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학을 경책지책(警責之策)으로 사용한 이항복


야사(연려실기술)를 통한 스토리텔링 10

해학을 경책지책(警責之策)으로 사용한 이항복

 

항복이 선조의 신임을 얻는 데는 기축옥사와 관련이 깊다. 기축옥사는 동인과 서인이 화해할 수 없는 선을 넘어간 사건으로 정철은 기축옥사의 위관을 맡음으로 해서 역사의 거센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된다. 한편 이항복은 본 옥사의 처분에 관여하면서 선조에게 자신의 능력을 선보이게 된다. <연려실기술>에는 이항복이 선조의 눈에 들게 되는 연유가 나온다.

 

기축년(1589) 정여립(鄭汝立)의 옥사 때에 문사낭청(問事郞廳)이 되었는데 밝고 민첩하여 임금의 뜻에 맞으니, 임금이 언제나 공의 이름을 부르며,

“이항복으로 하여금 말을 전하게 하라.”

하니 동료들은 팔짱을 끼고 있으면서 감히 그런 대우를 바라지 못하였다. 매양 대신이 죄인들의 형을 결정할 때, 공이 그 사이에서 주선하여 다시 조사하여 죄를 바로잡게 하니 온전히 살아 나온 자가 퍽 많았다. 그 뒤에 일찍이 경연에 입시하자 임금이 특별히 공을 앞으로 불러 문사낭청 때의 일을 말하면서,

“기재(奇才)로다, 기재야.”

하며 극구 칭찬하였다.

<행장>

 

임금이 이르기를,

“지난날 국정(鞫庭)에서 한편으로는 죄수의 문초를 받고 한편으로는 와서 그림자와 메아리처럼 빠르게 아뢰되 털끝만큼도 빠뜨린 것이 없었으니, 다른 사람이 미칠 바가 아니다.”

하였다.

 

당시 옥사는 여러 사람들의 목숨이 달린 일이니 신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굳이 말할 바가 아니지만, 그 안에는 당파의 이해관계와 음모가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공정하면서도 상황을 신속하게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했는데, 이항복은 이 두 가지를 모두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이런 그의 능력이 최고로 발휘된 때가 임진왜란이니, 국가가 풍전등화의 위험에 처해 있을 때 난세의 영웅들이 속출하는바, 이항복은 출중한 재주와 충정을 발휘하여 거의 꺼져가는 조선의 명운을 되살리는데 크게 일조하게 된다.

 

공이 이여송(李如松)의 행군이 기율이 있음을 보고 임금에게 아뢰기를,

“이 군사가 반드시 공이 있을 것이나, 다만 막하에 정동지(鄭同知)와 조지현(趙知縣) 두 사람이 권세를 부리고 있으니 훗날 큰 계획을 막을 자는 반드시 이 두 사람일 것입니다.”

하였다. 벽제(碧蹄) 전투가 불리하게 되자 마침내 화의(和議)하기로 꺾인 것은 정동지와 조지현이 실로 그 꾀를 주장했기 때문이다. <행장>

 

임진년 5월부터 병조 판서가 되었는데 왜적의 대군이 나라에 가득 차 있고 명나라 군사가 수륙으로 몰려들었다. 군사에 관한 일들은 모두 병조로 돌아갔는데 공이 일에 따라서 적당하게 조처하였으며, 항상 예비로 포목 1만 필을 저축하여 급할 때의 수용에 대비하였다. 양호(楊鎬)가 공의 재능과 계책에 탄복하여 언제나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반드시 말하기를,

“이 상서(李尙書 우리나라의 판서를 중국에서는 상서라 한다.)라야 한다. 이 상서라야.”

하였다.

<행장>

 

출병하는 명 장수들의 기세를 보고서도 앞일을 예단할 수 있는 슬기로움과 어려운 전쟁 중간에서도 비상물품을 보관하는 주도면밀함 등을 보자면, 이항복이 임진왜란 동안에 기여한 그 막중한 역할을 가늠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원래 이항복은 해학으로 유명한 분이나 그 해학이 품고 있는 반어적인 표현들은 그냥 웃음으로 끝나지 않는 경책지책이 들어 있다.

잘 알고 있듯이 인조반정에 참여한 인사들의 상당수는 김장생과 이항복의 문하생들이고, 이항복은 정사년에 폐모(廢母)하는 것을 간하다가 북청(北靑)으로 귀양 가서 63세의 일기로 세상을 하직한다. 이는 모두 연산조의 실정과 관련이 깊다.

 

공은 농담을 즐겼다. 일찍이 비변사 회의가 있던 날 공이 유독 늦게 왔으므로 혹자가 말하기를,

“어찌 늦었습니까?”
하니 공이,

“마침 여럿이 싸우는 것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늦었소.” 하자,

혹자가 말하기를,

“싸우는 자는 누구던가요?” 하니,

“환자(宦者)는 중[僧]의 머리털을 휘어잡고 중은 환자의 불알을 쥐고 큰 길 한복판에서 서로 싸우고 있었소.”

하자 여러 정승이 배를 잡고 웃었다. 공의 이 말은 비록 익살에서 나왔으나, 대개 당시의 일이 대부분 허위를 숭상했기 때문에 풍자의 뜻을 붙인 것이다.

순오지(旬五誌)》

 

“환자(宦者)는 중[僧]의 머리털을 휘어잡고 중은 환자의 불알을 쥐고 큰 길 한복판에서 서로 싸우고 있었소.” 라는 말은 말도 되지 않는 말인데, 말도 안 되는 당시의 국정을 말도 안 되는 말로 비난했으니 비수를 품은 해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항복이 기축옥사에 참여하면서 정철의 성품을 잘 알게 되었는데, 후에 정철이 건저 문제로 탄핵을 받게 되자, 친구조차도 혐의를 받을까 상종하기를 꺼려할 적에 정철이 방문한 일화가 <연려실기술>에 나온다.

 

사화(士禍 신묘년의 서인 축출)가 일어나자 정철(鄭澈)이 화의 괴수로 되어 한강 가에 나가서 처분을 기다리는데, 화기(禍機)가 몹시 급박하므로 문인이나 친구들이 두려워하여 감히 문안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공이 홀로 조용히 차례로 방문하니 사람들이 모두 위태롭게 여겼다. 이때는 명류(名流)들을 당인(黨人)이라 지목하여 거의 다 벼슬을 깎거나 귀양 보냈는데, 어떤 대관(臺官)이 공도 귀양 보내는 명단 속에 넣으려고 하자 대사헌 이원익(李元翼)이 힘써 구원하여 면할 수 있었다.

<행장>

 

이런 의기가 있기 때문에 해학이 단지 말장난을 넘어서서 날선 비수를 간직한 경지를 보일 수 있었을 것이다. 완곡한 어조로 날선 비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원칙을 지키면서도 편파적이지 않을 때 힘을 발휘하는 법이다. 바로 그런 해학을 할 수 있었던 이가 이항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