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말이 가득한 조정


역사속의 유교이야기 28

빈말이 가득한 조정

 

조 7년, 즉 1574년 1월 21일, 강연이 끝나고 김우옹(金宇顒, 1540-1603)이 선조 임금에게 이렇게 건의를 하였다.

“선왕(先王)의 법을 멋대로 고치는 것도 해가 크지만, 폐기해버리는 것도 또한 적지 않습니다. 생각하지도 않고 행하지도 않아 방종과 해이를 편안히 여기면, 반드시 쇠퇴하여 멸망하는 화가 닥칠 것이니 경계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또 이렇게 말했다.

“성상께서 재변(災變)을 만나 두려워하시며 현명한 사람을 좋아하고 말을 살피시는 것이 지극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만, 실행하는 일이 모자랍니다. 실행을 하신다면 국가와 백성들이 실지로 복을 받을 것입니다.”

김우옹은 경상북도 성주출신으로 남명 조식의 문인이다. 그가 보기에 선조 임금의 최대의 문제점은 실행하는 능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오죽하면 임금에게

“실행을 하신다면 국가와 백성들이 실지로 복을 받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을까? 그만큼 선조는 우유부단한 인물로 결단력이 부족했다.

지도자의 리더십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결단력이 가장 중요하다. 어떤 일을 처리할 때 생각만하고 결정내리는 것을 주저하며 머뭇거리다가 기회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자신의 결정으로 생길 수도 있는 위험을 너무 두려워한 것이다. 좋게 말한다면 완벽주의자의 행동이기도 하다. 가장 좋은 결과만을 뒤쫓다보면 시작도 못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은 가장 중요한 결정은 미루면서 지엽적인 일에 몰두한다. 실행은 뒷전으로 미루고 말만을 앞세울 뿐이다. 선조는 불행하게도 그런 인물이었다.

선조실록의 편찬자들은 율곡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김우옹의 말 중에는 율곡의 만언소를 언급한 대목도 있는데 그 내용은 빼버렸다. 율곡이 지은 ⌈경연일기⌋에는 김우옹이 그때

“지금 이이(율곡)의 상소를 대신에게 보이라 하셨는데, 이이더러 대신과 함께 의논하라 하시고 또 주상의 면전에서 친히 물으시어 그의 생각을 남김없이 아뢰도록 하심이 좋겠습니다.”

라고 하는 발언도 하였다.

그리고 나서 선조 임금에게 실행력이 부족하니 국가와 백성을 위해서 실행을 하시라고 한 것이다. 김우옹은 임금의 우유부단함이 얼마나 답답하였는지, 경연이 끝난 후 율곡에게 “요사이 일은 빈말(空言)일 뿐이니, 혜택이 어떻게 백성들에게 미치겠는가?”하고 반문을 하였다.

그로부터 4일이 지난 1월 25일 ⌈선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경연의 자리에서 김우옹이 또 임금의 결단을 촉구한다.

임금이 이렇게 말했다.

“주인이 모름지기 일할 재능이 있어야 해내는 것이다. 나를 돌아보니 재능도 없고 덕도 없는데 어떻게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경연의 자리에 참석한 정유일이 답을 하였다.

“전하께서는 총명이 남들보다 뛰어나시지만 많은 신하들 중에는 일을 맡을 만한 사람이 없으므로 전하께서 큰일을 할 수 없다고 여기시는 것일 뿐입니다.”

다시 선조 임금이 말했다.

“그런 것이 아니다. 조정에 어찌 현인이 없겠는가. 삼공(三公, 좌의정, 우의정, 영의정)만 하더라도 모두가 인망이 있는 사람들인데 어찌 일을 할 수 없겠는가? 다만 내가 일을 하지 못해서이다.”

정유일이 또 이렇게 아뢰었다.

“개혁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이어서 정유일과 임금 그리고 김우옹 사이에 주자(朱子)와 송 태조(宋太祖) 그리고 삼대의 제도와 관련하여 개혁과 관련된 이야기가 오갔다. 그런데 선조는 갑자기 김우옹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대는 자질이 이미 뛰어나고 학문에 있어서도 공부한 것이 많아 경연에서 진언하는 말이 매양 정성스러우므로 내가 매우 아름답게 여긴다. 다만 나는 학문이 진보되지 않아 한마디 말도 실행하지 못하므로 항시 부끄럽게 여긴다. 학문하는 일에 대해 옛사람들이 이미 두루 말해 놓기는 했다. 그러나 오늘날 내 몸에 절실한 진언만은 못하니 그대가 물러가거든 나를 위해 잠계(箴戒) 하나를 지어 올려서 학문하는 요체로 삼도록 하라. 그러면 내가 앞으로 옆에 두고 보겠다.”

김우옹은 임금의 칭찬에 감사함을 표하고,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기강을 세워야 하고 갖가지 계책들을 써야 하며, 폐정을 개혁해야 하고 민간의 병폐를 제거해야 하는 등 해야 할 일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하지만 오직 전하의 뜻이 먼저 정해진 다음에야 할 수 있습니다. 전하께서 겸허한 자세로 능히 감당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시니 진실로 훌륭한 덕입니다. 그러나 겸손한 덕이란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서 그만두지 않고 더욱 진보하는 것입니다. (중략) 전하께서 일을 하기로 뜻을 결단하기만 한다면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겠습니까? 오직 먼저 마음속으로 정하시기만 하면, 자연히 전하를 도와 힘을 다해 일을 하는 신하가 있게 될 것입니다.”

김우옹은 나중에 여섯 가지의 잠언을 지어 올렸다. 그 내용은 뜻을 정하라(定志), 학문을 닦고 연구하라(講學), 몸가짐을 삼가하라(敬身), 자신을 극복하라(克己), 군자를 가까이 하라(親君子), 소인을 멀리 하라(遠小人) 등이었다.

율곡의 ⌈경연일기⌋에는 김우옹의 이야기 다음에 자신의 이야기가 이렇게 적혀 있다.

 

이이가 비록 임금으로부터 대우는 받았으나 말은 쓰이지 않았다. 친구인 송익필(宋翼弼)이 묻기를,

“숙현(叔獻, 율곡의 자)이 조정에 머문 지 두어 달이 지났는데 무슨 공적이 있었는가?”

하니, 이이가 대답하기를,

“비록 나라의 정권을 맡은 사람이라도 두어 달만에 효과를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인데, 하물며 말은 올리지만 시행을 하지는 못하는 사람에 있어서는 어떻겠는가?”

하였다.

 

율곡의 만언소는 비록 임금의 칭찬을 받고 조정의 관료들에게도 읽히고 알려졌지만 실행에 옮겨지지는 않았다. 친구인 송익필은 그것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율곡에게 그동안 조정에서 무슨 기여를 하였는지를 물었다. 이에 대해 율곡 자신은 행정의 집행을 담당하는 사람이 아니라 임금에게 간언을 올리는 일을 할 뿐이라는 것이다. 어찌 보면 변명 같기도 하지만 실상이 그랬다. 건의하고 제안하고 임금과 조정의 잘못을 지적만 할 수 있을 뿐, 실질적인 행정업무는 왕의 명령을 받는 다른 관료들이 하고 있었다. 요컨대 ‘자문’만 가능할 뿐이었다.

송익필(宋翼弼, 1534-1599)은 율곡보다 2살 위로 서얼출신으로 신분상의 차별을 받았기 때문에 일찍이 관직을 단념하고 고향에서 학문연구와 후학교육에 일생을 마친 인물이다. 율곡과는 친구로 사귀었는데, 예학과 성리학, 경학에 능한 학자였다. 경연일기에는 계속해서 이렇게 기록하였다.

 

송익필이

“식자들은 숙헌이 이번에 조정에 오래 머무르니 지난번 퇴거(退居)한 일과는 다르다고 의심하고 있더라.”

라고 말했다. 이이는

“물러가려 하나 혹 임금의 마음을 돌릴 수 없을까 염려되고, 머물러 있고자 하나 말을 채용하지 아니하므로 거취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라고 하였다. 이에 송익필은

“식자들은 임금의 마음을 결코 돌릴 수 없다고들 하던데…”

라고 하였다. 이이는 이에 대해

“내가 듣기에는 성현은 그와 같이 단정적인 말은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

라 하였다.

 

송익필이 전하는 여론은 선조의 마음이 이미 개혁과는 멀다는 것이다. 겉으로 화려한 말을 남발하고 훌륭한 관리들을 불러 이러저러한 말을 듣고 있지만 그것은 모두 일종의 쇼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이었다. 율곡은 이에 불쾌한 반응을 보이고 있지만 내심으로는 동감을 하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