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궤불칙(簠簋不飭)한 윤두수


야사(연려실기술)를 통한 스토리텔링 9

보궤불칙(簠簋不飭)한 윤두수

 

궤불칙(簠簋不飭)이란 제사 때 제기인 보와 궤를 갖추지 않았다는 뜻으로, 공직자의 부정을 완곡하게 표현하여 탄핵함을 일컫는 말로 <한서> ‘가의전’에 나온다. 가의(賈誼)는 그 유명한 <과진론(過秦論)>이 저자로서 18세에 이미 문명을 떨치고 33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한 천재이다. 그가 양회왕의 태부가 되어 올린 <양태부가의상소(梁太傅賈誼上疏)>에서 “옛날 대신이 부정으로 축출당하면 부정이라 표현하지 않고, “보궤(簠簋:제사에 쓰는 용기)를 갖추지 않았다(불칙(不飭)”라고 하여 예를 갖추지 않았다고 은유적으로 표현 했습니다.“라는 글이 있다.

이원익이 윤두수를 보궤불칙하다고 탄핵한 일화가 <연려실기술>에 나온다.

 

이원익(李元翼)이 처음 대각(臺閣)에 들어가서 보궤불칙(簠簋不飭)했다는 이유로 공을 탄핵한 일이 있었다. 그 후에 공사(公事)로 인하여 공을 가서 뵈니, 공이 조금도 괘씸하게 여기는 기색이 없이 머무르게 하며 말하기를,

“가난한 친족들이 혼인이나 상사(喪事)가 있을 때, 모두 내게 의뢰해 오기 때문에 그것에 수응하기 위해 보내오는 모든 물품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대간의 탄핵은 사리에 당연한 것이었으니 내가 개의할 것이 무엇인가.”

하며 자못 오랫동안 말을 주고받았는데, 그 말들이 모두 진심에서 나온 것이었다. 마침 시골에 있는 친족이 편지로 혼수(婚需)를 청해오자 공이 즉시 여종에게 명하기를,

“요전에 역관 아무개가 보내온 포목이 있으니 네가 가져오라.”

하였다. 여종이 돌아와 고하기를

“본래 그런 물건이 없습니다.”

하니,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아녀자들이 공이 자리에 있다고 숨기려는 것이오.”

하고 가져오라고 재촉하여 봉해진 채 그대로 내주면서 안색이 변하지 않았다. 원익이 그 큰 도량에 탄복하고 평생 존경하여 중하게 여겼으며, 원익의 후손들이 지금껏 칭송하고 있다.

공사견문(公私見聞)》

 

이원익이 윤두수가 보괘불칙 했다고 탄핵한 일이란 이종 사촌동생인 진도군수 이수에게 뇌물을 수수한 혐의로 파직 당했다가 복직한 일을 일컫는다. <공사견문>의 기록에서 재미있는 것은, 뇌물수수로 탄핵했던 당사자 앞에서 역관으로부터 받은 포목을 집안 친족의 혼수로 내려주면서도 안색이 전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인데, 이는

“가난한 친족들이 혼인이나 상사(喪事)가 있을 때, 모두 내게 의뢰해 오기 때문에 그것에 수응하기 위해 보내오는 모든 물품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는 윤두수의 변명대로임을 잘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이런 기상이 있어서 당시 뇌물수수 혐의로 탄핵을 받고 근신하고 있을 적에도 탄핵 당사자인 이원익의 집을 지나면서 의연하게 방문하여 작별을 고했을 것이다.

 

윤두수가 탄핵을 받을 때에 근수와 같이 성 밖에 가서 명을 기다리게 되었는데, 마침 이원익(李元翼)의 집 문 앞을 지나게 되었다. 두수는 원익과 전부터 친밀하였으므로 찾아보고 가려 하니, 근수가 말리며 말하기를,

“그이가 지금 시론(時論)을 주장하여 우리들을 곧 귀양 보내려 하는 중이니 찾아보지 마시오.

” 하였으나, 두수는

“옛 정을 잊을 수 없다. 피차에 여러 사람의 논의에 몰려서 어쩔 수 없는 처지일 뿐이지 어찌 정의가 없을 수 있겠는가. 곧 우리가 먼 곳으로 귀양하게 될 것이니, 작별 인사를 아니할 수 없다.”

하고 들어가서 명함을 통하였다. 이에 당시 동인으로 논의를 주장하는 자가 자리에 가득히 있다가 두수가 왔다는 말을 듣고 놀라서 방으로 피해 들어갔다. 두수가 원익을 보고 한참 동안 담화를 하였으나 시국 이야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작별인사를 하고 돌아서니, 원익이 매우 부끄러워하였다.

일월록

 

윤두수의 이런 기상을 <연려실기술>에서는 신흠의 기록을 빌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공이 여러 정승과 더불어 국사를 의논할 때, 일이 부득이 임금의 뜻에 거슬리게 되는 경우가 있으면 다른 정승들은 머뭇거리고 바로 말하지 못하였으나, 공은 홀로 서리(書吏)에게 붓을 잡으라 하여 반드시 말을 다하였다. 혹 임금의 노여움을 당하기도 했으나 돌아보지 않았으며, 다른 정승들은 얼굴을 붉히는 자가 있었으나 공의 안색은 화평스러웠다.

크고 넓은 도량은 산악이 솟고 못에 물이 머물러 있듯 하여 바라보기만 해도 높고 깊었다. 공이 공(功)을 이미 이루었으나 배척을 받아 정승에서 해직되어 집으로 돌아가서 자연에 맡겨둔 채 고요히 거처하며 군국(軍國)의 기무(機務)에 간여하지 않았으나 국가에 큰 의논이 있으면 더욱 힘껏 말하였다.

상촌집(象村集)》 ‘비음기(碑陰記)’

 

신흠의 평가대로라면 윤두수는 임금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고 말할 수 있는 담대한 성격의 소유자이면서 이로 인하여 닥쳐올 재앙에도 전혀 개의치 않는 당당함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하여

“크고 넓은 도량은 산악이 솟고 못에 물이 머물러 있듯 하여 바라보기만 해도 높고 깊었다.”

라고 평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