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형이 냉주(冷酒)를 마신 사연은?

야사(연려실기술)를 통한 스토리텔링 15

이덕형이 냉주(冷酒)를 마신 사연은?

 

‘혼조삼이(昏朝三李)’라는 말은 광해조 치세 기간에 오리(梧里 이원익), 필운(弼雲 이항복), 이덕형을 아울러 일컬은 말로, 충성을 다한 것이 같고 참소를 입은 것도 같기 때문이다. 특히 이항복과 이덕형은 오성과 한음으로 잘 알려진 유명한 죽마고우이다.

토정 이지함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이지함의 조카이자 당대의 유명한 정객이었던 이산해의 사위이기도 한 이덕형은 31세에 대제학에 오르고 38세에 재상에 올랐는데, 이른 나이에 고위에 오른 것에 대한 일화가 <연려실기술>에 나온다.

 

신묘년(1591)에 예조 참판과 대제학에 초탁(超擢)되니, 공의 나이는 31세였다. 인망과 실적이 모두 높아 노사(老師)들이 모두 팔짱을 끼고 양보하였다. 조정에서 대제학을 회천(會薦)함에 미처 공이 홀로 권점 하나가 적자 당(堂)에 가득 찬 사람들이 놀라,

“이게 어찌된 일이냐?”

하니, 김귀영(金貴榮)이 웃으며 말하기를,

“노부(老夫)의 소위이다.”

하였다. 사람들이 놀라 실색하니, 김귀영이 서서히 말하기를,

“나이는 젊은데 지위가 너무 이르니, 재주가 노성하고 덕이 익기를 조금 기다리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였다. 공이 듣고 흔연히 기뻐하니, 선비들 공론이 양쪽을 모두 아름답게 여겼다.

 

김귀영이

“나이는 젊은데 지위가 너무 이르니, 재주가 노성하고 덕이 익기를 조금 기다리는 것이 어떻겠는가.”

라고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대제학이란 문형을 담당하는 자리로 노사숙유들도 감당하기 어려운 자리인데 31세에 초탁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인망과 실적이 모두 높아 노사(老師)들이 모두 팔짱을 끼고 양보할 정도로 탁월했다고 하니 그 조숙원만의 경지를 충분히 헤아릴 만하다.

또한 38세에 재상에 오른 데에도 역시 일화가 전해온다.

 

양호(楊鎬)는 나이가 젊고 기(氣)가 날카로워 천하의 선비를 경시하고 번번이 기세로써 사람을 압도하니,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임금이 공에게 접대하도록 명하였는데, 양호가 한번 보고 감복하여 매우 재능을 인정하고 남달리 생각하여 말하기를,

“이덕형은 비록 중국 조정에 있더라도 예복을 입고 묘당에 있을 사람인데 아직 일반 관직에 있으니 이상하다.”

하였다. 임금이 듣고 바로 정승에 임명하니, 나이 38세였다.

 

이덕형이 재상에 오른 데에는 양호의 높은 평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는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명나라 어사 양호(楊鎬)를 설복해 서울의 방어를 강화하는 한편, 스스로 명군과 울산까지 동행하여 그들을 위무(慰撫)하였는데, 그 해에 우의정에 승진하였다. 기록을 보면 양호가 남을 허여하는 기상이 별로 없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이덕형을 높이 평가했다는 것은 출중한 이덕형의 재능과 기상을 여기서도 알 수 있다.

유성룡의 제자로 유학에 밝고 시강(侍講)으로 이름이 높았던 정경세는 이덕형의 재능과 인품을 이렇게 적고 있다.

 

공은 정신이 뛰어나고 밝으며 풍도가 엄정하여 나이 20살이 되기 전에 사람들이 정승이 될 그릇으로 기대하였다. 타고난 자질이 매우 높고 뛰어났으나 겸손하고 근신하여 스스로를 낮추어 일찍이 한 터럭만큼도 자랑하거나 높은 체하는 기색이 없었다. 평소에는 아주 무능한 것 같았으나 일을 만나면 영특한 기운이 분발하였다. 조정에 선 지 34년 동안 일신을 돌보지 않고 힘을 다하였으며 평탄하고 험한 것을 가리지 않아서 마침내 중흥의 대업을 도와서 이룩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자신을 부족하다고 보아 공이 있다고 자처하지 않았고, 사람들과, 더불어 접할 때에는 웃는 얼굴에 온화한 기운이 상대에게 스며들었다. 《우복집(愚伏集)》

일찍 출세하게 되는 경우 초년의 조신한 마음을 잃어버리고 자고하기 쉬운데 타고난 자질이 매우 높고 뛰어났음에도 겸손하고 근신하여 스스로를 낮추어 일찍이 한 터럭만큼도 자랑하거나 높은 체하는 기색이 없었고 평소에는 아주 무능한 것 같았으나 일을 만나면 영특한 기운이 분발했다는 말은 이덕형이 장덕군자(長德君子)임을 잘 보여준다.

광해 치세 기간은 혼조라고 칭하는데, 특히 폐모사건은 효도를 근간으로 하는 조선의 유교사회에서는 기강을 밑둥에서 부터 흔드는 대사건으로 용납하기 어려운 점이 많았다.

8월에 용진(龍津)으로 돌아가니, 이때 나이 53세였는데 병을 얻어 날로 심해져서 마침내 일어나지 못하였다. 이제 와서 크게 한이 되는 것은 모후(母后)를 폐하려는 논의가 일어나자, 명보(明甫)가 급히 공격하려는 것을 내가 때를 기다리려고 하여, 마침내 명보가 나의 의논을 좇아 중지하였던 것이다. 내가 먼저 패하여 물러나자 명보가 고립되어 할 말을 다하지 못한 채 그대로 죽어서 지사(志士)로 하여금 천추에 눈물을 떨어뜨리게 하였으니, 내가 명보를 그르침이 많았도다. <묘지>

 

이항복이 조정을 떠나고부터 공이 더욱 외로워서 의지할 데가 없었다. 국사를 생각하고 임금에게 누를 끼칠까 우려하여 매양 집으로 돌아와서는 천창만 쳐다보며 소리 없이 울고, 음식을 물리치고 올리지 못하게 하며 오직 냉주(冷酒)만 찾아 즐길 뿐이었다.

 

이덕형이 53세로 천수를 다 누리지 못하고 생애를 마친 데에는 음식을 물리치고 냉주만을 찾아 즐겼다는 기사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냉주를 마신 것은 화를 가라앉히려는 심사였을 것이니

“국사를 생각하고 임금에게 누를 끼칠까 우려하여 매양 집으로 돌아와서는 천창만 쳐다보며 소리 없이 울었다”

는 것에서 그 대강을 헤아릴 수 있을 것이며, 더욱 이 슬픔과 고통이 가슴에 사무친 데에는 외롭고 의지할 곳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게 바로 죽마고우 오성 이항복이 조정을 떠난 후라고 한다. 사무치는 우정을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