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장입상(出將入相)의 정언신


야사(연려실기술)를 통한 스토리텔링 13

출장입상(出將入相)의 정언신

 

언신은 기축옥사의 피해자이다. 기축년(1589)에 우의정이 되어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고변 후에 옥사를 다스리는 위관(委官)에 임명된다. 그러나 정여립의 구촌친(九寸親)이어서 공정한 처리를 할 수 없다는 탄핵을 받아 위관을 사퇴하고 이어서 우의정도 사퇴하였는데, 그 뒤 역가문서(逆家文書) 가운데에 이름이 있다는 이유로 정철 등으로부터 정여립의 일파로 모함을 받아 남해에 유배되었다가 투옥되었다. 사사(賜死)의 하교가 있었으나 감형되어 갑산에 유배되었다가 그 곳에서 죽었다(1591) 그리고 8년 후 1599년에 복관되었다.

정언신은 원래 문무를 겸한 출장입상의 기국을 넉넉히 갖춘 유자였다. <국조인물고> ‘相臣’ 조에 조경이 지은 정언신의 비명에 대략이 나와 있다.

 

만력(萬曆) 기묘년(己卯年, 1579년 선조 12년)에 사간(司諫)에서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승진하였다가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전직되었다. 특별히 가선 대부(嘉善大夫)로 승진하여 함경도 절도사(咸鏡道節度使)가 되었다. 이는 대체로 공이 문무의 재능을 겸비하여 금중(禁中)에서 장수감으로 비치해 놓은 지 오래되었기 때문이었다. 공이 부임하자 변방의 업무를 조사하여 열 가지 중에 하나도 빠뜨리지 않았다. 변방의 백성들과 가까이 접하여 생활하여 위엄과 은혜가 병행되었으니, 망루(望樓)가 정비되고 군진(軍陣)이 성대한 것은 말할 것조차도 없었다. 또 남은 힘으로 녹둔도(鹿屯島)와 구탈지(甌脫地)에다 둔전(屯田)을 시작하여 해마다 큰 풍년이 들었는데, 군사가 배부르고 말이 살찐 것이 실로 여기에 말미암았다고 한다. 번방에 귀화한 호인(胡人)들이 또한 공의 은혜와 신의를 사모하여 아들을 낳으면 공의 성명으로 이름을 지어 마치 가부(賈父)와 같이 하였다. 임기가 차자 조정으로 들어가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임명되었다가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옮기었고 다시 부제학(副提學)에 임명되자 사임하였다.

 

계미년(癸未年, 1583년 선조 16년)에 이탕개(泥湯介)가 변새를 몰래 침범하여 보(堡)를 집어삼켰다는 급보가 전해지자 조정의 의논이 모두 공을 추대하였으므로 공을 우참찬(右參贊)으로 발탁하여 함경도 도순찰사(咸鏡道都巡察使)를 겸임시키었다. 공이 곧바로 경기(京畿)의 부절을 풀어놓고 출정하기 전에 하직 인사를 드리니, 임금이 운검(雲劒)을 하사하여 여러 장수들을 독려하도록 하였다. 공이 도성의 문을 나가기 전에 위엄의 명성이 이미 북변에 퍼졌다.

옛날 허 충정공(許忠貞公, 허종(許琮))이 도순찰사로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였을 때 또한 운검을 하사받았는데, 공은 허씨의 외손이므로 그 일을 아는 사람들은 대부분 탄식하며 기이한 일이라고 하였다. 공이 북관(北關)으로 들어가 여러 장수들을 모아놓고 일을 분담시켜 삼군(三軍) 중에 추위에 떠는 사람은 솜옷을 입히니, 겁쟁이는 용맹스러워지고 교만한 자는 두려워할 줄을 알았다. 이에 호령을 엄숙하게 하고 상벌을 반드시 믿게 하니, 싸우지 않고도 적병의 잔당들이 죽기로 갑자기 멀리 달아나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공이 또 사람을 잘 알아보았는데, 공의 막하에 들어간 이순신(李舜臣)ㆍ신입(申砬)ㆍ김시민(金時敏)ㆍ이억기(李億祺) 같은 사람들은 모두 명장(名將) 중에 으뜸간 장수였다.

 

<연려실기술>에 기록된 내용들은 조경의 비명을 전재한 것으로, <국조인물고>에는 조경의 신도비 전문이 실려 있다. 당시 정언신의 막하에 이순신(李舜臣)ㆍ신입(申砬)ㆍ김시민(金時敏)ㆍ이억기(李億祺) 같은 명장(名將) 들이 즐비했다는 것은 그가 인재를 발탁하는 높은 안목의 소유자였음을 알려준다.

조경은 정언신의 인품과 풍모를 손에 잡힐 듯 써놓았는데 대강은 다음과 같다.

 

공은 피부가 희고 키가 크며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수염이 신(神)과 같아 돌아보면 무리에서 뛰어났다. 가정의 행실이 천성으로 타고나 어머니 상(喪)을 당하여 3년간 시묘(侍墓) 살이를 하면서 조석으로 제전(祭奠)을 드리되, 몸소 밥을 짓고 노복을 시키지 않았다. 귀하게 되어 관사에서 땔나무를 가져온 것을 보면 반드시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옛날에는 어버이 방에 불을 제대로 때지 못하였는데, 지금 땔나무가 있으니, 어버이가 계시지 않는다.”

고 하였다. 종손(宗孫)이 가난하여 가정살림을 꾸리지 못하자, 자신의 녹봉을 떼어주고 사당(祠堂)을 지어주었다. 백형(伯兄)과 중형(仲兄)을 사랑과 공경을 다하여 섬기면서도 과실이 있으면 반드시 규계(規戒)하였으며, 그들의 노복을 한결같이 자신의 노복처럼 거느렸다. 그리고 집에 있을 때 검소한 것을 좋아하여 의복과 거마(車馬) 그리고 차린 음식이 모두 소박하여 화려한 것이 없었으며, 부인의 예복(禮服)을 지을 적에도 겨우 올이 가는 베만 지급할 뿐이었다.

부인과 공이 백발이 되도록 서로 격려하였고 첩을 대하고 궁한 일가를 도와줄 줄 적에 하나도 공의 뜻에 순종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공이 충성과 능력을 다 쏟아 조석으로 국사를 보느라 가정에서는 문서를 보지 않고 가산을 조금도 불리지 않았는데, 부인의 내조(內助) 또한 많았다고 한다. 그 당시에 공을 비방한 자들이 백 대의 수레에 실을 정도뿐만이 아니었으나 감히 재화를 좋아했다고 덮어씌우지 못하였다. 공이 일생 동안 청렴하게 산 바가 어찌 옛 초(楚)나라 승상 손숙오(孫叔敖)에게 손색이 있겠는가?

정언신에 대한 기사는 대략 정여립 기축옥사에 관련되어 무고하게 죽었다는 것이 보통이지만 어찌 정언신의 공적과 인품이 기축옥사에만 국한되어 알려질 것밖에 없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