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 등극의 기반을 닦아준 이준경

 


야사(연려실기술)를 통한 스토리텔링 8

선조 등극의 기반을 닦아준 이준경

 

조 묘정에 배향된 세 명의 대신은 이황, 이이 그리고 이준경이다. 그는 명종의 고명지신으로 명종의 유명을 받들어 선조가 왕위에 오르고 통치 기반을 닦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명신이다. <연려실기술>에 이준경의 행장이 실려 있어 그때의 공로를 알려준다.

 

이때 명종이 이준경에게 누운 침상 위로 올라오라 하시면서,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니 준경이 또한 울면서,

“후사가 결정되지 아니하고 환후가 이 같으시니, 속히 대계를 결정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은 이미 말을 하지 못하고, 손을 들어 안쪽 병풍을 가리킬 뿐이었다. 이준경이 임금의 뜻이 내전에 물으라는 것임을 알고 일이 급하여 글을 써서 아뢸 여가도 없이 직접 말로써 중전에 청하기를,

“전하의 환후가 이 지경에 이르러 이미 가망이 없습니다. 후사를 예정한 곳이 있을 것이며, 내전께서 반드시 들으신 바가 있을 것이므로 지금 전하께서 손으로 안을 가리키는가 하옵니다.”

하니, 중전도 병풍 안에서 직접 말하기를,

“을축년 위독하실 때에 덕흥군의 셋째 아들로 정하시었소.”

하였다. 이준경이 다시 다른 대신과 삼사 장관(三司長官)을 불러 같이 이 전교 듣기를 청하고 사관을 시켜, ‘덕흥군의 셋째 아들이 들어와 대통을 계승하는 것이 가하다.’는 글을 써서 친히 꿇어앉아 받들고 임금 앞에 보이며,

“전하의 뜻으로 내전에 여쭈니, 내전의 말씀이 이 같으시므로, 감히 다시 여쭙니다.”

하니, 명종이 눈물을 머금고 턱을 끄덕이며 이내 승하였다.

소재집(蘇齋集)》 〈동고행장(東皐行狀)〉

 

하성군이 바로 명종을 이어 왕위에 오른 선조이다. 명종이 후사를 정하지 못하다가 생명이 위독한 지경에 이르러서야 간신히 이준경의 주청에 의해 후사를 밝히고 그에게 보호를 부탁 했으니 선조가 명종을 이어 등극하는데 실로 막중한 역할을 하였다고 할 것이며, 명종 승하 후에 국정을 잘 운영하여 선조 초년에 변고가 없게 되었으니 이 또한 이준경의 현명하고 어짊을 알 수 있다.

그때에 명나라 사신 한림 검토(翰林檢討) 허국(許國)과 병부 급사(兵部給事) 위시량(魏時亮)이, 새로운 황제가 등극한 조서를 반포하려고 조선으로 오다가 안주(安州)에 이르러 대행왕(大行王 명종(明宗))의 부고를 듣고, 국중에 변고 있을까 의심하여 역관에게,

“전왕이 아들이 있는가.”
하고 물으므로,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니, 또,

“수상이 누구인가.”
하고 물었다.

“이준경입니다.”
하고 대답하니,

“나라 사람들이 어진 사람이라 하여 믿는가.”
하고 물었다.

“어진 정승으로 본래 덕과 도량이 있어 나라 사람들이 믿습니다.” 하였더니,

“그러면 염려 없겠군.”

하였다. 두 사신이 서울에 들어와 이준경의 거조가 화평하고 조용하며 국사가 정돈되어, 길사와 흉사가 병행되어도 하나도 예절에 어긋남이 없는 것을 보고 서로 돌아보며 탄복하여,

“나라에 어진 정승이 있는 것이 어찌 중대하지 아니한가.”

하였다. 뒤에도 허국이 매양 우리나라 사람을 만나면 이 정승의 안부를 물었다.

동고행장

 

후사를 확고히 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왕의 갑작스런 죽음은 필연적으로 후계자 옹립을 둘러싸고 다양한 이해 계층들의 마찰이 표면화되기 십상이라, 변란이 종종 발생한 것은 역사가 잘 보여준다. 그러하기에 명나라의 사신들이 변고를 근심한 것이고 수상이 어떤 인물이며 그에 대한 백성들의 평가가 어떠한가를 물어보는 것 또한 당연한 조치인데, 그들은 수상인 이준경이 백성들의 신망이 도탑다는 것을 알고 서울로 하행하여, 이준경이 명종의 상과 선조의 등극을 모두 원만하게 잘 처리하고 있음을 알고 심히 놀랐다는 내용이다.

선조 초년의 원로대신이었던 이준경과 이이는 서로 알력관계였다고 하는데, 양현 사이에 간극이 생기게 된 데에 대해 <연려실기술>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기사년(1569) 9월에 이준경이 임금을 모시고, 을사년 일에 말이 미쳐서,

“위사(衛社)할 때에 착한 선비가 혹 연좌되어 죽은 자 있어서, 그 슬픔이 지금까지 가시지 않았습니다.”

하고 말하니, 교리 이이(李珥)가,

“대신의 말이 어찌 그리 모호해서 불분명합니까. 위사라는 것은 허위의 훈공이요, 그때에 죄받은 사람들이 모두 착한 선비들이었습니다. 간흉들이 사림을 도륙하고 위훈(僞勳)을 날조하여 녹하였으므로 귀신과 사람의 분노가 오랫동안 풀리지 않았습니다. 이제 새 정치의 시작을 당하여 마땅히 그 훈공을 삭탈하여 명분을 바로 세우고 국시(國是)를 정하여야 합니다.”

하였다. 이준경이,

“말인즉 그렇지만, 선조(先朝) 때 일을 갑작스레 고칠 수도 없는 것입니다.”

하니 이이가,

“그렇지 않습니다. 명종께서 어리신 나이로 왕위에 올라 비록 간흉들에게 속임을 당하였으나, 이제는 하늘에 계신 선왕(先王)의 영령이 그 간사한 것을 통곡하시었으니, 비록 선조 때 일이라 하여도 어찌 고치치 못하겠습니까.”

하였다. 이보다 먼저 백인걸(白仁傑)이 매양 이준경을 보고 이이가 현인(賢人)이요, 또 재주는 쓸 만하다고 칭찬하였더니, 이때에 이이가 두 번이나 이준경의 말을 꺾으니, 이준경이 좋아하지 아니하여 백인걸에게 말하기를,

“자네의 이이가 어찌 그리 경솔하게 말하는가.”

하였다.

 

선조 즉위 후에 을사년의 원통함을 풀고 을사년의 위훈(僞勳)을 삭제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신중론을 편 이준경에 대해 이이가 직접적으로 반대함으로 하여, 이준경이 백인걸에게 “자네의 이이가 어찌 그리 경솔하게 말하는가.”라고 하여 비판하면서 양현 간에 틈이 벌어지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이준경과 이이가 등지는 데에는 개인적인 마찰과 불만 등 여러 가지 사연들이 있었겠지만 혹시 도학자를 자처하는 당시의 젊은 관료들에 대한 노정치가의 비판적 시각이 가미되었다면 너무 지나친 해석일까?

준경은 진실로 어진 정승이어서 그 공적이 국가에 있으므로 이이도 전부터 일컬어 왔었다. 그러나 그 높고 교만한 성질은 도학(道學)하는 선비를 좋아하지 아니하여 심지어 이황(李滉)을 가리켜 산금야수(山禽野獸)라고까지 하였으니, 퇴계의 나오기 어려워하고 물러나기 잘하는 것이 산새나 들짐승처럼 길들이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 식견의 고루함이 이와 같았고, 그 최후 상소의 뜻은 붕당을 타파하자는 데에 있었으나 결과적으로는 임금으로 하여금 사림을 지나치게 의심하는 마음이 생기게 한 것뿐이었다. 그때는 기묘ㆍ을사년의 화를 겪은 뒤이므로 이준경의 그 말을 듣고 한심스럽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어 이이가 소를 올려 힘껏 변명하지 아니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준경이 유차에서 붕당 조짐론을 제기한 것에 대하여 이이가 반박하는 소를 올린 내력을 설명한 이 글에서, 눈에 띄는 대목은

“도학(道學)하는 선비를 좋아하지 아니하여 심지어 이황(李滉)을 가리켜 산금야수(山禽野獸)라고까지 하였다”

는 대목이다. 이준경이 실제로 퇴계를 산금야수라고 지칭했는지는 모르지만 이른바 도학 선비들에 대해서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국정을 이끌어온 노 정치가의 경륜에 비추어 봤을 때 명분과 의리에만 매달리는 것은 경솔한 것으로 보였을 것이고 이런 맥락에서 도학하는 선비들을 좋아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