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연제도를 비판한 율곡


역사속의 유교이야기 30

경연제도를 비판한 율곡

 

곡이 지은 ⌈경연일기⌋의 1574년 정월(正月) 기록을 보면 ‘임금이 감기로 오랫동안 정사(政事)를 돌보지 못하였다. 신하들이 문병하면 반드시 편안하다고 답하였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정사를 돌보지 못한 것이 오래되었다는 것과 신하들이 문병하면 언제나 편안하다고 답하였다는 기록이 묘한 의혹을 불러일으킨다. 임금은 감기로 오랫동안 일을 못하면서도 ‘편안하다’는 것이다.

그 해 정월은 천재 이변이 계속 일어나 궁궐 안팎으로 뒤숭숭한 때였다. 그런데 선조 임금은 감기 외에도 음식을 먹을 때마다 체했다고 한다. 1월 7일의 선조실록기록을 보면 임금이 ‘음식을 먹을 때마다 침해를 받아 체하고 내려가지 않는다. 식사를 하고서 체해 있을 때마다 자못 답답하여 편치 못하지만 먹지 않으면 편안하여 아무렇지도 않다.’고 하였다.

1월 5일 기록에는 임금이

“요사이 감기에 걸려 기운이 편하지 못하다. 집무는 다음으로 미루자.”

고 하였다. 그날 승정원과 홍문관 관료들이 병문안을 하자 임금은 ‘편안하다’고 하였다. 1월 8일에는 약을 제조하는 관리가 문안을 가서 살피자 선조는

“지난밤에는 조금 편안했다. 문안하지 마라.”

고 답하였다. 승정원과 홍문관 관리들에게도 마찬가지로 ‘문안하지 마라’고 전했다.

1월 10일에는 유희춘이 비장과 위장을 보호하는 방법과 음식물에 관한 메모를 올렸다. 선조 임금은 “그대의 메모를 살펴보니 충성이 지극하다. 치료에 도움이 있을 것이므로 진실로 아름답고 기쁘게 여긴다.”고 하는 비망기를 내려 보냈다.

1월 18일에는 20일까지 경연을 중지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율곡은 당시 승정원 동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 “신하들이 천안(天顔, 임금의 얼굴)을 오래 동안 뵙지 못하여 상하(上下)가 격조되었다. 임금께 감히 정사를 돌보시라고 청하지는 못하겠지만 어느 때고 신하들을 불러 보시라고 아뢰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고 임금에게 이렇게 아뢰었다.

“선대의 대왕들께서는 비록 편치 않으신 중이라도 신하들을 불러 보시는 것을 그만두지 않으셨습니다. 누우신 방에 들어오라 하시기까지 했기 때문에 상하가 서로 믿어 간격이 없었습니다. 임금과 신하란 아비와 자식 같은 것입니다. 부모가 병이 있을 때 자식이 얼굴을 못 뵐 도리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편하신 자리로 신하들을 자주 불러보시고 아울러 의관더러 진찰하라 하시어 증세에 대한 약제를 의논하실 뿐 아니라 수심양기(修心養氣)의 방법도 물으시면 옥체를 조섭하시는 데 큰 도움이 되실 것이요, 아랫사람들이 주상께서 신하들을 불러 보신다는 말을 들으면 주상의 증세가 대단하지 않은 것을 알고 모두들 좋아할 것입니다. 이것이 이전 대왕들 시기의 사례이므로 감히 아룁니다.”

율곡으로서는 자신이 올린 만언봉사의 시행 여부도 아직 명확히 결정이 나지 않았는데, 임금이 감기며 위장병 등의 이유로 정치를 뒷전으로 돌리니 안타까운 마음이 생겼을 것이다. 그런 마음이 율곡의 문장에 담겨있다.

율곡의 이러한 간곡한 요청에 부응하여 선조는 다음과 같이 답을 내렸다.

“근래에 없었던 일이니 경솔히 행동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 그러나 잘 조절하여 일을 보도록 하겠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직전에 율곡은 만언소를 올렸다. 하얀 무지개가 태양을 관통하는 흉조가 나타나자 선조는 널리 직언을 구하였는데, 율곡이 응한 것이다. 율곡의 만언소는 당연히 돋보여 선조는 만언소를 칭찬하고 필사하여 오도록 하였다. 아울러 관리들은 율곡의 제안을 서로 검토해보라는 명령을 내린 바 있었다.

그런데 율곡의 만언소에는 선조의 행동이나 마음가짐을 정면으로 비판한 점이 적지 않다. 선조를 모시는 관리들이 차마 할 수 없는 말도 율곡은 만언소에 거침없이 쏟아 냈다. 그중에 하나가 ‘경연의 성과는 아무 것도 없다’라는 것이다.

율곡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옛날에는 삼공(三公)의 벼슬을 두어 사(師)는 교훈(敎訓)으로 교도하여 주었고, 부(傅)는 덕의(德義)를 가르쳐 주었고, 보(保)는 신체를 잘 보전케 하여 주었습니다. 이러한 법도가 폐지된 뒤로는 사(師)·부(傅)·보(保)의 책임이 오로지 경연(經筵)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정자(程子)도 ‘임금의 덕의 성취는 책임이 경연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경연을 설치한 것은 다만 글을 놓고 강독(講讀)하여 장구(章句)의 뜻이나 놓치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 아니라, 미혹(迷惑)을 풀어줌으로써 도(道)를 밝히려는 것이요, 교훈을 받아들여 덕(德)을 더하게 하려는 것이요, 정치를 논하여 올바른 다스림을 마련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 임금들께서는 경연관을 예로써 대우하고 은덕(恩德)으로써 친근히 하여, 집안사람이나 부자지간처럼 정의(情意)가 서로 잘 통했던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경연의 역사를 간략히 소개하고 경연제도를 실시하였던 옛 임금들의 경우를 소개한 것이다.

“지금의 경연에 참가한 신하들은 대부분 학문이 부족하고 성의도 결핍되어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경연에 참여하기를 꺼리는 자가 있는가 하면, 심지어 그것을 기피하려는 자까지도 있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어찌 정성과 깊은 생각을 품고서 성상을 친근히 모시기를 바라는 사람이 없기야 하겠습니까? 근자엔 경연도 자주 열리지 않고 접견(接見)하는 일도 극히 드물거니와 예모(禮貌)를 엄숙히 하고 사기(辭氣)도 제대로 펴지 못하여, 말을 주고받는 일도 매우 드물고 강의(講議)와 질문도 자세하지 못하며, 정치의 요점과 시국의 폐단에 대하여도 물어보시는 일이 없으십니다. 간혹 한두 명의 강관(講官)이 성학(聖學)에 힘쓸 것을 권하는 일이 있었으나 역시 덤덤히 들으시기만 할 따름이었지, 몸소 시험하고 실천해 보려는 실상이 전혀 없었습니다.”

당시 경연의 문제점을 소상히 지적한 것이다. 경연에 참가한 신하들의 자질부터 경연에 임하는 임금의 정신자세와 태도까지 거침없는 비판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물었다.

“경연이 파한 뒤에 전하께서는 깊숙이 들어가 버리시니, 그곳을 쳐다보며 그저 안타까워할 따름입니다. 전하의 좌우에는 오직 내시들과 궁녀들만이 있을 따름이니 전하께서 평소에 무슨 책을 보고 계시고 무슨 일을 하고 계시며 어떤 말을 듣고 계시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가까운 신하들도 이것을 알 수 없는 형편이니 하물며 밖의 신하들이야 어떠하겠습니까?”

이어서 율곡은 이렇게 말했다.

“맹자는 아성(亞聖)이시니 제(齊)나라 임금의 존경도 지극하였는데도, 임금이 일을 하다 말다 하는 것에 대해서 크게 탄식을 하였습니다. 하물며 지금 전하를 모시는 신하들이야 옛 사람에 비하여 부족한 것이 많은데다가 그처럼 소외까지 당하고 있으니 더 어떠하겠습니까?”

그동안 신하들과 머리를 맞대고 경연활동을 잘 해오고 있다고 생각한 선조로서는 너무나 노골적인 비판이었다. 이러한 비판을 정면으로 받으면서 다시 신하들과 경연을 개최하고 그들의 의견을 묻기에는 너무 체면이 서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1574년 정월, 율곡이 만언봉사를 올린 직후 건강을 핑계로 신하들과의 면담과 경연을 뒤로 미룬 것은 아니었을까?

율곡과 친구이자 대간(臺諫)의 직책을 맡아 활동하던 유몽학(柳夢鶴)은 율곡에게 “엎어지는 것을 붙들고 위태한 것을 도우려는 뜻이 있으면 아무리 구차스럽다 하더라도 물러갈 것이 아니다.”(경연일기)라고 하였다. 아마도 율곡이 선조 곁을 떠나고 싶다는 의견을 내비쳤으니 이러한 말을 하였을 것이다.

율곡은 만언소를 올리면서 이미 선조의 한계를 절감하고 조정을 떠날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유몽학은 구차스럽지만 더 버텨서 기울어가는 국운을 다시 붙들어 세워야 한다고 권했다. 유몽학은 또 이렇게 말했다.

“비록 크게 일을 하지는 못하더라도 때에 따라 일에 따라 보좌하여 나라가 위태한 지경에 이르지 않게 하는 것 역시 하나의 도리일 것이다.”

율곡은 이러한 친구의 조언에

“그것은 나라의 정권을 맡은 대신의 일이겠지. 대신은 이미 중임을 맡았으니 마땅히 위태함을 보면 목숨을 바쳐야 하고 물러갈 수 없다. 그러나 나는 대신이 아니니 기미를 보아 일어나 행동할 것이요, 목숨을 버릴 수는 없다.”

율곡이 여기에서 ‘일어나 행동한다’는 것은 아마 조정을 떠난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결국 그는 2월에 병을 이유로 선조에게 사퇴의사를 밝혔다. 선조는 그런 율곡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으나 3월에도 재삼 사퇴를 밝히는 율곡에게

“옛 시에, ‘귀를 씻어 인간의 일을 듣지 않고, 푸른 솔 벗 삼아 사슴들과 어울려 논다’ 하였으니, 은거가 어찌 즐거움이 아니랴?”

하면서 사퇴를 허락하였다. 선조의 마지막 말에는 자신의 곁을 떠나려는 율곡에 대한 서운한 감정이 잔뜩 담겨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