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형이 냉주(冷酒)를 마신 사연은?

야사(연려실기술)를 통한 스토리텔링 15

이덕형이 냉주(冷酒)를 마신 사연은?

 

‘혼조삼이(昏朝三李)’라는 말은 광해조 치세 기간에 오리(梧里 이원익), 필운(弼雲 이항복), 이덕형을 아울러 일컬은 말로, 충성을 다한 것이 같고 참소를 입은 것도 같기 때문이다. 특히 이항복과 이덕형은 오성과 한음으로 잘 알려진 유명한 죽마고우이다.

토정 이지함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이지함의 조카이자 당대의 유명한 정객이었던 이산해의 사위이기도 한 이덕형은 31세에 대제학에 오르고 38세에 재상에 올랐는데, 이른 나이에 고위에 오른 것에 대한 일화가 <연려실기술>에 나온다.

 

신묘년(1591)에 예조 참판과 대제학에 초탁(超擢)되니, 공의 나이는 31세였다. 인망과 실적이 모두 높아 노사(老師)들이 모두 팔짱을 끼고 양보하였다. 조정에서 대제학을 회천(會薦)함에 미처 공이 홀로 권점 하나가 적자 당(堂)에 가득 찬 사람들이 놀라,

“이게 어찌된 일이냐?”

하니, 김귀영(金貴榮)이 웃으며 말하기를,

“노부(老夫)의 소위이다.”

하였다. 사람들이 놀라 실색하니, 김귀영이 서서히 말하기를,

“나이는 젊은데 지위가 너무 이르니, 재주가 노성하고 덕이 익기를 조금 기다리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였다. 공이 듣고 흔연히 기뻐하니, 선비들 공론이 양쪽을 모두 아름답게 여겼다.

 

김귀영이

“나이는 젊은데 지위가 너무 이르니, 재주가 노성하고 덕이 익기를 조금 기다리는 것이 어떻겠는가.”

라고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대제학이란 문형을 담당하는 자리로 노사숙유들도 감당하기 어려운 자리인데 31세에 초탁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인망과 실적이 모두 높아 노사(老師)들이 모두 팔짱을 끼고 양보할 정도로 탁월했다고 하니 그 조숙원만의 경지를 충분히 헤아릴 만하다.

또한 38세에 재상에 오른 데에도 역시 일화가 전해온다.

 

양호(楊鎬)는 나이가 젊고 기(氣)가 날카로워 천하의 선비를 경시하고 번번이 기세로써 사람을 압도하니,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임금이 공에게 접대하도록 명하였는데, 양호가 한번 보고 감복하여 매우 재능을 인정하고 남달리 생각하여 말하기를,

“이덕형은 비록 중국 조정에 있더라도 예복을 입고 묘당에 있을 사람인데 아직 일반 관직에 있으니 이상하다.”

하였다. 임금이 듣고 바로 정승에 임명하니, 나이 38세였다.

 

이덕형이 재상에 오른 데에는 양호의 높은 평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는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명나라 어사 양호(楊鎬)를 설복해 서울의 방어를 강화하는 한편, 스스로 명군과 울산까지 동행하여 그들을 위무(慰撫)하였는데, 그 해에 우의정에 승진하였다. 기록을 보면 양호가 남을 허여하는 기상이 별로 없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이덕형을 높이 평가했다는 것은 출중한 이덕형의 재능과 기상을 여기서도 알 수 있다.

유성룡의 제자로 유학에 밝고 시강(侍講)으로 이름이 높았던 정경세는 이덕형의 재능과 인품을 이렇게 적고 있다.

 

공은 정신이 뛰어나고 밝으며 풍도가 엄정하여 나이 20살이 되기 전에 사람들이 정승이 될 그릇으로 기대하였다. 타고난 자질이 매우 높고 뛰어났으나 겸손하고 근신하여 스스로를 낮추어 일찍이 한 터럭만큼도 자랑하거나 높은 체하는 기색이 없었다. 평소에는 아주 무능한 것 같았으나 일을 만나면 영특한 기운이 분발하였다. 조정에 선 지 34년 동안 일신을 돌보지 않고 힘을 다하였으며 평탄하고 험한 것을 가리지 않아서 마침내 중흥의 대업을 도와서 이룩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자신을 부족하다고 보아 공이 있다고 자처하지 않았고, 사람들과, 더불어 접할 때에는 웃는 얼굴에 온화한 기운이 상대에게 스며들었다. 《우복집(愚伏集)》

일찍 출세하게 되는 경우 초년의 조신한 마음을 잃어버리고 자고하기 쉬운데 타고난 자질이 매우 높고 뛰어났음에도 겸손하고 근신하여 스스로를 낮추어 일찍이 한 터럭만큼도 자랑하거나 높은 체하는 기색이 없었고 평소에는 아주 무능한 것 같았으나 일을 만나면 영특한 기운이 분발했다는 말은 이덕형이 장덕군자(長德君子)임을 잘 보여준다.

광해 치세 기간은 혼조라고 칭하는데, 특히 폐모사건은 효도를 근간으로 하는 조선의 유교사회에서는 기강을 밑둥에서 부터 흔드는 대사건으로 용납하기 어려운 점이 많았다.

8월에 용진(龍津)으로 돌아가니, 이때 나이 53세였는데 병을 얻어 날로 심해져서 마침내 일어나지 못하였다. 이제 와서 크게 한이 되는 것은 모후(母后)를 폐하려는 논의가 일어나자, 명보(明甫)가 급히 공격하려는 것을 내가 때를 기다리려고 하여, 마침내 명보가 나의 의논을 좇아 중지하였던 것이다. 내가 먼저 패하여 물러나자 명보가 고립되어 할 말을 다하지 못한 채 그대로 죽어서 지사(志士)로 하여금 천추에 눈물을 떨어뜨리게 하였으니, 내가 명보를 그르침이 많았도다. <묘지>

 

이항복이 조정을 떠나고부터 공이 더욱 외로워서 의지할 데가 없었다. 국사를 생각하고 임금에게 누를 끼칠까 우려하여 매양 집으로 돌아와서는 천창만 쳐다보며 소리 없이 울고, 음식을 물리치고 올리지 못하게 하며 오직 냉주(冷酒)만 찾아 즐길 뿐이었다.

 

이덕형이 53세로 천수를 다 누리지 못하고 생애를 마친 데에는 음식을 물리치고 냉주만을 찾아 즐겼다는 기사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냉주를 마신 것은 화를 가라앉히려는 심사였을 것이니

“국사를 생각하고 임금에게 누를 끼칠까 우려하여 매양 집으로 돌아와서는 천창만 쳐다보며 소리 없이 울었다”

는 것에서 그 대강을 헤아릴 수 있을 것이며, 더욱 이 슬픔과 고통이 가슴에 사무친 데에는 외롭고 의지할 곳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게 바로 죽마고우 오성 이항복이 조정을 떠난 후라고 한다. 사무치는 우정을 느낄 수 있다.

중국어에 능통한 이원익


야사(연려실기술)를 통한 스토리텔링 14

중국어에 능통한 이원익

 

원익의 인품과 덕망을 인상 깊게 표현한 글이 <연려실기술>에 실려 있다.

영남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원익(李元翼)은 속일 수는 있으나 차마 속이지 못하겠고, 유성룡은 속이려고 해도 속일 수 없다.”

고 하였다. 《회은집(晦隱集)》

유성룡은 속이려고 해도 속일 수 없는 반면에 이원익은 속일 수 있으나 차마 속이지 못한다는 영남 사람들의 인물평에서 이원익의 온화하고 넉넉한 인품이 그대로 묻어난다. 무엇 때문에 그리하였을까. <연려실기술>의 다른 기록은 이러하다.

 

공의 도량이 정하고 밝으며 겉과 속이 순수하며 한결같고 평소의 말과 기색이 온화하며 얼굴빛과 웃는 모습이 사랑스러웠으나 일을 당해서는 우뚝하여 움직이지 않는 산악과 같았다. 벼슬살이를 하고 있거나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는 순전히 시서(詩書)를 응용하고 고사(古事)를 참고하니 자연히 이치에 부합하였다. 어떤 재상이 사람에게 말하기를,

“누가 오늘날 성인이 없다고 하는가. 완평(完平)은 참 성인이다.”

하였다. 일이 많은 때를 당하여 조정에 큰 의논이 있으면 반드시 공의 한 마디 말을 기다려서 결정하였다. 오성(鰲城 이항복)이 일찍이 말하기를,

“나는 매사를 수반(首班)의 재결에 따라 행한다.”

하였고, 상촌(象村) 신흠(申欽)이 공과 같이 또한 정승으로 있었는데 역시 그렇게 말하였으며, 공 또한 이오성을 일컬어 반드시,

“위인이다.”
라고 말했다. 이창석(李蒼石)의 말

 

이항복과 신흠이 누구인가. 당대의 명유이자 웅재들이 아닌가. 그러한데 이들이 모두 이원익의 재결을 기다린다고 하였으니 그 실질을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다. 이는 모두 이원익이 순리에 따라 천연스럽게 매사를 처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리라. 게다가 이원익은 청백리의 표본이었으니 청렴절개를 숭상한 조선의 선비들의 표상으로 전혀 손색이 없었다.

 

늙었다는 이유로 퇴임을 청하니 인조가 허락하지 않았다. 정묘년(1627) 가을에 향리로 돌아가게 해 줄 것을 청하니, 술을 하사하여 전송하고 해사(該司)로 하여금 흰 이불과 흰 요를 주게 하여 검소한 덕을 표하며 이르기를,

“평생의 검소함은 경의를 표할만하다.”

하고 승지를 보냈다. 승지가 복명(復命)하니, 임금이 그 거처에 대해 묻자, 대답하기를,

“초가집이 쓸쓸하였고 비바람도 못 가리는 형편이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정승이 된 지 40년인데 초가 몇 칸뿐이냐.”

하고 본도 감사로 하여금 정당(正堂)을 지어서 주도록 하였다.

 

갑술년에 죽으니 임금이 도승지 이민구(李敏求)를 보내 조문하도록 하였다. 민구가 회계(回啓)하기를,

“영중추부사의 상사(喪事)인데 집이 가난하여 모양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니, 관재(棺材)의 여러 도구를 보내도록 명하였다. 세자가 가서 조문하고, 백관이 회곡(會哭)하고, 도성의 백성과 어른들도 회곡하였다.

 

선조 치세에 알려진 명현들은 대개가 임진왜란의 국난을 겪은 후에 그 명성이 높아진 것이니, 난리를 타개하고 국가의 안위를 도모하는 데에는 위국충정의 절의와 영인이해(迎刃而解)의 웅재 중에 하나라도 결핍되어서는 성취하기 어렵다.

이원익의 절의는 어떠한가. 조선시대 4대 문장가의 한 명으로 뽑히는 이식은 이렇게 쓰고 있다.

 

공이 세 임금을 차례로 섬기는 동안 시종 한 마음이었으며, 충성과 공로는 전란 중에 드러났고 절의는 혼란한 때에 나타났다. 우리 임금을 도와서 국운을 새롭게 하였으니 공로는 사직(社稷)에 있고, 도(道)는 강상(綱常)을 붙들었다. 이는 그가 수립한 큰 것이요, 그 편안하고 고요한 뜻과 청백한 절조와 집을 이은 효성과 나라를 위해 힘을 바친 근로와 의논의 바름과 행의(行義)의 갖춤으로 말하면 뚜렷하게 사람들의 이목에 남겨진 것이 구비(口碑)와 같았다.

택당집(澤堂集)》

 

절개와 의리를 시사에 펼치기 위해서는 일을 도모하고 대사를 경륜할 수 있는 능력을 겸비해야 하는데, 이원익이 일찍이 과거시험에 합격한 후에 중국어를 공부한 데에서도 이를 십분 알 수 있다.

 

공이 처음에 과거에 급제하자 한어(漢語)를 익혀 전심하여 공부하였다. 뒤에 임진년을 당하여 명나라 군사가 나오니 사신의 왕래가 빈번했는데, 역관들이 이해하는 것은 불과 물이나 또는 춥고 더운 인사 정도뿐이라 피차의 뜻이 백에 하나도 통하지 못하였다. 공이 이때 평안 감사가 되어 응접하고 수작하는 데 조금도 막힘이 없으니 명나라 장수가 크게 기뻐서 말하기를,

“이 사람이 한인이 아니냐.”

하였다. 공이 처음에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가서 사신과 예부 관원이 만날 때에 통역하는 자가 말을 바꾸어 요구하는 일이 있었으니, 사신이 중국어를 해득하지 못하는 줄로 생각했던 것이다. 공도 묵묵히 모르는 체 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산해관(山海關)에 이르러 중국의 유학자를 만나 경사(經史)를 토론하는데 문답이 물 흐르듯 막힘이 없는 것을 보고 통역이 땅에 엎드려 머리를 숙이고 말하기를,

“죽어도 죄를 갚을 길이 없습니다. 제발 한 가닥 목숨을 빕니다.”

하니, 공이 또한 묵묵히 답이 없었다. 정승이 되어 사역원 도제조를 겸대하여 모든 역원의 문안(文案)을 모두 한어로 품정(稟定)하니, 이로 인하여 사람들이 모두 스스로 힘써 일하게 되어 크게 국가의 쓰임이 되었다. 《공사견문

 

일찍이 중국어를 익혀 역관의 도움에만 의지하지 않고 국난의 때에 중요한 일을 처리하는데 긴요하게 사용하였으니, 실무를 겸한 공의 준비 정신이 놀라울 따름이다.

출장입상(出將入相)의 정언신


야사(연려실기술)를 통한 스토리텔링 13

출장입상(出將入相)의 정언신

 

언신은 기축옥사의 피해자이다. 기축년(1589)에 우의정이 되어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고변 후에 옥사를 다스리는 위관(委官)에 임명된다. 그러나 정여립의 구촌친(九寸親)이어서 공정한 처리를 할 수 없다는 탄핵을 받아 위관을 사퇴하고 이어서 우의정도 사퇴하였는데, 그 뒤 역가문서(逆家文書) 가운데에 이름이 있다는 이유로 정철 등으로부터 정여립의 일파로 모함을 받아 남해에 유배되었다가 투옥되었다. 사사(賜死)의 하교가 있었으나 감형되어 갑산에 유배되었다가 그 곳에서 죽었다(1591) 그리고 8년 후 1599년에 복관되었다.

정언신은 원래 문무를 겸한 출장입상의 기국을 넉넉히 갖춘 유자였다. <국조인물고> ‘相臣’ 조에 조경이 지은 정언신의 비명에 대략이 나와 있다.

 

만력(萬曆) 기묘년(己卯年, 1579년 선조 12년)에 사간(司諫)에서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승진하였다가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전직되었다. 특별히 가선 대부(嘉善大夫)로 승진하여 함경도 절도사(咸鏡道節度使)가 되었다. 이는 대체로 공이 문무의 재능을 겸비하여 금중(禁中)에서 장수감으로 비치해 놓은 지 오래되었기 때문이었다. 공이 부임하자 변방의 업무를 조사하여 열 가지 중에 하나도 빠뜨리지 않았다. 변방의 백성들과 가까이 접하여 생활하여 위엄과 은혜가 병행되었으니, 망루(望樓)가 정비되고 군진(軍陣)이 성대한 것은 말할 것조차도 없었다. 또 남은 힘으로 녹둔도(鹿屯島)와 구탈지(甌脫地)에다 둔전(屯田)을 시작하여 해마다 큰 풍년이 들었는데, 군사가 배부르고 말이 살찐 것이 실로 여기에 말미암았다고 한다. 번방에 귀화한 호인(胡人)들이 또한 공의 은혜와 신의를 사모하여 아들을 낳으면 공의 성명으로 이름을 지어 마치 가부(賈父)와 같이 하였다. 임기가 차자 조정으로 들어가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임명되었다가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옮기었고 다시 부제학(副提學)에 임명되자 사임하였다.

 

계미년(癸未年, 1583년 선조 16년)에 이탕개(泥湯介)가 변새를 몰래 침범하여 보(堡)를 집어삼켰다는 급보가 전해지자 조정의 의논이 모두 공을 추대하였으므로 공을 우참찬(右參贊)으로 발탁하여 함경도 도순찰사(咸鏡道都巡察使)를 겸임시키었다. 공이 곧바로 경기(京畿)의 부절을 풀어놓고 출정하기 전에 하직 인사를 드리니, 임금이 운검(雲劒)을 하사하여 여러 장수들을 독려하도록 하였다. 공이 도성의 문을 나가기 전에 위엄의 명성이 이미 북변에 퍼졌다.

옛날 허 충정공(許忠貞公, 허종(許琮))이 도순찰사로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였을 때 또한 운검을 하사받았는데, 공은 허씨의 외손이므로 그 일을 아는 사람들은 대부분 탄식하며 기이한 일이라고 하였다. 공이 북관(北關)으로 들어가 여러 장수들을 모아놓고 일을 분담시켜 삼군(三軍) 중에 추위에 떠는 사람은 솜옷을 입히니, 겁쟁이는 용맹스러워지고 교만한 자는 두려워할 줄을 알았다. 이에 호령을 엄숙하게 하고 상벌을 반드시 믿게 하니, 싸우지 않고도 적병의 잔당들이 죽기로 갑자기 멀리 달아나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공이 또 사람을 잘 알아보았는데, 공의 막하에 들어간 이순신(李舜臣)ㆍ신입(申砬)ㆍ김시민(金時敏)ㆍ이억기(李億祺) 같은 사람들은 모두 명장(名將) 중에 으뜸간 장수였다.

 

<연려실기술>에 기록된 내용들은 조경의 비명을 전재한 것으로, <국조인물고>에는 조경의 신도비 전문이 실려 있다. 당시 정언신의 막하에 이순신(李舜臣)ㆍ신입(申砬)ㆍ김시민(金時敏)ㆍ이억기(李億祺) 같은 명장(名將) 들이 즐비했다는 것은 그가 인재를 발탁하는 높은 안목의 소유자였음을 알려준다.

조경은 정언신의 인품과 풍모를 손에 잡힐 듯 써놓았는데 대강은 다음과 같다.

 

공은 피부가 희고 키가 크며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수염이 신(神)과 같아 돌아보면 무리에서 뛰어났다. 가정의 행실이 천성으로 타고나 어머니 상(喪)을 당하여 3년간 시묘(侍墓) 살이를 하면서 조석으로 제전(祭奠)을 드리되, 몸소 밥을 짓고 노복을 시키지 않았다. 귀하게 되어 관사에서 땔나무를 가져온 것을 보면 반드시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옛날에는 어버이 방에 불을 제대로 때지 못하였는데, 지금 땔나무가 있으니, 어버이가 계시지 않는다.”

고 하였다. 종손(宗孫)이 가난하여 가정살림을 꾸리지 못하자, 자신의 녹봉을 떼어주고 사당(祠堂)을 지어주었다. 백형(伯兄)과 중형(仲兄)을 사랑과 공경을 다하여 섬기면서도 과실이 있으면 반드시 규계(規戒)하였으며, 그들의 노복을 한결같이 자신의 노복처럼 거느렸다. 그리고 집에 있을 때 검소한 것을 좋아하여 의복과 거마(車馬) 그리고 차린 음식이 모두 소박하여 화려한 것이 없었으며, 부인의 예복(禮服)을 지을 적에도 겨우 올이 가는 베만 지급할 뿐이었다.

부인과 공이 백발이 되도록 서로 격려하였고 첩을 대하고 궁한 일가를 도와줄 줄 적에 하나도 공의 뜻에 순종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공이 충성과 능력을 다 쏟아 조석으로 국사를 보느라 가정에서는 문서를 보지 않고 가산을 조금도 불리지 않았는데, 부인의 내조(內助) 또한 많았다고 한다. 그 당시에 공을 비방한 자들이 백 대의 수레에 실을 정도뿐만이 아니었으나 감히 재화를 좋아했다고 덮어씌우지 못하였다. 공이 일생 동안 청렴하게 산 바가 어찌 옛 초(楚)나라 승상 손숙오(孫叔敖)에게 손색이 있겠는가?

정언신에 대한 기사는 대략 정여립 기축옥사에 관련되어 무고하게 죽었다는 것이 보통이지만 어찌 정언신의 공적과 인품이 기축옥사에만 국한되어 알려질 것밖에 없겠는가.

정치 9단(?) 이산해


야사(연려실기술)를 통한 스토리텔링 12

정치 9(?) 이산해

 

산해는 광해조의 실정과 폐륜에 적극 가담한 대북의 영수였다. 조선 역사에서 광해는 인조반정으로 실권하여 왕이 되지 못한 임금이었기 때문에 그 정권에 참여한 유신들은 이른바 부역자로 낙인찍혀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정철이 기축옥사의 위관을 담당하게 된 데에는 선조의 적극적인 후원과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축옥사 후에 선조는 태도를 일변하여 정철에 대한 신뢰를 거두어들이게 되는데 그 계기가 건저문제이다. 애초에 이산해의 발의에 정철과 유성룡이 그 필요성을 동감하여 때를 잡아 선조에게 상신하기로 했는데, 이산해는 이를 정철을 포함한 서인파를 내몰 수 있는 좋은 기화로 삼았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연려실기술>에 이렇게 적혀 있다.

 

산해는 공량과 술 마시기로 약속하고, 먼저 그의 아들 경전(慶全)을 공량의 집에 가게 하였다. 조금 뒤에 이산해의 종이 급히 달려가서 경전에게 고하기를,

“대감이 막 오시려 하다가 별안간 어떤 소문을 듣더니, 문을 닫고서 눈물만 흘리고 계시니, 어찌 된 연유를 모르겠나이다.”

하니, 경전이 놀라 일어나서 급히 갔다가 곧 돌아와서 말하기를,

“부친께서, ‘정 정승이 장차 세자 세우기를 청하고 이어서 신성군 모자를 없애버리고자 한다.’는 것을 들으신 까닭에 어찌할 줄을 모르십니다.”

하였다. 이에 김공량이 즉시 김빈에게 달려가서 그 말을 고하니, 김빈은 임금 앞에서 울면서 하소연하기를,

“정 정승이 우리 모자를 죽이려 한다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무슨 까닭에 너희 모자를 죽인다더냐.”
하니, 김빈이,

“먼저 세자 세우기를 청한 뒤에 죽인다고 한답니다.”

하여, 임금이 이로써 의심을 가지게 되었으나 정철은 모르고 있었다. 뒷날 경연에서 정철이 먼저,“세자를 세워야 한다.”는 의논을 꺼내자 임금이 크게 노하니, 영상 이산해는 벙어리처럼 아무 말 없이 움츠리었고, 유성룡도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는데, 다만 부제학 이성중(李誠中)ㆍ대사간 이해수(李海壽)가 아뢰기를,

“이 일은 정철만이 홀로 하는 말이 아니라 신 등도 모두 같이 의논한 것입니다.”

하였다. 정철은 이때부터 선조에게 미움을 크게 받았다.

송강년보(松江年譜)〉 《일월록

 

이 기록에 의하면 이산해는 음험한 정치 술수가로 명종 연간의 윤원형이나 이기와 별반 다를 바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산해는 신동이었다. 당대의 세도가 윤원형이 소년 천재를 사위로 맞이하려고 해서 아버지 이지번이 벼슬을 버리고 숙부 이지함과 함께 단양의 구담(龜潭)으로 피신해서 숨어살았다고 한다.

 

처음 태어났을 때, 계부(季父) 지함(之菡)이 우는 소리를 듣고 큰 형 지번(之蕃) 공의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이 아이가 기이하니 꼭 잘 보호하여 기르십시오. 우리 가문이 이로부터 다시 흥할 것입니다.”

하였다. 5세 때 처음 병풍에 글씨를 썼는데 붓질이 귀신같아서 신동이라고 일컬었다. 일찍이 먹물을 발바닥에 바르고 종이 끝에 눌러서 어린아이의 발자국인줄 알았다. 13세에 충청 우도 향시(鄕試)에 장원하였다.

죽창한화(竹窓閒話)》

 

나면서부터 특이한 자질이 있어 말을 하기 전에 이미 글을 알았다. 집에 동해옹(東海翁)의 초서(草書)를 벽에 걸어 놓은 것이 있었는데, 유모를 잡아끌어 앉혀서 보고 손으로 가리키며 좋아하였다. 5세에 비로소 계부 토정(土亭)에게 배웠는데, 토정이 태극도(太極圖)를 가르치니, 한마디에 천지 음양(天地陰陽)의 이치를 알고 도(圖)를 가리키며 논설하였다. 일찍이 글을 읽으면 밥 먹는 것도 잊었다. 토정이 몸을 상할까 염려하여 독서를 중지하게 하고 먹기를 기다리니, 공이 시를 짓기를,

“배 주리는 것도 민망커든 하물며 마음이 주림이랴 / 腹飢猶悶況心飢, 먹기를 더디하는 것도 민망커든 하물며 공부가 더딤이랴 / 食遲猶悶況學遲, 집은 가난해도 마음 다스릴 약은 있으니 / 家貧尙有治心藥, 모름지기 영대(靈臺마음)에 달 뜰 때를 기다리소서 / 須待靈臺月出時”

하였다. 토정이 더욱 기특히 여겼다.

 

6세에 능히 큰 글자를 썼는데, 붓을 쥐고 엉금엉금 기면서 글씨를 쓰면 자형(字形)이 장위(壯偉)하여 용이 잡아끌고 범이 움켜잡는 형상과 같았다. 일시에 이름난 벼슬아치들이 모두 그 필적을 구하였고 신동으로 지목하였다.

 

이산해의 평가는 긍정적인 평가와 부정적인 평가가 실타래처럼 얽혀있지만 대체적으로 당파로 갈리기 이전의 행적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가 많고 당파로 갈린 이후에는 부정정인 평가가 많다. <연려실기술>에서 그 대강을 엿볼 수 있다.

 

대사헌 이이가 경연에서 임금에게 아뢰기를,

“산해가 평소 벼슬을 할 때에는 다른 사람보다 나을 것이 없었는데, 이조 판서가 되자 모두 공의(公議)에 좇고 청탁을 행하지 않아 뜰 안이 쓸쓸하기가 가난한 선비의 집 같고, 다만 듣고 본 착한 선비로서 벼슬길을 맑히는 것만을 마음에 두고 있으니, 이같이 몇 년만 해나간다면 세상 풍속이 거의 변화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산해가 재기(才氣)가 있으나 능력을 자랑하는 의사가 없기에 내가 일찍이 유덕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였다. 《석담일기》

 

선조가 일찍이 공을 칭찬하기를,

“말은 입에서 나오지 못할 것 같고 몸은 옷도 이겨내지 못할 것 같으나, 한 덩어리의 참된 기운이 속에 차고 쌓여서 바라보면 존경심이 생긴다.”

하였다. 공이 사직 상소에 비답하기를,

“경이 이조 판서가 되면 문 밖에 새 그물[雀羅]을 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23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맑고 훌륭한 벼슬을 역임하였는데, 자못 청렴하고 근신하여 한때의 인망을 얻었다. 이미 정승에 오르자 지위를 잃을 것을 우려하는 마음이 생겼다. 김공량(金公諒)이란 자는 인빈(仁嬪)의 아우였다. 인빈은 후궁 중에 가장 총애 받았기 때문에 산해가 종처럼 공량을 섬겨 지위를 굳히려고 어두운 밤에 찾아가 애걸하며 등창에 고름을 빨아 주는 것도 사양하지 않으니, 마침내 청의(淸議)에 죄를 얻었다. 임진왜란 때 수상으로서 서도로 파천할 것을 건의하였다. 대가(大駕)가 서도로 간 뒤에 공론을 좇아 평해(平海)로 귀양 보냈으나 임금의 사랑은 변하지 않았다. 을미년(1595)에 정탁(鄭琢)이 석방하여 돌아오게 할 것을 청하였으니, 임금의 뜻을 맞춘 것이다. 산해가 다시 정승으로 들어오려고 하는데 당시에 유성룡(柳成龍)이 집권하고 있으면서 저지하자, 산해의 원한이 골수에 사무쳐서 그 일당과 더불어 성룡을 제거할 것을 꾀하다가 임술년(1622)에 이르러 드디어 성룡을 쫓아내고 대신 정승이 되어 조정을 혼란스럽게 하였다. 이에 임금이 깨닫고 도성 밖으로 쫓아내도록 명하고 10년 동안 부르지 않았다. 《부계기문》

 

<부계기문>의 저자 김시양은 당색이 서인이니 이산해에 대한 반감이 깔려있음을 주의할 필요는 있지만, 정철을 몰아낸 건저사건이 이산해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의 중요한 전환점임을 알 수 있다. 김공량은 당시 선조의 총애를 받고 있던 김빈의 아우로서, 이산해가 아들 이경전을 통하여 모사를 꾸며 건저문제로 정철을 귀양 보내는데 등장하는 인물이다. 이산해는 원래 정철과 친구 사이였지만 대략 기축옥사를 통하여 동인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정철에 대한 원한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동서의 분당과 다시 동인의 남북 분당이라는 정치적 소용돌이의 한 가운데에서 있으면서 매번 당의 영수 역할을 수행했던 이산해였기에 그에 대한 평가는 정치적인 조명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진짜 살림살이는 어떠했는지 궁금하다.

타향에 우거하고 있을 때, 혹 한 필의 말과 동자 한 명을 데리고 산수를 왕래하면서 때로 풍경을 대하여 흥취를 붙이고 회포를 풀어 문득 시(詩)로 나타냈는데, 글씨가 떨쳐나가고 날아 움직여 자득(自得)한 것이 많았다. 또 수묵화(水墨畵)를 잘 그렸으나 남에게 보여주지 않았고, 때로 고화(古畵)를 만나면 정신이 통하여 감상하였다. 글을 볼 때 능히 열 줄을 한꺼번에 내려보았으나, 또한 일찍이 독서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어려서부터 명망이 있었으며 일찍 정승의 반열에 이르렀으나 집 한 칸 밭 한 자리가 없어서 항상 셋집을 얻어 살았기 때문에 쓸쓸하고 어려운 살림이었다. 손님이 오면 간혹 말 언치[馬]에 앉기도 하고, 비가 오면 자리로 비새는 곳을 가렸으며, 헤진 옷과 거친 음식으로도 항상 편안히 살았다. 모두 이한음(李漢陰)이 지은 묘지(墓誌)이다.

 

건저사건을 통하여 정철을 제거했다하여 요즘 역사평론가들에게 정치9단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실상 소년 천재로서 문장, 음율, 시화에 탁월한 조예를 간직한 정객 이산해의 진짜 모습은 산수를 즐기며 안분자족한 삶을 추구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결국 정치의 소용돌이를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조선공사삼일(朝鮮公事三日)과 유성룡


야사(연려실기술)를 통한 스토리텔링 11

조선공사삼일(朝鮮公事三日)과 유성룡

 

성룡은 임진왜란을 극복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재상으로, 당시의 상황을 징비록(懲毖錄) 으로 남겼다. ‘징비’란 <시경> ‘소비편(小毖篇)’의 “내가 징계해서 후환을 경계한다(予其懲而毖後患)”라는 구절에서 딴 말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유성룡은 임란 전에 이이가 국방강화책으로 제시한 10만 양병설을 반대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연려실기술>에 기록이 있다.

 

일찍이 경연 중에서,

“미리 10만 군병을 양성하여 급할 때에 대비해야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10년을 넘지 못해 장차 흙이 무너지듯 어쩔 수 없는 화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유성룡(柳成龍)이 말하기를,

“무사할 때 군사를 기르는 것은 화(禍)를 기르는 것이 된다.”

고 하였다. 이때는 오랫동안 평안하고 기뻐하던 터이라 경연에 입대(入對)한 신하들이 모두 공의 말을 지나치다고 하였다. 공이 나와서 성룡에게 말하기를,

“국사가 달걀을 포개 놓은 것보다 더 위태롭거늘, 속된 선비는 시무(時務)를 모르는 법이라. 다른 사람에게는 바라는 것도 없지만, 그대도 또한 이런 말을 하는가. 이제 미리 양병하지 않으면 반드시 후회해도 미치지 못할 것일세.”

하고는 근심스러운 빛을 지으며 언짢아하였다. 임진년 뒤에 성룡이 조당(朝堂)에서 여러 정승에게 말하기를,

“당시에는 나도 또한 소요스러워질 것을 우려하여 그르다고 하였는데, 이제 와서 보니 이문성(李文成)은 진짜 성인(聖人)이었다. 만약 그 말을 들었더라면 국사가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겠는가. 또 그 전후의 상소와 차자 속에 진술한 정책을 당시 사람이 간혹 비난하기도 하였으나, 지금 모두 착착 들어맞는 선견지명이었으니, 이는 미칠 수 없는 재주이다. 만일 율곡이 살아 있었다면 반드시 오늘에 능히 뭔가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였다.

<율곡행장>

 

“무사할 때 군사를 기르는 것은 화(禍)를 기르는 것이 된다.”고 이이의 10만 양병설을 반박했던 유성룡이다. 상황은 반복되는 법인가. 임란 전에 통신사로 다녀 온 김성일이 전쟁의 징후를 찾아보기 어렵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쟁을 일으킬만한 위인이 못된다고 보고하자, 유성룡이 만일 진짜로 전쟁이 일어나면 어찌하려고 하느냐고 묻는데, 그의 답이 바로 ‘여론을 소요시킬 것을 걱정하여 그리하였다’라고 했다고 한다. 조정에서 일본의 상황을 살피러 통신사를 파견할 정도였으니 필시 이때는 이이가 양병설을 주장하던 때처럼 징후가 없지 않았을 것이어서 유성룡이 이와 같은 질문을 했을 것이다.

전쟁은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가고 삶을 피폐하게 만들지만 또한 숱한 영웅들을 만들어낸다. 절대 절명의 순간에 위대한 승리를 쟁취하거나 고귀한 희생을 감내한 인물들이 탄생하게 되고 후인들은 애국선열이요 영웅들로 칭송하며 그들의 공덕을 기리는 것이다.

유성룡은 전국토가 병마에 휩싸인 7년간의 그 긴 전쟁 동안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국난을 극복하는데 커다란 기여를 한다.

 

관리로서의 재능이라는 것은 바로 문서를 처리하는 재주이므로 귀하게 여길 것이 없으나 정승으로서 관리로서의 재능이 있는 자는 또한 얻기가 어렵다. 바야흐로 임진년과 계사년에 왜구(倭寇)가 국내에 깔렸고 명나라 군사가 성에 가득해 있던 날에 급한 보고가 한창 교차하고 이문(移文)이 번번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공이 관청에 도착하면 신흠(申欽)이 속필이므로 반드시 붓을 잡으라고 시키고 입으로 부르면 글이 되는데 여러 장의 글을 풍우처럼 빨리 부르므로 붓을 쉬지 않고 쓴 글이지만 한 자도 고칠 것이 없이 찬란하게 문자를 이루었다. 비록 명나라에 보내는 자문(咨文)이나 주문(奏文)이라 할지라도 또한 그러했으니 참으로 기이한 재주였다. 이덕형과 이항복은 그에 버금가는 사람들이다.

상촌휘언(象村彙言)》

 

신흠의 <상촌휘언>을 통해서 유성룡이 재상으로 국정 전체를 주관하면서도 실무적인 능력 또한 출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흠의 말처럼 이는 귀한 재주라 할 것이다. 한편 그의 성품에 대해서 <연려실기술>에 다양한 기록이 남아 있다.

 

공은 타고난 자품이 심히 높았고 영리함이 뛰어났다. 어려서부터 공부할 때에는 정밀하고 마음을 다하며 실천을 위주로 삼고 평상시에는 장엄하고 공경함으로써 스스로를 지켜 종일토록 엄연(儼然)한 자세로 있었다. 비록 집안 자제라 하더라도 일찍이 그 몸을 기대거나 풀어진 모습을 본 적이 없었으나 남을 대할 때 이르러서는 화락하여 마치 화창한 봄기운이 사람에게 덮치는 듯하였다. 비루하고 인색한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고 태만한 기운을 몸에 나타내지 않았기 때문에 대하는 사람이 자연 엄숙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대개 이른바 몸을 예(禮)를 행하는 데 힘써서 한 평생을 마쳤다고 하겠다.

(정우복(鄭愚伏)의 말.)

 

공은 수재(秀才 과거 보기 전 선비로 있을 때를 말함)가 되었을 때부터 원대한 포부를 가졌고,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부귀와 영달을 담담하게 보았고, 항상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업에 뜻을 두었다. 예악과 교화 이외에 군사를 다스리고 재정(財政)을 다스리는 일에 대해 세밀하게 강구하지 않는 것이 없었으며, 재능은 실무에 대응할 수 있고 학문은 사물에 응용할 수 있었다. 특히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는 것으로써 정치를 이루는 근본으로 삼아 매양 입대(入對)할 때마다 깨끗한 한 마음으로 성의를 쌓아 의리를 진술하기를 자세하고 간절하게 하였다. 임금이 대단히 중하게 여기고 여러 번,

“바라보면 자연 경의가 생긴다.”

고 탄복하였다. 명군(明君 선조(宣祖))과 양신(良臣 서애(西厓))이 서로 만난 것은 말세에서 보기 드문 일이었으나, 조정의 논의가 대립되어 칭찬과 훼방(毁謗)이 서로 엇갈려 정책에 써 볼 수는 없었다. 전란을 만나 국가가 위태로운 때에 임무를 받아 노심초사하며 소장과 차자 사이와 일의 시행에 있어 부지런하고 간절하여 국가의 중흥(中興)을 도모한 것은 정원(貞元 당(唐) 나라의 연호) 연간의 육지(陸贄)에 비하더라도 못하지 않았고, 안팎으로 분주하면서 온갖 어려움을 맛본 것은 육지보다 더했으니, 대개 중흥한 여러 신하 중에 공적이 가장 드러났다.

 

유성룡의 마음가짐과 국정에 임한 자세를 한눈에 할 수 있다. 정철이 자신은 허망한 군자지만 유성룡은 근신한 군자라고 평한 기록이 있는데 이 또한 유성룡의 평소의 마음자세와 몸가짐을 잘 알려준다고 할 수 있다.

유성룡이 임란 중에 도체찰사가 되어 행정 공문을 보내면서 그 지시한 내용을 수정하는 과정에 얽힌 일화가 있다.

도체찰사가 되어 여러 고을에 이문을 띄울 일이 있어 글을 지어 역리(驛吏)에게 주었는데 3일이 지난 뒤에 그 이문을 다시 거두고 추가로 글을 고치려고 하니 역리가 문서를 가지고 왔다. 공이 힐난하기를,

“너는 어째서 문서를 받은 지 3일이 되었는데도 여태 각 고을에 나누어주지 않았느냐?”

하니, 역리가 말하기를,

“속담에 ‘조선공사 3일(朝鮮公事三日)’이란 말이 있으니 소인이 3일 후에 다시 고칠 것을 알았기 때문에 오늘까지 지연했던 것입니다.”

하였다. 공이 죄를 주려다가 생각하기를, ‘세상을 깨우칠 만한 말이다. 내 잘못이다.’ 하고, 마침내 그 글을 고쳐서 나눠주도록 하였다.

어우야담(於于野談)》

 

역리가 또다시 수정된 공문이 3일 후에 나올 줄 알고 전송하지 않았는데, 과연 3일 후에 유성룡이 수정된 공문을 파발하고자 했다는 이 일화는 당시 행정 지시의 단면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유성룡이

“세상을 깨우칠 만한 말이다. 내 잘못이다.”

라고 한 대목에서 그가 잘못을 시인하고 고치는데 인색하지 않은 군자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작은 일에서도 반성하고 최선을 다하는 자세로 임했기 때문에 국운이 바람 앞에 촛불처럼 쇠잔한 즈음에 선조와 동심동력하여 국난을 이겨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해학을 경책지책(警責之策)으로 사용한 이항복


야사(연려실기술)를 통한 스토리텔링 10

해학을 경책지책(警責之策)으로 사용한 이항복

 

항복이 선조의 신임을 얻는 데는 기축옥사와 관련이 깊다. 기축옥사는 동인과 서인이 화해할 수 없는 선을 넘어간 사건으로 정철은 기축옥사의 위관을 맡음으로 해서 역사의 거센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된다. 한편 이항복은 본 옥사의 처분에 관여하면서 선조에게 자신의 능력을 선보이게 된다. <연려실기술>에는 이항복이 선조의 눈에 들게 되는 연유가 나온다.

 

기축년(1589) 정여립(鄭汝立)의 옥사 때에 문사낭청(問事郞廳)이 되었는데 밝고 민첩하여 임금의 뜻에 맞으니, 임금이 언제나 공의 이름을 부르며,

“이항복으로 하여금 말을 전하게 하라.”

하니 동료들은 팔짱을 끼고 있으면서 감히 그런 대우를 바라지 못하였다. 매양 대신이 죄인들의 형을 결정할 때, 공이 그 사이에서 주선하여 다시 조사하여 죄를 바로잡게 하니 온전히 살아 나온 자가 퍽 많았다. 그 뒤에 일찍이 경연에 입시하자 임금이 특별히 공을 앞으로 불러 문사낭청 때의 일을 말하면서,

“기재(奇才)로다, 기재야.”

하며 극구 칭찬하였다.

<행장>

 

임금이 이르기를,

“지난날 국정(鞫庭)에서 한편으로는 죄수의 문초를 받고 한편으로는 와서 그림자와 메아리처럼 빠르게 아뢰되 털끝만큼도 빠뜨린 것이 없었으니, 다른 사람이 미칠 바가 아니다.”

하였다.

 

당시 옥사는 여러 사람들의 목숨이 달린 일이니 신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굳이 말할 바가 아니지만, 그 안에는 당파의 이해관계와 음모가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공정하면서도 상황을 신속하게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했는데, 이항복은 이 두 가지를 모두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이런 그의 능력이 최고로 발휘된 때가 임진왜란이니, 국가가 풍전등화의 위험에 처해 있을 때 난세의 영웅들이 속출하는바, 이항복은 출중한 재주와 충정을 발휘하여 거의 꺼져가는 조선의 명운을 되살리는데 크게 일조하게 된다.

 

공이 이여송(李如松)의 행군이 기율이 있음을 보고 임금에게 아뢰기를,

“이 군사가 반드시 공이 있을 것이나, 다만 막하에 정동지(鄭同知)와 조지현(趙知縣) 두 사람이 권세를 부리고 있으니 훗날 큰 계획을 막을 자는 반드시 이 두 사람일 것입니다.”

하였다. 벽제(碧蹄) 전투가 불리하게 되자 마침내 화의(和議)하기로 꺾인 것은 정동지와 조지현이 실로 그 꾀를 주장했기 때문이다. <행장>

 

임진년 5월부터 병조 판서가 되었는데 왜적의 대군이 나라에 가득 차 있고 명나라 군사가 수륙으로 몰려들었다. 군사에 관한 일들은 모두 병조로 돌아갔는데 공이 일에 따라서 적당하게 조처하였으며, 항상 예비로 포목 1만 필을 저축하여 급할 때의 수용에 대비하였다. 양호(楊鎬)가 공의 재능과 계책에 탄복하여 언제나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반드시 말하기를,

“이 상서(李尙書 우리나라의 판서를 중국에서는 상서라 한다.)라야 한다. 이 상서라야.”

하였다.

<행장>

 

출병하는 명 장수들의 기세를 보고서도 앞일을 예단할 수 있는 슬기로움과 어려운 전쟁 중간에서도 비상물품을 보관하는 주도면밀함 등을 보자면, 이항복이 임진왜란 동안에 기여한 그 막중한 역할을 가늠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원래 이항복은 해학으로 유명한 분이나 그 해학이 품고 있는 반어적인 표현들은 그냥 웃음으로 끝나지 않는 경책지책이 들어 있다.

잘 알고 있듯이 인조반정에 참여한 인사들의 상당수는 김장생과 이항복의 문하생들이고, 이항복은 정사년에 폐모(廢母)하는 것을 간하다가 북청(北靑)으로 귀양 가서 63세의 일기로 세상을 하직한다. 이는 모두 연산조의 실정과 관련이 깊다.

 

공은 농담을 즐겼다. 일찍이 비변사 회의가 있던 날 공이 유독 늦게 왔으므로 혹자가 말하기를,

“어찌 늦었습니까?”
하니 공이,

“마침 여럿이 싸우는 것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늦었소.” 하자,

혹자가 말하기를,

“싸우는 자는 누구던가요?” 하니,

“환자(宦者)는 중[僧]의 머리털을 휘어잡고 중은 환자의 불알을 쥐고 큰 길 한복판에서 서로 싸우고 있었소.”

하자 여러 정승이 배를 잡고 웃었다. 공의 이 말은 비록 익살에서 나왔으나, 대개 당시의 일이 대부분 허위를 숭상했기 때문에 풍자의 뜻을 붙인 것이다.

순오지(旬五誌)》

 

“환자(宦者)는 중[僧]의 머리털을 휘어잡고 중은 환자의 불알을 쥐고 큰 길 한복판에서 서로 싸우고 있었소.” 라는 말은 말도 되지 않는 말인데, 말도 안 되는 당시의 국정을 말도 안 되는 말로 비난했으니 비수를 품은 해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항복이 기축옥사에 참여하면서 정철의 성품을 잘 알게 되었는데, 후에 정철이 건저 문제로 탄핵을 받게 되자, 친구조차도 혐의를 받을까 상종하기를 꺼려할 적에 정철이 방문한 일화가 <연려실기술>에 나온다.

 

사화(士禍 신묘년의 서인 축출)가 일어나자 정철(鄭澈)이 화의 괴수로 되어 한강 가에 나가서 처분을 기다리는데, 화기(禍機)가 몹시 급박하므로 문인이나 친구들이 두려워하여 감히 문안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공이 홀로 조용히 차례로 방문하니 사람들이 모두 위태롭게 여겼다. 이때는 명류(名流)들을 당인(黨人)이라 지목하여 거의 다 벼슬을 깎거나 귀양 보냈는데, 어떤 대관(臺官)이 공도 귀양 보내는 명단 속에 넣으려고 하자 대사헌 이원익(李元翼)이 힘써 구원하여 면할 수 있었다.

<행장>

 

이런 의기가 있기 때문에 해학이 단지 말장난을 넘어서서 날선 비수를 간직한 경지를 보일 수 있었을 것이다. 완곡한 어조로 날선 비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원칙을 지키면서도 편파적이지 않을 때 힘을 발휘하는 법이다. 바로 그런 해학을 할 수 있었던 이가 이항복이다.

 

보궤불칙(簠簋不飭)한 윤두수


야사(연려실기술)를 통한 스토리텔링 9

보궤불칙(簠簋不飭)한 윤두수

 

궤불칙(簠簋不飭)이란 제사 때 제기인 보와 궤를 갖추지 않았다는 뜻으로, 공직자의 부정을 완곡하게 표현하여 탄핵함을 일컫는 말로 <한서> ‘가의전’에 나온다. 가의(賈誼)는 그 유명한 <과진론(過秦論)>이 저자로서 18세에 이미 문명을 떨치고 33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한 천재이다. 그가 양회왕의 태부가 되어 올린 <양태부가의상소(梁太傅賈誼上疏)>에서 “옛날 대신이 부정으로 축출당하면 부정이라 표현하지 않고, “보궤(簠簋:제사에 쓰는 용기)를 갖추지 않았다(불칙(不飭)”라고 하여 예를 갖추지 않았다고 은유적으로 표현 했습니다.“라는 글이 있다.

이원익이 윤두수를 보궤불칙하다고 탄핵한 일화가 <연려실기술>에 나온다.

 

이원익(李元翼)이 처음 대각(臺閣)에 들어가서 보궤불칙(簠簋不飭)했다는 이유로 공을 탄핵한 일이 있었다. 그 후에 공사(公事)로 인하여 공을 가서 뵈니, 공이 조금도 괘씸하게 여기는 기색이 없이 머무르게 하며 말하기를,

“가난한 친족들이 혼인이나 상사(喪事)가 있을 때, 모두 내게 의뢰해 오기 때문에 그것에 수응하기 위해 보내오는 모든 물품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대간의 탄핵은 사리에 당연한 것이었으니 내가 개의할 것이 무엇인가.”

하며 자못 오랫동안 말을 주고받았는데, 그 말들이 모두 진심에서 나온 것이었다. 마침 시골에 있는 친족이 편지로 혼수(婚需)를 청해오자 공이 즉시 여종에게 명하기를,

“요전에 역관 아무개가 보내온 포목이 있으니 네가 가져오라.”

하였다. 여종이 돌아와 고하기를

“본래 그런 물건이 없습니다.”

하니,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아녀자들이 공이 자리에 있다고 숨기려는 것이오.”

하고 가져오라고 재촉하여 봉해진 채 그대로 내주면서 안색이 변하지 않았다. 원익이 그 큰 도량에 탄복하고 평생 존경하여 중하게 여겼으며, 원익의 후손들이 지금껏 칭송하고 있다.

공사견문(公私見聞)》

 

이원익이 윤두수가 보괘불칙 했다고 탄핵한 일이란 이종 사촌동생인 진도군수 이수에게 뇌물을 수수한 혐의로 파직 당했다가 복직한 일을 일컫는다. <공사견문>의 기록에서 재미있는 것은, 뇌물수수로 탄핵했던 당사자 앞에서 역관으로부터 받은 포목을 집안 친족의 혼수로 내려주면서도 안색이 전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인데, 이는

“가난한 친족들이 혼인이나 상사(喪事)가 있을 때, 모두 내게 의뢰해 오기 때문에 그것에 수응하기 위해 보내오는 모든 물품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는 윤두수의 변명대로임을 잘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이런 기상이 있어서 당시 뇌물수수 혐의로 탄핵을 받고 근신하고 있을 적에도 탄핵 당사자인 이원익의 집을 지나면서 의연하게 방문하여 작별을 고했을 것이다.

 

윤두수가 탄핵을 받을 때에 근수와 같이 성 밖에 가서 명을 기다리게 되었는데, 마침 이원익(李元翼)의 집 문 앞을 지나게 되었다. 두수는 원익과 전부터 친밀하였으므로 찾아보고 가려 하니, 근수가 말리며 말하기를,

“그이가 지금 시론(時論)을 주장하여 우리들을 곧 귀양 보내려 하는 중이니 찾아보지 마시오.

” 하였으나, 두수는

“옛 정을 잊을 수 없다. 피차에 여러 사람의 논의에 몰려서 어쩔 수 없는 처지일 뿐이지 어찌 정의가 없을 수 있겠는가. 곧 우리가 먼 곳으로 귀양하게 될 것이니, 작별 인사를 아니할 수 없다.”

하고 들어가서 명함을 통하였다. 이에 당시 동인으로 논의를 주장하는 자가 자리에 가득히 있다가 두수가 왔다는 말을 듣고 놀라서 방으로 피해 들어갔다. 두수가 원익을 보고 한참 동안 담화를 하였으나 시국 이야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작별인사를 하고 돌아서니, 원익이 매우 부끄러워하였다.

일월록

 

윤두수의 이런 기상을 <연려실기술>에서는 신흠의 기록을 빌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공이 여러 정승과 더불어 국사를 의논할 때, 일이 부득이 임금의 뜻에 거슬리게 되는 경우가 있으면 다른 정승들은 머뭇거리고 바로 말하지 못하였으나, 공은 홀로 서리(書吏)에게 붓을 잡으라 하여 반드시 말을 다하였다. 혹 임금의 노여움을 당하기도 했으나 돌아보지 않았으며, 다른 정승들은 얼굴을 붉히는 자가 있었으나 공의 안색은 화평스러웠다.

크고 넓은 도량은 산악이 솟고 못에 물이 머물러 있듯 하여 바라보기만 해도 높고 깊었다. 공이 공(功)을 이미 이루었으나 배척을 받아 정승에서 해직되어 집으로 돌아가서 자연에 맡겨둔 채 고요히 거처하며 군국(軍國)의 기무(機務)에 간여하지 않았으나 국가에 큰 의논이 있으면 더욱 힘껏 말하였다.

상촌집(象村集)》 ‘비음기(碑陰記)’

 

신흠의 평가대로라면 윤두수는 임금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고 말할 수 있는 담대한 성격의 소유자이면서 이로 인하여 닥쳐올 재앙에도 전혀 개의치 않는 당당함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하여

“크고 넓은 도량은 산악이 솟고 못에 물이 머물러 있듯 하여 바라보기만 해도 높고 깊었다.”

라고 평했을 것이다.

 

선조 등극의 기반을 닦아준 이준경

 


야사(연려실기술)를 통한 스토리텔링 8

선조 등극의 기반을 닦아준 이준경

 

조 묘정에 배향된 세 명의 대신은 이황, 이이 그리고 이준경이다. 그는 명종의 고명지신으로 명종의 유명을 받들어 선조가 왕위에 오르고 통치 기반을 닦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명신이다. <연려실기술>에 이준경의 행장이 실려 있어 그때의 공로를 알려준다.

 

이때 명종이 이준경에게 누운 침상 위로 올라오라 하시면서,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니 준경이 또한 울면서,

“후사가 결정되지 아니하고 환후가 이 같으시니, 속히 대계를 결정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은 이미 말을 하지 못하고, 손을 들어 안쪽 병풍을 가리킬 뿐이었다. 이준경이 임금의 뜻이 내전에 물으라는 것임을 알고 일이 급하여 글을 써서 아뢸 여가도 없이 직접 말로써 중전에 청하기를,

“전하의 환후가 이 지경에 이르러 이미 가망이 없습니다. 후사를 예정한 곳이 있을 것이며, 내전께서 반드시 들으신 바가 있을 것이므로 지금 전하께서 손으로 안을 가리키는가 하옵니다.”

하니, 중전도 병풍 안에서 직접 말하기를,

“을축년 위독하실 때에 덕흥군의 셋째 아들로 정하시었소.”

하였다. 이준경이 다시 다른 대신과 삼사 장관(三司長官)을 불러 같이 이 전교 듣기를 청하고 사관을 시켜, ‘덕흥군의 셋째 아들이 들어와 대통을 계승하는 것이 가하다.’는 글을 써서 친히 꿇어앉아 받들고 임금 앞에 보이며,

“전하의 뜻으로 내전에 여쭈니, 내전의 말씀이 이 같으시므로, 감히 다시 여쭙니다.”

하니, 명종이 눈물을 머금고 턱을 끄덕이며 이내 승하였다.

소재집(蘇齋集)》 〈동고행장(東皐行狀)〉

 

하성군이 바로 명종을 이어 왕위에 오른 선조이다. 명종이 후사를 정하지 못하다가 생명이 위독한 지경에 이르러서야 간신히 이준경의 주청에 의해 후사를 밝히고 그에게 보호를 부탁 했으니 선조가 명종을 이어 등극하는데 실로 막중한 역할을 하였다고 할 것이며, 명종 승하 후에 국정을 잘 운영하여 선조 초년에 변고가 없게 되었으니 이 또한 이준경의 현명하고 어짊을 알 수 있다.

그때에 명나라 사신 한림 검토(翰林檢討) 허국(許國)과 병부 급사(兵部給事) 위시량(魏時亮)이, 새로운 황제가 등극한 조서를 반포하려고 조선으로 오다가 안주(安州)에 이르러 대행왕(大行王 명종(明宗))의 부고를 듣고, 국중에 변고 있을까 의심하여 역관에게,

“전왕이 아들이 있는가.”
하고 물으므로,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니, 또,

“수상이 누구인가.”
하고 물었다.

“이준경입니다.”
하고 대답하니,

“나라 사람들이 어진 사람이라 하여 믿는가.”
하고 물었다.

“어진 정승으로 본래 덕과 도량이 있어 나라 사람들이 믿습니다.” 하였더니,

“그러면 염려 없겠군.”

하였다. 두 사신이 서울에 들어와 이준경의 거조가 화평하고 조용하며 국사가 정돈되어, 길사와 흉사가 병행되어도 하나도 예절에 어긋남이 없는 것을 보고 서로 돌아보며 탄복하여,

“나라에 어진 정승이 있는 것이 어찌 중대하지 아니한가.”

하였다. 뒤에도 허국이 매양 우리나라 사람을 만나면 이 정승의 안부를 물었다.

동고행장

 

후사를 확고히 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왕의 갑작스런 죽음은 필연적으로 후계자 옹립을 둘러싸고 다양한 이해 계층들의 마찰이 표면화되기 십상이라, 변란이 종종 발생한 것은 역사가 잘 보여준다. 그러하기에 명나라의 사신들이 변고를 근심한 것이고 수상이 어떤 인물이며 그에 대한 백성들의 평가가 어떠한가를 물어보는 것 또한 당연한 조치인데, 그들은 수상인 이준경이 백성들의 신망이 도탑다는 것을 알고 서울로 하행하여, 이준경이 명종의 상과 선조의 등극을 모두 원만하게 잘 처리하고 있음을 알고 심히 놀랐다는 내용이다.

선조 초년의 원로대신이었던 이준경과 이이는 서로 알력관계였다고 하는데, 양현 사이에 간극이 생기게 된 데에 대해 <연려실기술>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기사년(1569) 9월에 이준경이 임금을 모시고, 을사년 일에 말이 미쳐서,

“위사(衛社)할 때에 착한 선비가 혹 연좌되어 죽은 자 있어서, 그 슬픔이 지금까지 가시지 않았습니다.”

하고 말하니, 교리 이이(李珥)가,

“대신의 말이 어찌 그리 모호해서 불분명합니까. 위사라는 것은 허위의 훈공이요, 그때에 죄받은 사람들이 모두 착한 선비들이었습니다. 간흉들이 사림을 도륙하고 위훈(僞勳)을 날조하여 녹하였으므로 귀신과 사람의 분노가 오랫동안 풀리지 않았습니다. 이제 새 정치의 시작을 당하여 마땅히 그 훈공을 삭탈하여 명분을 바로 세우고 국시(國是)를 정하여야 합니다.”

하였다. 이준경이,

“말인즉 그렇지만, 선조(先朝) 때 일을 갑작스레 고칠 수도 없는 것입니다.”

하니 이이가,

“그렇지 않습니다. 명종께서 어리신 나이로 왕위에 올라 비록 간흉들에게 속임을 당하였으나, 이제는 하늘에 계신 선왕(先王)의 영령이 그 간사한 것을 통곡하시었으니, 비록 선조 때 일이라 하여도 어찌 고치치 못하겠습니까.”

하였다. 이보다 먼저 백인걸(白仁傑)이 매양 이준경을 보고 이이가 현인(賢人)이요, 또 재주는 쓸 만하다고 칭찬하였더니, 이때에 이이가 두 번이나 이준경의 말을 꺾으니, 이준경이 좋아하지 아니하여 백인걸에게 말하기를,

“자네의 이이가 어찌 그리 경솔하게 말하는가.”

하였다.

 

선조 즉위 후에 을사년의 원통함을 풀고 을사년의 위훈(僞勳)을 삭제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신중론을 편 이준경에 대해 이이가 직접적으로 반대함으로 하여, 이준경이 백인걸에게 “자네의 이이가 어찌 그리 경솔하게 말하는가.”라고 하여 비판하면서 양현 간에 틈이 벌어지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이준경과 이이가 등지는 데에는 개인적인 마찰과 불만 등 여러 가지 사연들이 있었겠지만 혹시 도학자를 자처하는 당시의 젊은 관료들에 대한 노정치가의 비판적 시각이 가미되었다면 너무 지나친 해석일까?

준경은 진실로 어진 정승이어서 그 공적이 국가에 있으므로 이이도 전부터 일컬어 왔었다. 그러나 그 높고 교만한 성질은 도학(道學)하는 선비를 좋아하지 아니하여 심지어 이황(李滉)을 가리켜 산금야수(山禽野獸)라고까지 하였으니, 퇴계의 나오기 어려워하고 물러나기 잘하는 것이 산새나 들짐승처럼 길들이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 식견의 고루함이 이와 같았고, 그 최후 상소의 뜻은 붕당을 타파하자는 데에 있었으나 결과적으로는 임금으로 하여금 사림을 지나치게 의심하는 마음이 생기게 한 것뿐이었다. 그때는 기묘ㆍ을사년의 화를 겪은 뒤이므로 이준경의 그 말을 듣고 한심스럽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어 이이가 소를 올려 힘껏 변명하지 아니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준경이 유차에서 붕당 조짐론을 제기한 것에 대하여 이이가 반박하는 소를 올린 내력을 설명한 이 글에서, 눈에 띄는 대목은

“도학(道學)하는 선비를 좋아하지 아니하여 심지어 이황(李滉)을 가리켜 산금야수(山禽野獸)라고까지 하였다”

는 대목이다. 이준경이 실제로 퇴계를 산금야수라고 지칭했는지는 모르지만 이른바 도학 선비들에 대해서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국정을 이끌어온 노 정치가의 경륜에 비추어 봤을 때 명분과 의리에만 매달리는 것은 경솔한 것으로 보였을 것이고 이런 맥락에서 도학하는 선비들을 좋아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강직 준엄한 김성일


야사(연려실기술)를 통한 스토리텔링 7

강직 준엄한 김성일

 

봉 김성일이 임진왜란 발발 전에 왜정을 살피러 일본에 통신사로 다녀온 뒤

“왜가 군사를 일으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는 보고를 했음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의 오판은 10만 양병설을 주장한 이이와 대비되어 씻을 수 없는 오욕을 그에게 안겨주었다.

통신사로 다녀 온 후에 정사인 황윤길은 일본이 많은 병선(兵船)을 준비하고 있어 반드시 병화가 있을 것이며 도요토미는 안광이 빛나고 담략이 있어 보인다고 보고한 반면 김성일은 침입할 정형을 발견하지 못했으며 도요토미는 사람됨이 서목(鼠目)이라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하였는데, 서장관 허성은 정사와 의견을 같이했고, 김성일을 수행했던 황진(黃進)도 분노를 참지 못하여 부사의 무망(誣罔)을 책했다고 한다.

상반된 보고를 접한 조정의 신료들은 정사의 말이 옳다는 사람도 있었고, 부사의 말이 옳다고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이때는 기축옥사를 거치면서 동서의 정쟁이 격화되어서 자당(自黨)의 사절을 비호하는 느낌마저 없지 않았고 요행을 바라던 조정은 반신반의하면서도 결국은 김성일의 의견을 좇아 각 도에 명하여 성을 쌓는 등 방비를 서두르던 것마저 중지시켰다.

김성일의 보고가 있은 그 다음 해에 바로 임진왜란이 발발하였으니 김성일의 오판은 틀림없지만, 동인이어서 반대 정파인 정사의 의견에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는 비방은 그가 통신사 사행 중에 보여준 행적을 가지고 미루어 보자면 지나치다 할 것이다. 정조 때 간행된 <국조인물고> ‘왜난시정토인(倭難時征討人)’ 조에 정경세가 쓴 김성일의 비명이 실려 있는데 여기에 통신사 사행 기간 중 행적을 살필 수 있는 기록들이 있다. 그 중 한 대목을 살펴보면,

 

평수길이 여러 달을 미루고 국서를 제때에 받지 않으므로 거짓말이 퍼져 잡아 두어 욕보이는 것이라 하였는데, 꾀하는 자가 말하기를,

“민부경(民部卿) 법인(法印) 산구전 현량(山口殿玄亮)은 관백이 신임하는 자인데 지금 마침 외국에 관한 일을 맡았으니, 좋게 사귀어서 꾀할 만합니다.”

하자, 황윤길이 옳게 여기고 예물이라 핑계하여 후하게 뇌물을 쓰려 하므로, 공이 말하기를,

“빈객과 주인 사이에는 본디 예물이 있으나, 사명을 전한 뒤에 행하면 예물이 되고 오늘 행하면 뇌물이 될 것입니다. 우리들이 성주(聖主)의 명명(明命)을 받들고 와서 위덕(威德)을 선양(宣揚)하여 조대(朝臺) 아래에서 머리를 땅에 대고 절하게 하지 못하였는데, 도리어 뇌물을 써서 권신(權臣)에게 아첨한다면 군명을 욕되게 하는 것이 심하거니와, 죽더라도 할 수 없습니다.”

하니 황윤길이 굽혔다.

 

국서를 받아야 사행을 마무리 할 수 있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를 미루고 있는 상황에서 정사인 황윤길이 변통책을 내어서 상황을 타개하고자 하였지만 김성일이 엄준한 경도의 원리로 이를 물리쳤다는 내용이다.

이처럼 존왕양이의 춘추대의관이 분명한 김성일이기에 사행 후에

“도요토미는 사람됨이 서목(鼠目)이라 두려워할 것이 없다”

라고 한 보고는 결코 당파의 사감이 개입되어 황윤길과 다른 의견을 낸 것이 아니요, 그의 눈에는 실지로 왜의 군장에 지나지 않은 인물로 보였을 것이다. 물론 ‘침입할 정형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그의 말은 1년 후에 발발한 왜란으로 오판이었음이 분명해진 것처럼, 주관적인 의리관이 객관 상황을 간과한 잘못은 틀림없지만 말이다.

강직준엄한 김성일의 풍모는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연려실기술>에서는 그가 선조 초년에 선조의 중망과 사림의 추앙을 받았던 노수신을 탄핵한 일화가 실려 있다.

 

공이 근시(近侍)로 있어 임금에게 가까운 귀인들을 탄핵하니,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꺼려서 전상호(殿上虎)라고 일컬었다. 일찍이 장령으로 있을 때 임금이 경연에서 묻기를,

“근래에 도무지 염치라고는 없으니 어째서 그러한가?”

하니, 대답하기를,

“대신이 뇌물 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니 소관(小官)들이 무엇을 본받겠습니까.”

하였다. 이때에 정승 노수신(盧守愼)이 수석(首席)에 있다가 나와 엎드려 아뢰기를,

“신의 일가 사람이 북방의 변장(邊將)이 되어 신에게 노모가 있다고 해서 조그만 초피 덧저고리[貂裘]를 보내왔는데 신이 물리치지 못하였으니, 성일이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대간은 직언하고 대신은 과실을 자백하니, 둘 다 옳은 일이다. 신하들이 서로 책려(策勵)하니 국사를 할 수 있겠다.”

고 하였다. 수신이 나와서 사과하니 공이 말하기를,

“옛 도를 오늘 다시 보겠네.”

하였다. 《보감(寶鑑)》 《명신록》

 

전상호(殿上虎). 이 세 글자가 김성일의 강직근엄한 성품을 잘 드러내주는 것 같다. 어전에서 젊은 신료는 대신이 뇌물을 받았다고 탄핵하고 늙은 대신은 자신의 죄를 자복했다는 이 기사는 김성일의 강직근엄함과 노수신의 온화정직한 성품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아름다운 광경임에 틀림없다.

용퇴(勇退)의 군자 성혼(成渾)


야사(연려실기술)를 통한 스토리텔링 6

용퇴(勇退)의 군자 성혼(成渾)

 

곡하면 우계가 나오고 우계하면 율곡이 병칭된다. 우계 성혼은 1535년생이고 율곡 이이는 1536년생이니 우계가 한 살 많다. 한 살 터울의 죽마고우로 인연을 맺어, 젊어서는 조선 유학 3대 논쟁의 하나인 사칠인심도심 논쟁을 벌였고, 죽은 후에는 문묘에 나란히 종사된 조선시대를 통해 빛나는 붕우지교의 선례이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이이만한 유학자가 몇 분이나 있을까. 그러다보니 성혼을 이이와 비교하다보면 성혼이 이이에게 여러 면에서 양보하지 않을 수 없는 형국이 종종 발생하게 된다. 이이의 조숙 영민함을 성혼이 어찌 앞지를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성혼의 신독 독실함은 이이보다 넉넉함이 있다. 이이가 그 친구를 평한 글이 <연려실기술>에 실려 있다.

 

이이가 일찍이 공에게 이르기를,

“군은 7번이나 임금의 명을 받았는데, 어째서 한 번도 사은(謝恩)하지 않는가?”

하니, 공이 말하기를,

“예로부터 어디 나같이 병들고 무능한 자를 부른 때가 있었는가.” 하였다.

이이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인재는 각기 그 때를 따르게 마련이다. 소열(昭烈 유비의 시호) 때에는 공명(孔明, 제갈량(諸葛亮))이 으뜸가는 인물이었으나, 만약 그를 공자ㆍ맹자와 동시에 태어나게 했다면 공명이 어찌 제일가는 인물이 될 수 있었겠는가. 오늘날 세상에 마침 인물이 적고 보니, 소명(召命)이 어찌 그대에게 내리지 않겠나.”

하였다.

석담일기

 

10살 때 아버지 청송을 따라 파산(坡山 파주) 별장으로 왔다. 12, 3살에 글의 이해력이 날로 진보하여 강의를 기다리지 않고도 남김없이 환히 알도록 통달하였다. 17세에 생원ㆍ진사 양시의 초시에 합격하였으나 병 때문에 복시(覆試)에 응시하지 못하였다. 이로부터 과거에 뜻을 끊고 오로지 학문에 정력을 기울였다.
이이가 일찍이 말하기를,

“만약 도달한 견해에 대해 말하면 내가 약간 낫다고 하지만 독실한 지조와 행동에 있어서는 내가 미칠 바가 아니다.” 하였다.

<우계행장(牛溪行狀)>

 

당시의 명유들을 평한 <경연일기> 등에서도 드러나듯, 이이의 직필은 막역지우를 논하는 데에서도 여실하게 드러난다. 잘 알려진 것처럼 선조에게 성혼을 추천한 이가 바로 이이이니, 성혼을 제일 먼저 알아준 이가 이이가 아니면 누구이겠는가? 그렇기는 하지만 성혼을 면대한 자리에서

“오늘날 세상에 마침 인물이 적고 보니, 소명(召命)이 어찌 그대에게 내리지 않겠나.”

라는 표현은 역시 율곡만이 감히 할 수 있을 법한 직언이다.

이이가 성혼에 대해

“만약 도달한 견해에 대해 말하면 내가 약간 낫다고 하지만 독실한 지조와 행동에 있어서는 내가 미칠 바가 아니다”

라고 하여 재주나 학문적 경지에서는 양보하지 않는 이이였지만 돈후한 군자풍은 자신이 도저히 넘을 수 없다고 자신을 낮추고 있다. 여기서도 율곡의 꾸밈없는 솔직한 성품을 느낄 수 있고, 성혼의 근면독실한 군자의 풍모를 충분히 가늠해 볼 수 있다.

성혼이 왜란 중 처신과 관련하여 비판을 받은 데에는 두 가지가 있었으니 난리 중에 임금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는 것이 하나요, 왜와의 화친을 주장했다는 것이 또 하나다.

특히 성혼은 어려운 처지에 놓인 임금을 돌아보지 않았다는 이유로 관작을 후에 추삭 당하는데, 선조가 몽진할 적에 피난길에 있었으면서도 임금을 찾아뵙지 않았고, 선조가 의주에 머물면서 불렀지만 역시 가지 않았고, 광해군이 이천(伊川)에서 무군사(撫軍司)을 설치하면서 역마까지 보내 출발을 재촉하였으나 병으로 사양하였다가 겨울에 명나라 군사가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온 뒤에야 비로소 행재소(行在所)로 달려갔다는 죄명이다.

성혼의 처신을 두고 반대 당파만이 아니라 서인 내에서도 의견이 분분한 것으로 보인다.

 

사계가 당초에 우계(牛溪)에게 여쭈어 들었던 바를 가지고 일찍이 말하기를, “의혹이 없지 않다.”고 하였는데, 이는 사계의 견해만이 그런 것이 아니고, 우계 문하의 황(黃)ㆍ오(吳) 등 여러 사람들도 또한 모두 의심하였던 것이다. 오늘에 와서 우계의 의리로써만 단정하고 다른 여러 의리를 모두 쓸어버릴 수는 없다. 그러나 만역 혹시 사계의 의혹으로 말미암아 드디어 우계의 출처(出處)가 의리에 어긋남을 면치 못했다고 이른다면, 선비에 죄를 얻게 될 것이다.

노서집

<노서집>은 윤선거의 문집으로 성혼을 동정적으로 평하고 있지만, 사계가 이이의 고족으로 스승의 친구임에도 불구하고 그 행적에 대해 의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면 당시 유자들의 평가의 취향을 대강은 가늠할 수 있다.

성혼의 출처에 대한 변호로는 <노서집>에 기록된 탄옹 권시의 변이 가장 좋은 것 같다.

 

탄형(炭兄 권시(權諰)의 호)은 임진 때의 일을 의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심히 높이고 믿어서 항상 말하기를,

“부름이 없으면 가지 않는 의리는 오직 우계만이 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은 배울 수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진퇴(進退)와 동정(動靜)을 한결같이 우계와 같이 한 연후에야 이렇게 처신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벼슬아치로 임명되어 나갔다가 물러갔다가 하던 자는 아무리 배우려 해도 되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이는 탄옹의 견해가 아니다. 권 좌랑이 박 승지 등 여러 어른과 상의하여 확정한 것이었으니, ‘우계가 그르다’는 이론(異論) 속에서 나와 우뚝 서서 돌아보지 않은 채 옛 도(道)를 붙들어 세운 것이었다. 포저(浦渚 조익(趙翼))도 실상 권ㆍ박의 의논과 같았다.

노서집

 

성혼이 난리에 임금을 찾아보지 않은 것이 의리에 합당한 지를 따지는 것은 경도와 권도가 교차하여 의리의 가부를 따지는 것이 용이하지 않다. 그러하기에

“처음부터 끝까지 진퇴(進退)와 동정(動靜)을 한결같이 우계와 같이 한 연후에야 이렇게 처신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여 성혼이 평시에 보여주었던 진퇴의 의리를 살펴본다면 그 정상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을 것이라는 권시의 변은 참으로 탁견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