되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나라와 백성을 생각한다면 왕은 잠시도 한눈을 팔 여유가 없으며, 병들어서도 안 된다. 훌륭한 왕이 되려면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과 함께 이를 뒷받침할 업무능력과 육체적 건강이 요구된다.

그렇지만 왕이 공식적으로 업무에서 해방될 수 있는 기회도 많았다. 우선 3정승을 비롯하여 정1품 이상의 관료가 사망하면 3일간 조정의 업무를 정지했다. 정경(正卿) 이상의 관료가 죽었을 경우에는 2일간, 판윤(判尹)을 지낸 사람이 사망하면 1일간 조정업무를 쉬었다. 공식적으로는 고위관료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한 것이지만 어쨌든 격무에 시달리는 왕에게는 귀중한 휴식 시간이었다. 이외에 세시풍속상의 명절에도 휴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