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공사삼일(朝鮮公事三日)과 유성룡


야사(연려실기술)를 통한 스토리텔링 11

조선공사삼일(朝鮮公事三日)과 유성룡

 

성룡은 임진왜란을 극복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재상으로, 당시의 상황을 징비록(懲毖錄) 으로 남겼다. ‘징비’란 <시경> ‘소비편(小毖篇)’의 “내가 징계해서 후환을 경계한다(予其懲而毖後患)”라는 구절에서 딴 말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유성룡은 임란 전에 이이가 국방강화책으로 제시한 10만 양병설을 반대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연려실기술>에 기록이 있다.

 

일찍이 경연 중에서,

“미리 10만 군병을 양성하여 급할 때에 대비해야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10년을 넘지 못해 장차 흙이 무너지듯 어쩔 수 없는 화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유성룡(柳成龍)이 말하기를,

“무사할 때 군사를 기르는 것은 화(禍)를 기르는 것이 된다.”

고 하였다. 이때는 오랫동안 평안하고 기뻐하던 터이라 경연에 입대(入對)한 신하들이 모두 공의 말을 지나치다고 하였다. 공이 나와서 성룡에게 말하기를,

“국사가 달걀을 포개 놓은 것보다 더 위태롭거늘, 속된 선비는 시무(時務)를 모르는 법이라. 다른 사람에게는 바라는 것도 없지만, 그대도 또한 이런 말을 하는가. 이제 미리 양병하지 않으면 반드시 후회해도 미치지 못할 것일세.”

하고는 근심스러운 빛을 지으며 언짢아하였다. 임진년 뒤에 성룡이 조당(朝堂)에서 여러 정승에게 말하기를,

“당시에는 나도 또한 소요스러워질 것을 우려하여 그르다고 하였는데, 이제 와서 보니 이문성(李文成)은 진짜 성인(聖人)이었다. 만약 그 말을 들었더라면 국사가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겠는가. 또 그 전후의 상소와 차자 속에 진술한 정책을 당시 사람이 간혹 비난하기도 하였으나, 지금 모두 착착 들어맞는 선견지명이었으니, 이는 미칠 수 없는 재주이다. 만일 율곡이 살아 있었다면 반드시 오늘에 능히 뭔가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였다.

<율곡행장>

 

“무사할 때 군사를 기르는 것은 화(禍)를 기르는 것이 된다.”고 이이의 10만 양병설을 반박했던 유성룡이다. 상황은 반복되는 법인가. 임란 전에 통신사로 다녀 온 김성일이 전쟁의 징후를 찾아보기 어렵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쟁을 일으킬만한 위인이 못된다고 보고하자, 유성룡이 만일 진짜로 전쟁이 일어나면 어찌하려고 하느냐고 묻는데, 그의 답이 바로 ‘여론을 소요시킬 것을 걱정하여 그리하였다’라고 했다고 한다. 조정에서 일본의 상황을 살피러 통신사를 파견할 정도였으니 필시 이때는 이이가 양병설을 주장하던 때처럼 징후가 없지 않았을 것이어서 유성룡이 이와 같은 질문을 했을 것이다.

전쟁은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가고 삶을 피폐하게 만들지만 또한 숱한 영웅들을 만들어낸다. 절대 절명의 순간에 위대한 승리를 쟁취하거나 고귀한 희생을 감내한 인물들이 탄생하게 되고 후인들은 애국선열이요 영웅들로 칭송하며 그들의 공덕을 기리는 것이다.

유성룡은 전국토가 병마에 휩싸인 7년간의 그 긴 전쟁 동안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국난을 극복하는데 커다란 기여를 한다.

 

관리로서의 재능이라는 것은 바로 문서를 처리하는 재주이므로 귀하게 여길 것이 없으나 정승으로서 관리로서의 재능이 있는 자는 또한 얻기가 어렵다. 바야흐로 임진년과 계사년에 왜구(倭寇)가 국내에 깔렸고 명나라 군사가 성에 가득해 있던 날에 급한 보고가 한창 교차하고 이문(移文)이 번번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공이 관청에 도착하면 신흠(申欽)이 속필이므로 반드시 붓을 잡으라고 시키고 입으로 부르면 글이 되는데 여러 장의 글을 풍우처럼 빨리 부르므로 붓을 쉬지 않고 쓴 글이지만 한 자도 고칠 것이 없이 찬란하게 문자를 이루었다. 비록 명나라에 보내는 자문(咨文)이나 주문(奏文)이라 할지라도 또한 그러했으니 참으로 기이한 재주였다. 이덕형과 이항복은 그에 버금가는 사람들이다.

상촌휘언(象村彙言)》

 

신흠의 <상촌휘언>을 통해서 유성룡이 재상으로 국정 전체를 주관하면서도 실무적인 능력 또한 출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흠의 말처럼 이는 귀한 재주라 할 것이다. 한편 그의 성품에 대해서 <연려실기술>에 다양한 기록이 남아 있다.

 

공은 타고난 자품이 심히 높았고 영리함이 뛰어났다. 어려서부터 공부할 때에는 정밀하고 마음을 다하며 실천을 위주로 삼고 평상시에는 장엄하고 공경함으로써 스스로를 지켜 종일토록 엄연(儼然)한 자세로 있었다. 비록 집안 자제라 하더라도 일찍이 그 몸을 기대거나 풀어진 모습을 본 적이 없었으나 남을 대할 때 이르러서는 화락하여 마치 화창한 봄기운이 사람에게 덮치는 듯하였다. 비루하고 인색한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고 태만한 기운을 몸에 나타내지 않았기 때문에 대하는 사람이 자연 엄숙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대개 이른바 몸을 예(禮)를 행하는 데 힘써서 한 평생을 마쳤다고 하겠다.

(정우복(鄭愚伏)의 말.)

 

공은 수재(秀才 과거 보기 전 선비로 있을 때를 말함)가 되었을 때부터 원대한 포부를 가졌고,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부귀와 영달을 담담하게 보았고, 항상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업에 뜻을 두었다. 예악과 교화 이외에 군사를 다스리고 재정(財政)을 다스리는 일에 대해 세밀하게 강구하지 않는 것이 없었으며, 재능은 실무에 대응할 수 있고 학문은 사물에 응용할 수 있었다. 특히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는 것으로써 정치를 이루는 근본으로 삼아 매양 입대(入對)할 때마다 깨끗한 한 마음으로 성의를 쌓아 의리를 진술하기를 자세하고 간절하게 하였다. 임금이 대단히 중하게 여기고 여러 번,

“바라보면 자연 경의가 생긴다.”

고 탄복하였다. 명군(明君 선조(宣祖))과 양신(良臣 서애(西厓))이 서로 만난 것은 말세에서 보기 드문 일이었으나, 조정의 논의가 대립되어 칭찬과 훼방(毁謗)이 서로 엇갈려 정책에 써 볼 수는 없었다. 전란을 만나 국가가 위태로운 때에 임무를 받아 노심초사하며 소장과 차자 사이와 일의 시행에 있어 부지런하고 간절하여 국가의 중흥(中興)을 도모한 것은 정원(貞元 당(唐) 나라의 연호) 연간의 육지(陸贄)에 비하더라도 못하지 않았고, 안팎으로 분주하면서 온갖 어려움을 맛본 것은 육지보다 더했으니, 대개 중흥한 여러 신하 중에 공적이 가장 드러났다.

 

유성룡의 마음가짐과 국정에 임한 자세를 한눈에 할 수 있다. 정철이 자신은 허망한 군자지만 유성룡은 근신한 군자라고 평한 기록이 있는데 이 또한 유성룡의 평소의 마음자세와 몸가짐을 잘 알려준다고 할 수 있다.

유성룡이 임란 중에 도체찰사가 되어 행정 공문을 보내면서 그 지시한 내용을 수정하는 과정에 얽힌 일화가 있다.

도체찰사가 되어 여러 고을에 이문을 띄울 일이 있어 글을 지어 역리(驛吏)에게 주었는데 3일이 지난 뒤에 그 이문을 다시 거두고 추가로 글을 고치려고 하니 역리가 문서를 가지고 왔다. 공이 힐난하기를,

“너는 어째서 문서를 받은 지 3일이 되었는데도 여태 각 고을에 나누어주지 않았느냐?”

하니, 역리가 말하기를,

“속담에 ‘조선공사 3일(朝鮮公事三日)’이란 말이 있으니 소인이 3일 후에 다시 고칠 것을 알았기 때문에 오늘까지 지연했던 것입니다.”

하였다. 공이 죄를 주려다가 생각하기를, ‘세상을 깨우칠 만한 말이다. 내 잘못이다.’ 하고, 마침내 그 글을 고쳐서 나눠주도록 하였다.

어우야담(於于野談)》

 

역리가 또다시 수정된 공문이 3일 후에 나올 줄 알고 전송하지 않았는데, 과연 3일 후에 유성룡이 수정된 공문을 파발하고자 했다는 이 일화는 당시 행정 지시의 단면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유성룡이

“세상을 깨우칠 만한 말이다. 내 잘못이다.”

라고 한 대목에서 그가 잘못을 시인하고 고치는데 인색하지 않은 군자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작은 일에서도 반성하고 최선을 다하는 자세로 임했기 때문에 국운이 바람 앞에 촛불처럼 쇠잔한 즈음에 선조와 동심동력하여 국난을 이겨낼 수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