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이 올린 ⌈만언봉사⌋의 각오


역사속의 유교이야기 29

율곡이 올린 ⌈만언봉사⌋의 각오

 

곡이 만언소(⌈만언봉사⌋)를 올린 뒤, 조정에서는 율곡의 상소문을 필사하여 돌려보는 등 부산을 떨었지만 실질적으로 율곡의 제안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선조는 감기나 위장병을 이유로 경연이나 관료들과의 면담도 회피하고 있었다.

1574년 1월 21일 경연의 자리에서의 일이다.

부제학 유희춘이 임금에게 비장과 위장에 해가되는 음식물에 관하여 자세히 설명을 하였다. 이에 이이가 이렇게 임금에게 건의를 하였다.

“병 치료는 단지 약물과 음식물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마음을 다스리고 원기를 양성한 다음에야 병을 고칠 수 있습니다. 옛사람의 시에, ‘오만 가지 보양도 다 쓸데없고 단지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요체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마음 다스리는 것이 근본이고 음식물은 말단이니, 진실로 마음을 다스리지 않는다면 또한 어떻게 양생(養生)할 수 있겠습니까?”

유시춘의 의견에 불만을 표시한 것이지만, 사실 당시 조정이 임금의 건강 문제라든지 간언을 담당한 관료들의 교체문제, 칙명에 들어간 문장 구절의 수정 문제 등 지엽적인 문제에 너무 몰두한 것에 대한 불만의 표현이었다.

선조 임금을 가르치고 그 의중을 누구 보다 잘 알고 있었던 유희춘이 이렇게 말을 돌렸다.

“정무와 관련된 시급한 업무를 파악하는 것은 지혜가 뛰어난 인물에게 달렸습니다. 일전에 이이가 올린 상소를 임금께서 대신에게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명령하셨으므로 모든 아랫사람들이 모두 기쁘고 즐겁게 여깁니다.”

유희춘의 말은 자신의 의견을 공박하는 율곡의 기분을 맞추어주기 위해서 꾸민 말은 아니었다. 그는 진심으로 율곡의 제안을 시급히 시행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자신은 그만한 인물이 못되니 율곡과 같은 인물에게 귀를 기울여 정무와 관련된 시급한 업무를 파악해야 된다는 뜻에서 ‘지혜가 뛰어난 인물’을 언급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임금이 대신들에게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명령하였음을 다시 확인하고 그 점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도 모두 공감을 느끼고 있다고 한 것이다. 율곡의 제안을 실천하자고 임금에게 재차 건의한 것이다.

율곡은 1574년 정월에 올린 ⌈만언봉사⌋(만언소)에서 이렇게 말했다.

“살펴보건대, 지금의 상황은 날로 잘못되어 가고 있고 백성들의 기력은 날로 소진(消盡)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권세 있는 간신들이 세도를 부렸을 적보다도 더 심한 듯하니, 그 까닭은 무엇이겠습니까? 권세 있는 간신들이 날뛰던 시절에는 앞의 임금들이 남겨주신 은택이 어느 정도 다하지 않고 남아 있어서, 조정의 정치는 혼란했다 하더라도 백성들의 힘은 어느 정도 지탱할 수가 있었습니다.”

‘권세 있는 간신들’이란 훈구파 대신들을 말한다. 율곡의 시기는 훈구파 대신들 세력이 몰락하고 사림파의 학자들이 정권을 잡아가던 시기였다. 그들 세력이 권력을 농단하던 때보다 더 상황이 나쁘게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어서 그는 이렇게 말을 이었다.

“오늘날에는 선왕들이 남기신 은택은 이미 다하고, 권세 있는 간신들이 남겨놓은 해독이 작용을 일으키고 있어서, 훌륭한 논의(論議)가 비록 행해진다 하더라도 백성들의 힘은 바닥이 나버렸습니다. 비유를 들면 마치 어떤 사람이 한창 젊었을 적에 술에 빠지고 여색(女色)을 즐기어 그 해독이 많겠으나, 혈기가 강성한 때문에 몸에 손상이 가는 줄을 알지 못하고 있다가 만년에 이르러서야 그 해독이 노쇠함을 따라 갑자기 나타나 비록 근신하며 몸을 보양한다 해도 원기(元氣)가 이미 쇠퇴하여 몸을 지탱할 수 없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백성들의 힘이 바닥나 있다는 것을 율곡은 어떻게 알았을까? 그는 13살 때 진사 초시에 합격한 이후로 29살 때까지 과거 공부를 하였다. 중간에 부모님을 여의고, 결혼을 하고, 19살 때에는 금강산에 들어가 잠시 불교에 귀의한 적도 있었다. 또 9차례나 장원에 급제를 하면서 성혼, 정철, 송익필 등 당대의 많은 지식인들과 교류를 하였다. 이 덕분에 세상을 보는 안목이 넓어지고 날카롭고 정확할 수 있는 경륜이 쌓아졌다. 그가 29살 때부터 담당했던 관직은 호조좌랑, 예조좌랑, 이조좌랑, 사간원 정언 등이었고 홍문관, 춘추관, 승정원의 고급 관료를 거쳐 외직으로 청주목사도 역임한바 있다. 조선시대 관료 중에서 핵심 엘리트에 속하였다.

율곡은 ⌈만언봉사⌋에 계속해서 이렇게 적었다.

“오늘날의 시사(時事)는 실로 이와 같으니, 10년이 못가서 화란(禍亂, 재앙과 난리)이 반드시 일어나고 말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도 열 간(間)의 집과 백 묘(百畝)의 전답을 자손에게 물려주면 자손은 또 그것을 잘 지키어 선조들에게 욕되지 않게 할 것을 생각합니다. 하물며 지금 전하께서는 조종 백 년의 사직(社稷)과 천 리의 봉강(封疆)을 물려받으셨는데, 화란이 닥쳐오려 하고 있으니 어찌하시겠습니까?”

혹자는 율곡이 십만 양병설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와 관련된 문장에 그런 주장은 없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 율곡은 10년 못가서 조선의 종묘사직과 영토를 위협하는 난리가 일어난다고 하였다. 그 말 가운데, 양병의 제안은 당연히 들어가 있는 것이다. 10만이라는 숫자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여 해결책을 구한다면 꼭 들어맞지는 않는다 해도 아주 엉뚱한 결과가 생기지는 않을 것이며, 능력이 부족하다 하더라도 스스로 구제책을 마련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물며 지금 전하께서는 권세를 잡고 계시고 사리(事理)에 밝으시며, 시국을 구원할 능력이 충분이 있으시니 무엇을 걱정하겠습니까? 소신(小臣)은 나라의 두터운 은총을 받아 백 번 죽는다 해도 보답하기 어려운 정도이니, 진실로 나라에 이익이 된다면 끓는 가마솥에 던져지고 도끼로 목을 잘리는 형벌을 받게 된다 하더라도 신은 피하지 않겠습니다.”

 

율곡의 각오가 잘 드러나 있다. 그만큼 율곡이 보기에 조선의 운명은 경각에 달려 있었다. 나라를 위해서는 자신의 한 목숨을 초개(草芥)와 같이 던지겠다는 뜻으로, ‘끓는 가마솥에 던져지고 도끼로 목을 잘리는 형벌’도 달게 받겠다고 하였다. 이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더구나 지금 전하께서는 언로(言路)를 넓게 열어놓고 의견을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시기에 그 친서를 내리심이 간절하십니다. 신이 만약 발언을 하지 않는다면 실로 전하를 배반하는 셈이 되겠기에, 충정(衷情)의 마음을 극진히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병을 앓고 난 끝이라서 정신은 흐릿하고 손은 떨리어 글이 저속하고 한 말이 중복되었으며 자획도 겨우 이루어 놓은 터이라 볼 만한 것이 못됩니다. 비록 그러나 글 뜻은 먼듯하면서도 실은 가까운 것이고, 그 계책은 어리석은 듯하면서도 실은 절실한 것이니, 비록 삼대(三代)의 제도는 아니라 하더라도 진실로 왕정(王政)의 근본이어서 그대로 시행하면 효과가 드러날 것이며 왕정을 회복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 자세히 보시고 익히 검토하시며 찬찬히 궁구하고 깊이 생각하시어 성상의 마음속에 취하고 버릴 것을 결정하신 다음, 널리 조정의 신하들에게 물으시어 가부를 의논한 후에 이를 받아들이거나 물리치신다면 매우 다행스럽겠습니다.”

삼대의 제도란 중국에서 이상적인 시대라고 칭송되는 하․은․주 삼대의 제도를 말한다. 율곡은 단지 자신이 말한 ‘그대로 시행하면’ 효과를 볼 수 있는 것이니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렇다고 그는 자신의 의견을 모두 받아들이기를 강요하지 않았다. 널리 조정 신하들의 의견을 물어 가능한 것부터 시행하면 될 것이라고 하였다.

나아가 자신의 만언소를 이렇게 마무리 하였다.

“전하께서 신의 계책을 채택하신다면 그것을 능력 있는 사람에게 맡기시고, 정성으로 그것을 시행하며 확신으로 그것을 지켜나가 주십시오. 다만 습속을 따르고 전례나 지키려는 의견들 때문에 바꾸시지 말고, 올바른 것을 그르다 하며 남을 모함하는 말 때문에 흔들리는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하시어 3년이 지나도 나라가 발전이 없고, 백성들이 생활의 안정을 찾지 못하며, 군대가 정예화 되지 않는다면, 신을 기만한 죄로 다스리시어 요상한 말을 하는 자들의 훈계가 되도록 하여 주십시오. 신의 진언(進言)이 지나칠 정도로 과격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므로 황송함을 억누를 수 없습니다.”

율곡의 생각에 3년이면 조선의 군대가 정예화 되고 외국 군대의 침입으로 인한 전란의 화는 막을 수 있다고 보았다. 나아가 백성들의 생활도 안정되어 나라가 발전할 수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선조는 율곡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시행하려는 의지가 없었다. 율곡이 너무 노골적으로 자신을 비판했기 때문일까? 율곡의 만언소 첫머리에는 조정에서

‘위(임금)와 아래 사람들이 서로 믿지 않는다,’ ‘(임금이 참여하는) 경연에 아무런 효과가 없다,’ ‘(임금이) 현명한 사람을 불러 놓고도 그들을 활용하지 않는다,’ ‘(임금이) 재변(災變)을 당하여도 하늘의 뜻에 대응하지 않는다,’ ‘(임금이 추진하는) 여러 가지 정책이 백성을 구제하는 효과가 없다.’

고 지적하였다.

유희춘이 임금 앞에서 자신을 추켜세우고 자신이 제시한 만언소의 제안을 임금이 처리하라고 했음을 확인해주자 율곡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 사례를 표하고 이렇게 한마디를 하였다.

“신은 별다른 소견이 없습니다. 다만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으로 우직한 충정을 털어놓은 것인데, 지나치게 칭찬하시니 매우 감격스럽고 또한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옛사람이 ‘죽은 말도 사들이는데 하물며 산 것이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이번에 신의 말 같은 것도 허용하셨으므로 사방 사람 중에 반드시 좋은 말을 올리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위에 계시면서부터는 말 때문에 죄를 얻은 자가 한 사람도 없으므로 사람마다 진언한 것이 적지는 않았지만 공언(空言)일 뿐이고, 한 푼 한 치의 혜택도 민생에게 미친 것이 없었습니다. 곁에서 보는 사람들은 실효가 없는 것을 가지고 일을 제안한 사람에게 허물을 돌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반드시 사기(士氣)가 떨어지게 것이니 성상께서 되도록 실효가 있도록 하시고 공언이 되지 않게 하소서. 재변을 만난 날에 성상의 마음은 참으로 놀라셨겠지만 오래 지나면 두려워하는 마음이 점점 해이해지므로 저의 천한 의견에 응답하셨던 진실한 마음이 없어질까 염려됩니다.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다스리기에 부지런해야 한다는 말은 단지 빈말일 뿐입니다. 반드시 진실로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다스리기에 부지런한 일을 실행한 다음에라야 재변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하셔야 할 것은 학문이 근본이니, 실제적인 공부를 하시되 유신(儒臣)들을 자주 접견하여 의리를 강론하셔서 상하(上下)가 서로 믿게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선조시대에 퇴계 이황, 고봉 기대승, 율곡 이이, 우계 성혼 등 훌륭한 유학자들이 활동하여 선조의 가까이에서 조언을 하였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그런 선조시대에 일본의 침략을 당하여 국토가 유린되고 종묘사직이 위험에 처한 일도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