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9단(?) 이산해


야사(연려실기술)를 통한 스토리텔링 12

정치 9(?) 이산해

 

산해는 광해조의 실정과 폐륜에 적극 가담한 대북의 영수였다. 조선 역사에서 광해는 인조반정으로 실권하여 왕이 되지 못한 임금이었기 때문에 그 정권에 참여한 유신들은 이른바 부역자로 낙인찍혀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정철이 기축옥사의 위관을 담당하게 된 데에는 선조의 적극적인 후원과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축옥사 후에 선조는 태도를 일변하여 정철에 대한 신뢰를 거두어들이게 되는데 그 계기가 건저문제이다. 애초에 이산해의 발의에 정철과 유성룡이 그 필요성을 동감하여 때를 잡아 선조에게 상신하기로 했는데, 이산해는 이를 정철을 포함한 서인파를 내몰 수 있는 좋은 기화로 삼았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연려실기술>에 이렇게 적혀 있다.

 

산해는 공량과 술 마시기로 약속하고, 먼저 그의 아들 경전(慶全)을 공량의 집에 가게 하였다. 조금 뒤에 이산해의 종이 급히 달려가서 경전에게 고하기를,

“대감이 막 오시려 하다가 별안간 어떤 소문을 듣더니, 문을 닫고서 눈물만 흘리고 계시니, 어찌 된 연유를 모르겠나이다.”

하니, 경전이 놀라 일어나서 급히 갔다가 곧 돌아와서 말하기를,

“부친께서, ‘정 정승이 장차 세자 세우기를 청하고 이어서 신성군 모자를 없애버리고자 한다.’는 것을 들으신 까닭에 어찌할 줄을 모르십니다.”

하였다. 이에 김공량이 즉시 김빈에게 달려가서 그 말을 고하니, 김빈은 임금 앞에서 울면서 하소연하기를,

“정 정승이 우리 모자를 죽이려 한다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무슨 까닭에 너희 모자를 죽인다더냐.”
하니, 김빈이,

“먼저 세자 세우기를 청한 뒤에 죽인다고 한답니다.”

하여, 임금이 이로써 의심을 가지게 되었으나 정철은 모르고 있었다. 뒷날 경연에서 정철이 먼저,“세자를 세워야 한다.”는 의논을 꺼내자 임금이 크게 노하니, 영상 이산해는 벙어리처럼 아무 말 없이 움츠리었고, 유성룡도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는데, 다만 부제학 이성중(李誠中)ㆍ대사간 이해수(李海壽)가 아뢰기를,

“이 일은 정철만이 홀로 하는 말이 아니라 신 등도 모두 같이 의논한 것입니다.”

하였다. 정철은 이때부터 선조에게 미움을 크게 받았다.

송강년보(松江年譜)〉 《일월록

 

이 기록에 의하면 이산해는 음험한 정치 술수가로 명종 연간의 윤원형이나 이기와 별반 다를 바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산해는 신동이었다. 당대의 세도가 윤원형이 소년 천재를 사위로 맞이하려고 해서 아버지 이지번이 벼슬을 버리고 숙부 이지함과 함께 단양의 구담(龜潭)으로 피신해서 숨어살았다고 한다.

 

처음 태어났을 때, 계부(季父) 지함(之菡)이 우는 소리를 듣고 큰 형 지번(之蕃) 공의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이 아이가 기이하니 꼭 잘 보호하여 기르십시오. 우리 가문이 이로부터 다시 흥할 것입니다.”

하였다. 5세 때 처음 병풍에 글씨를 썼는데 붓질이 귀신같아서 신동이라고 일컬었다. 일찍이 먹물을 발바닥에 바르고 종이 끝에 눌러서 어린아이의 발자국인줄 알았다. 13세에 충청 우도 향시(鄕試)에 장원하였다.

죽창한화(竹窓閒話)》

 

나면서부터 특이한 자질이 있어 말을 하기 전에 이미 글을 알았다. 집에 동해옹(東海翁)의 초서(草書)를 벽에 걸어 놓은 것이 있었는데, 유모를 잡아끌어 앉혀서 보고 손으로 가리키며 좋아하였다. 5세에 비로소 계부 토정(土亭)에게 배웠는데, 토정이 태극도(太極圖)를 가르치니, 한마디에 천지 음양(天地陰陽)의 이치를 알고 도(圖)를 가리키며 논설하였다. 일찍이 글을 읽으면 밥 먹는 것도 잊었다. 토정이 몸을 상할까 염려하여 독서를 중지하게 하고 먹기를 기다리니, 공이 시를 짓기를,

“배 주리는 것도 민망커든 하물며 마음이 주림이랴 / 腹飢猶悶況心飢, 먹기를 더디하는 것도 민망커든 하물며 공부가 더딤이랴 / 食遲猶悶況學遲, 집은 가난해도 마음 다스릴 약은 있으니 / 家貧尙有治心藥, 모름지기 영대(靈臺마음)에 달 뜰 때를 기다리소서 / 須待靈臺月出時”

하였다. 토정이 더욱 기특히 여겼다.

 

6세에 능히 큰 글자를 썼는데, 붓을 쥐고 엉금엉금 기면서 글씨를 쓰면 자형(字形)이 장위(壯偉)하여 용이 잡아끌고 범이 움켜잡는 형상과 같았다. 일시에 이름난 벼슬아치들이 모두 그 필적을 구하였고 신동으로 지목하였다.

 

이산해의 평가는 긍정적인 평가와 부정적인 평가가 실타래처럼 얽혀있지만 대체적으로 당파로 갈리기 이전의 행적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가 많고 당파로 갈린 이후에는 부정정인 평가가 많다. <연려실기술>에서 그 대강을 엿볼 수 있다.

 

대사헌 이이가 경연에서 임금에게 아뢰기를,

“산해가 평소 벼슬을 할 때에는 다른 사람보다 나을 것이 없었는데, 이조 판서가 되자 모두 공의(公議)에 좇고 청탁을 행하지 않아 뜰 안이 쓸쓸하기가 가난한 선비의 집 같고, 다만 듣고 본 착한 선비로서 벼슬길을 맑히는 것만을 마음에 두고 있으니, 이같이 몇 년만 해나간다면 세상 풍속이 거의 변화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산해가 재기(才氣)가 있으나 능력을 자랑하는 의사가 없기에 내가 일찍이 유덕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였다. 《석담일기》

 

선조가 일찍이 공을 칭찬하기를,

“말은 입에서 나오지 못할 것 같고 몸은 옷도 이겨내지 못할 것 같으나, 한 덩어리의 참된 기운이 속에 차고 쌓여서 바라보면 존경심이 생긴다.”

하였다. 공이 사직 상소에 비답하기를,

“경이 이조 판서가 되면 문 밖에 새 그물[雀羅]을 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23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맑고 훌륭한 벼슬을 역임하였는데, 자못 청렴하고 근신하여 한때의 인망을 얻었다. 이미 정승에 오르자 지위를 잃을 것을 우려하는 마음이 생겼다. 김공량(金公諒)이란 자는 인빈(仁嬪)의 아우였다. 인빈은 후궁 중에 가장 총애 받았기 때문에 산해가 종처럼 공량을 섬겨 지위를 굳히려고 어두운 밤에 찾아가 애걸하며 등창에 고름을 빨아 주는 것도 사양하지 않으니, 마침내 청의(淸議)에 죄를 얻었다. 임진왜란 때 수상으로서 서도로 파천할 것을 건의하였다. 대가(大駕)가 서도로 간 뒤에 공론을 좇아 평해(平海)로 귀양 보냈으나 임금의 사랑은 변하지 않았다. 을미년(1595)에 정탁(鄭琢)이 석방하여 돌아오게 할 것을 청하였으니, 임금의 뜻을 맞춘 것이다. 산해가 다시 정승으로 들어오려고 하는데 당시에 유성룡(柳成龍)이 집권하고 있으면서 저지하자, 산해의 원한이 골수에 사무쳐서 그 일당과 더불어 성룡을 제거할 것을 꾀하다가 임술년(1622)에 이르러 드디어 성룡을 쫓아내고 대신 정승이 되어 조정을 혼란스럽게 하였다. 이에 임금이 깨닫고 도성 밖으로 쫓아내도록 명하고 10년 동안 부르지 않았다. 《부계기문》

 

<부계기문>의 저자 김시양은 당색이 서인이니 이산해에 대한 반감이 깔려있음을 주의할 필요는 있지만, 정철을 몰아낸 건저사건이 이산해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의 중요한 전환점임을 알 수 있다. 김공량은 당시 선조의 총애를 받고 있던 김빈의 아우로서, 이산해가 아들 이경전을 통하여 모사를 꾸며 건저문제로 정철을 귀양 보내는데 등장하는 인물이다. 이산해는 원래 정철과 친구 사이였지만 대략 기축옥사를 통하여 동인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정철에 대한 원한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동서의 분당과 다시 동인의 남북 분당이라는 정치적 소용돌이의 한 가운데에서 있으면서 매번 당의 영수 역할을 수행했던 이산해였기에 그에 대한 평가는 정치적인 조명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진짜 살림살이는 어떠했는지 궁금하다.

타향에 우거하고 있을 때, 혹 한 필의 말과 동자 한 명을 데리고 산수를 왕래하면서 때로 풍경을 대하여 흥취를 붙이고 회포를 풀어 문득 시(詩)로 나타냈는데, 글씨가 떨쳐나가고 날아 움직여 자득(自得)한 것이 많았다. 또 수묵화(水墨畵)를 잘 그렸으나 남에게 보여주지 않았고, 때로 고화(古畵)를 만나면 정신이 통하여 감상하였다. 글을 볼 때 능히 열 줄을 한꺼번에 내려보았으나, 또한 일찍이 독서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어려서부터 명망이 있었으며 일찍 정승의 반열에 이르렀으나 집 한 칸 밭 한 자리가 없어서 항상 셋집을 얻어 살았기 때문에 쓸쓸하고 어려운 살림이었다. 손님이 오면 간혹 말 언치[馬]에 앉기도 하고, 비가 오면 자리로 비새는 곳을 가렸으며, 헤진 옷과 거친 음식으로도 항상 편안히 살았다. 모두 이한음(李漢陰)이 지은 묘지(墓誌)이다.

 

건저사건을 통하여 정철을 제거했다하여 요즘 역사평론가들에게 정치9단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실상 소년 천재로서 문장, 음율, 시화에 탁월한 조예를 간직한 정객 이산해의 진짜 모습은 산수를 즐기며 안분자족한 삶을 추구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결국 정치의 소용돌이를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