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어에 능통한 이원익


야사(연려실기술)를 통한 스토리텔링 14

중국어에 능통한 이원익

 

원익의 인품과 덕망을 인상 깊게 표현한 글이 <연려실기술>에 실려 있다.

영남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원익(李元翼)은 속일 수는 있으나 차마 속이지 못하겠고, 유성룡은 속이려고 해도 속일 수 없다.”

고 하였다. 《회은집(晦隱集)》

유성룡은 속이려고 해도 속일 수 없는 반면에 이원익은 속일 수 있으나 차마 속이지 못한다는 영남 사람들의 인물평에서 이원익의 온화하고 넉넉한 인품이 그대로 묻어난다. 무엇 때문에 그리하였을까. <연려실기술>의 다른 기록은 이러하다.

 

공의 도량이 정하고 밝으며 겉과 속이 순수하며 한결같고 평소의 말과 기색이 온화하며 얼굴빛과 웃는 모습이 사랑스러웠으나 일을 당해서는 우뚝하여 움직이지 않는 산악과 같았다. 벼슬살이를 하고 있거나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는 순전히 시서(詩書)를 응용하고 고사(古事)를 참고하니 자연히 이치에 부합하였다. 어떤 재상이 사람에게 말하기를,

“누가 오늘날 성인이 없다고 하는가. 완평(完平)은 참 성인이다.”

하였다. 일이 많은 때를 당하여 조정에 큰 의논이 있으면 반드시 공의 한 마디 말을 기다려서 결정하였다. 오성(鰲城 이항복)이 일찍이 말하기를,

“나는 매사를 수반(首班)의 재결에 따라 행한다.”

하였고, 상촌(象村) 신흠(申欽)이 공과 같이 또한 정승으로 있었는데 역시 그렇게 말하였으며, 공 또한 이오성을 일컬어 반드시,

“위인이다.”
라고 말했다. 이창석(李蒼石)의 말

 

이항복과 신흠이 누구인가. 당대의 명유이자 웅재들이 아닌가. 그러한데 이들이 모두 이원익의 재결을 기다린다고 하였으니 그 실질을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다. 이는 모두 이원익이 순리에 따라 천연스럽게 매사를 처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리라. 게다가 이원익은 청백리의 표본이었으니 청렴절개를 숭상한 조선의 선비들의 표상으로 전혀 손색이 없었다.

 

늙었다는 이유로 퇴임을 청하니 인조가 허락하지 않았다. 정묘년(1627) 가을에 향리로 돌아가게 해 줄 것을 청하니, 술을 하사하여 전송하고 해사(該司)로 하여금 흰 이불과 흰 요를 주게 하여 검소한 덕을 표하며 이르기를,

“평생의 검소함은 경의를 표할만하다.”

하고 승지를 보냈다. 승지가 복명(復命)하니, 임금이 그 거처에 대해 묻자, 대답하기를,

“초가집이 쓸쓸하였고 비바람도 못 가리는 형편이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정승이 된 지 40년인데 초가 몇 칸뿐이냐.”

하고 본도 감사로 하여금 정당(正堂)을 지어서 주도록 하였다.

 

갑술년에 죽으니 임금이 도승지 이민구(李敏求)를 보내 조문하도록 하였다. 민구가 회계(回啓)하기를,

“영중추부사의 상사(喪事)인데 집이 가난하여 모양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니, 관재(棺材)의 여러 도구를 보내도록 명하였다. 세자가 가서 조문하고, 백관이 회곡(會哭)하고, 도성의 백성과 어른들도 회곡하였다.

 

선조 치세에 알려진 명현들은 대개가 임진왜란의 국난을 겪은 후에 그 명성이 높아진 것이니, 난리를 타개하고 국가의 안위를 도모하는 데에는 위국충정의 절의와 영인이해(迎刃而解)의 웅재 중에 하나라도 결핍되어서는 성취하기 어렵다.

이원익의 절의는 어떠한가. 조선시대 4대 문장가의 한 명으로 뽑히는 이식은 이렇게 쓰고 있다.

 

공이 세 임금을 차례로 섬기는 동안 시종 한 마음이었으며, 충성과 공로는 전란 중에 드러났고 절의는 혼란한 때에 나타났다. 우리 임금을 도와서 국운을 새롭게 하였으니 공로는 사직(社稷)에 있고, 도(道)는 강상(綱常)을 붙들었다. 이는 그가 수립한 큰 것이요, 그 편안하고 고요한 뜻과 청백한 절조와 집을 이은 효성과 나라를 위해 힘을 바친 근로와 의논의 바름과 행의(行義)의 갖춤으로 말하면 뚜렷하게 사람들의 이목에 남겨진 것이 구비(口碑)와 같았다.

택당집(澤堂集)》

 

절개와 의리를 시사에 펼치기 위해서는 일을 도모하고 대사를 경륜할 수 있는 능력을 겸비해야 하는데, 이원익이 일찍이 과거시험에 합격한 후에 중국어를 공부한 데에서도 이를 십분 알 수 있다.

 

공이 처음에 과거에 급제하자 한어(漢語)를 익혀 전심하여 공부하였다. 뒤에 임진년을 당하여 명나라 군사가 나오니 사신의 왕래가 빈번했는데, 역관들이 이해하는 것은 불과 물이나 또는 춥고 더운 인사 정도뿐이라 피차의 뜻이 백에 하나도 통하지 못하였다. 공이 이때 평안 감사가 되어 응접하고 수작하는 데 조금도 막힘이 없으니 명나라 장수가 크게 기뻐서 말하기를,

“이 사람이 한인이 아니냐.”

하였다. 공이 처음에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가서 사신과 예부 관원이 만날 때에 통역하는 자가 말을 바꾸어 요구하는 일이 있었으니, 사신이 중국어를 해득하지 못하는 줄로 생각했던 것이다. 공도 묵묵히 모르는 체 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산해관(山海關)에 이르러 중국의 유학자를 만나 경사(經史)를 토론하는데 문답이 물 흐르듯 막힘이 없는 것을 보고 통역이 땅에 엎드려 머리를 숙이고 말하기를,

“죽어도 죄를 갚을 길이 없습니다. 제발 한 가닥 목숨을 빕니다.”

하니, 공이 또한 묵묵히 답이 없었다. 정승이 되어 사역원 도제조를 겸대하여 모든 역원의 문안(文案)을 모두 한어로 품정(稟定)하니, 이로 인하여 사람들이 모두 스스로 힘써 일하게 되어 크게 국가의 쓰임이 되었다. 《공사견문

 

일찍이 중국어를 익혀 역관의 도움에만 의지하지 않고 국난의 때에 중요한 일을 처리하는데 긴요하게 사용하였으니, 실무를 겸한 공의 준비 정신이 놀라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