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구(李承龜:1865~1931)


이승구(李承龜:1865~1931)                                 PDF Download

 

북 괴산(槐山) 사람이다.  유인석(柳麟錫) 의진에 군자금(軍資金)을 지원하고,  의병 대장 이강년(李康䄵)이 순국(殉國)하였을 때 제문을 지었다.
1895년에 일제는 국모(國母)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지르더니,  이어서 친일정권(親日政權)을 사주하여 단발령(斷髮令)과 복제개혁(服制改革)을 강행하였다.  이에 우리의 민중과 유생들은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친일정권에 항거하였다.
그 가운데도 유인석 의진은 다른 의병진과는 달리 전투력을 갖춘 의병으로 가장 활발하게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승구는 유인석 의진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고 뒤에서 지속적으로 군자금을 지원하여 의병들이 대일 항전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 후 을미의병이 해체되고 유인석 의진이 만주로 망명하였을 때에도 그는 계속해서 유인석과 연계를 맺고 활동을 지원하였다.  이후 일제는 1904년 2월 대한제국과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강제로 체결하여 침략을 본격화 하였으며,  마침내 1905년 11월에 ‘을사늑약(乙巳勒約’으로 자주적 외교권을 박탈하고,  이듬해 1월에 통감부(統監府)를 설치하여 통치권을 장악하면서 우리나라를 준식민지 상황으로 몰고 갔다.

이에 격분한 우리 민족은 본격적인 항일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1907년 7월에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에 따라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키자, 우리 군대는 대거 의병대열에 참여함으로써 의병운동은 급기야 전국적인 국민전쟁으로 확대 되어 갔다.  그때 이승구는 유인석과 이강년 등과 함께 거의를 하고자 하였으나,  공교롭게도 부모의 병환이 위중하여 동참하지 못하였다.  의병대장 이강년은 그에게 편지를 보내어

“지금의 일은 먼저 내적(內賊)을 토멸한 후에 타적(他賊)을 의논해야할 때 입니다.…중략…
형은 거상(居喪) 중이라 감히 같이 고생할 것을 바랄 수는 없지만 참진(參陣)한 것이나 그 요체는 한가지입니다.”

라고 하면서 의거에 동참하지 못한 그를 위로하였다.

이는 그들의 친분 관계가 각별 하였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거니와,  그 뒤 1908년에 이강년이 순국(殉國)하자 그가 직접 제문(祭文)을 지어 의병장의 업적을 기릴 수 있었던 것은 단순한 친분 관계에서 이뤄진 것이 아니라 서로간의 생사를 함께하겠다는 의기가 투합된 나머지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러한 우국충정(憂國衷情)과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정신을 높이 사서 정부에서는 고인(故人)의 공훈(功勳)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포장(建國褒章)을 추서하였다.

<참고자료>
군자금기부자명단
위당선생삼세록(박한설편, 1983) 177면
의암문하동문록
벽진이씨대동보(1962) 2편108면
운강이강년의서신(1907.6월)
치당이승구유고(간행년도미상) 하권57·77면
국가보훈처자료(http://www.mpva.go.kr/narasarang/)

이병운(李柄運: 1858∼1937)


 

이병운(李柄運: 1858∼1937)                               PDF Download

 

관은인천(仁川), 자(字)는 덕칠(德七), 호(號)는 긍재(兢齋) 또는 창계(蒼溪)이며, 이억상(李億祥)의 아들로 고려조(高麗朝)의 소성백(邵城伯)을 지낸 이허겸(李許謙)의 후손이다.   그는 기호학(畿湖學)의 적전(嫡傳)인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과, 심석재(心石齋) 송병순(宋秉珣)형제에게 사사하여 긍재(兢齋)란 호를 받았다.

1888년(고종25)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경학(經學)으로 도천(道遷)을 입어 관직에 올랐으나 당시 사회적인 변란으로 시사(時事)가 불길(不吉)하자 낙향(落鄕)하였다.
1896년에 도백(道伯)이 참서관(參書官)의 직첩을 내렸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문집간행(文集刊行)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만년에 채국정(採菊亭)을 짓고 후진양성과 학문에 전념하였다.

서신(書信)의 왕래는 서찬규(徐贊奎), 장승택(張升澤), 민영환(閔泳煥), 최익현(崔益鉉), 박해규(朴海奎), 우성규(禹成圭) 등과 주로 하였으며,  문집으로는《긍재집(兢齋集)》14권 4책이 있다.
이 문집은 목활자본(木活字本)으로 되어있으며,  1942년 그의 동생 병선(柄選)이 편집하여 간행한 것으로, 서문과 발문은 없고,  끝에 간기(刊記)가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의 시(詩) 작품은 대부분 자연과 인생을 소재로 읊은 것과 차운한 것이 많다. <춘우후음(春雨後吟)>은 도연명(陶淵明)의 의경(意境)을 본떠서 지은 은일적(隱逸的)인 분위기를 묘사하고 있다.  그 밖에 최익현(崔益鉉)을 따라 전국의 유적지를 다니며 차운(次韻)한 시와 황재찬(黃在瓚)과 안효제(安孝濟)등 명사들에 대한 만사(輓詞)도 주목해 볼 만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고 <청오현승무소(請五賢陞廡疏)>는 1888년에 성균관 유생(成均館儒生)으로 있을 때 올린 것으로, 김정(金淨), 김상헌(金尙憲), 민진원(閔鎭遠), 권상하(權尙夏), 이재(李縡) 등의 문묘배향을 요청하는 상소이다.  그는 이 상소문에서 도학(道學)은 사문(斯文)의 준칙이요, 유현(儒賢)은 국가의 원기(元氣)라고 지적하면서,  다섯 유현의 도학과 덕업과 행적을 일일이 열거하여 소상히 밝혔다.   그런가하면 그의 작품 중에 <등명(燈銘)>과 같은 글도 있어 살펴보기로 한다.

밝혀 놓은 등불 하나가                一點燈火
내 책상 위에 놓여있어                在我案頭
밝은 빛이 환히 비추니                 光明炯澈
마치 태양이 비춘 듯하네           若太陽流
이것을 가지고 비추면                 以之爲燭
어둠을 죄다 밝히리니                可破黑窣
너의 지시를 따라서 가면           賴爾指南
앞서간 자취를  찾게 되리라     得尋前轍
어찌 하면 남은 빛을 빌려와     安借餘光
사방에 두루 미치게 할까           遍及四方
시절을 어찌할 수 없으니           時也無奈
외롭게 임당만 비출 뿐이네      孤照林堂
성현의 책을 대하고 있으니      對越聖賢
해는 저물고 밤만 깊어가네      歲晏夜長

등불의 상징적인 이미지는 어둠을 밝히는 데 있다.  그러나 작자는 이작품을 통해 단순히 등불을 밝혀 놓고 글 공부를 하려는게 아니다.  작자는 이 작품을 통해 현실과 자신과의 괴리현상을 잔잔한 목소리로 읊조리고 있는 것이다.

시운이 그러하고 시절이 그러한 현실을 자신의 능력으로 어찌하지 못하니 그저 안타까운 마음을 안고 그저 바람만 가진 채 긴 긴밤을 조용히 보내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하는 그런 작품이다.  당시의 암울했던 시대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그런 작품이기도 하다.

서(書)에는 송병선(宋秉璿), 송병순(宋秉珣), 서찬규(徐贊奎), 장승택(張升澤)등의 선배 학자들에게 사칠론(四七論)과 이기설(理氣說)과 예설(禮說)에 관하여 질문한 것과 김유연(金有淵), 민영목(閔泳穆), 민영환(閔泳煥) 등 당시 정부의 고위 관리에게 보낸 것, 기타 김두한(金斗漢), 서건수(徐健洙) 등에게 경의(經義)와 예설에 관하여 답한 것 등 그 분량이 방대하게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특기 할 만한 것은 외손자 구자덕(具滋德)에게 답한 짧은 편지가 있다.   그 내용을 잠시 살펴보기로 한다.

너는 아직 나이가 어린데 혹시라도 덧없이 들떠서 지낼까 염려되어 곁에 두고 진보가 있기를 바라고자 하였다.  그런데 지금 장산(獐山)으로 가서 글을 읽겠다고 하니 너는 또한 이 학문에 뜻을 오로지 두려하느냐?  한결같이 여기에 마음을 붙이고 공부해 간다면 무슨 이치인들 뚫지 못 할 것이며 무슨 일인들 이루지 못하겠느냐?  다만 유종(有終)의 미(美)를 거두지 못할까 염려 되니,  세상이 변했다 고조금도 저상 되지 말고,  도가 어긋 났다고 혹시라도 해이 하지 말거라!  공자의 말씀에
“도가 사람에게서 먼 것이 아니다.” 라고 하였으니, 다만 일용사물(日用事物)의 사이에 있을 뿐이다.  또 “죽은 뒤에야 그친다.” 하였으니 어찌 잠시라도 머뭇거리며 동요 할 수 있겠느냐?  이를 생각도록 하여라.

길지 않은 짧은 편지를 외손자에게 답장으로 보낸 것이다.  이 글에서도 시대의 변화에 대하여 흔들리지 말고 글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당부를 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타이르는 자상스런 말속에 애정 어린 충고가 담겨 있기도 하지만 , 그 보다도 시대가 변해가고 있는 현실을 어찌해야 할 것인가에 항상 긴장하고 있었던 듯하다.

그러다보니 나이 어린 손자가 세상 모르고 들떠서 지낼까봐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한말의 유학자들이 대부분 이러한 정서를 지니고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한통의 편지가 아닌가 생각한다.

잡저(雜著)의 <계상어록(溪上語錄)>과 <채국정만록(採菊亭漫錄)>은 경의(經義)와 이기(理氣), 심성(心性),  기질(氣質)  인물성(人物性) 등 성리학에 관하여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 내용으로 되어 있으며, <회유 대구유림문(回諭大邱儒林文)>은 대구의 유림들에게 알리는 글이다. 또 그가 쓴 경인계첩(庚寅契帖)의 서문은 1916년에 대구 출신 유학자인 우재악(禹載岳)을 기리기 위하여 지역 유림들이 결성한 계첩에 대한 서문으로,  계원들이 그의 학문을 배우고 도를 본받는데 게을리 하지 않기를 다짐하면서 작성한 것이다.  이 글은 조선 후기부터 일제시대까지 대구지역의 유림의 동향과 성향을 엿볼 수 있는 자료라는 점에서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다.
<참고문헌>
《國譯兢齋文集》, 彩菊亭刊
《조선후기향약연구》, 鄕村社會史硏究會
《嶺南鄕約資料集成》, 嶺南大學校出版部.

이현익(李顯益: 1678∼1717)


이현익(李顯益: 1678∼1717)                             PDF Download

 

의 자는 중겸(仲謙), 호는 천산재(天山齋)· 낙오헌(樂吾軒)· 정암(正菴)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조부는 이시휘(李時輝)이며 부친은 이홍(李泓)이다. 어머니는 함양 박씨(咸陽朴氏)로 주부(主簿)인 박선(朴銑)의 딸이다.  그는 반남 박씨(潘南朴氏)인 박태하(朴泰夏)의 딸과 혼인하여 3남 1녀를 두었다.

그가 활동 했던 조선 후기는 호락논쟁(湖洛論爭)이 한창이었다. 호락논쟁은 노론(老論) 계통의 학자들 사이에서 사람과 사물의 성(性)이 같은가 다른가를 놓고 벌였던 논쟁이다.
사람과 사물의 성이 다르다는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을 주장한 한원진(韓元震:1682∼1751)의 견해에 동조하는 학자들은 주로 호서(湖西:지금의충청도일대) 지방에 거주하였고,  사람과 사물의 성이 같다는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을 주장한 이간(李柬:1677∼1727)의 견해에 동조하는 학자들은 주로 낙하(洛下:지금의서울일대) 지방에 거주하였기 때문에 ‘호서와 낙하의 논쟁’ 이라 명명하였던 것이다.

이현익은 노론에 속하는 유학자로서 송시열(宋時烈:1607∼1689), 김창협(金昌協:1651∼1708), 권상하(權尙夏:1641∼1721)의 계통을 이어 예론(禮論) 등 에서도 송시열을 적극 변호하였고 호락논쟁에서도 스승인 김창협을 이어 호론을 지지하였다.

우선 그가 평소에 추구해 온 것이 무엇이었는가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그의 호(號)가 주목된다.  그의 문집인《정암집(正菴集)》7권에는 <정암기(正菴記)>가 실려있는데,  자신의 호를‘ 정암(正菴)’ 이라 지은 이유를 밝히고 있다.

사람의  한 몸은 마음이 주인이 되니, 이 마음이 바르지 못하면 세상의 모든 법칙이 공허하게 된다. 의(意), 지(志), 식(識) 또한 이 마음속의 물(物)이니 마음이 더욱 바르지않을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자사(子思)가 말한 존덕성(尊德性) 존덕성(尊德性): 《중용장구(中庸章句)》 27장에 보이는 구절이다. 주자의  주(註)에 의하면, “하늘로부터 받은바른 이치가 덕성(德性)이고, 이를 공경하고 받들어서 지키는 것이 존(尊)이다.”라고 하였다.이며, 맹자(孟子)가 말한 존심양성(存心養性) 존심양성(存心養性): 존양이라고도 한다. 《맹자 》 <진심(盡心)상(上)>에서 “자기의 본심을 간직하고 자신의본성을 기르는 것이 바로 하늘을 섬기는 것이다”라고 한 데서 비롯하였다. 여기서 심은 측은·수오·사양·시비의4가지 마음으로 사단이라 하며, 성은 천부의 선한 성을 가리킨다. 존심양성이란 인간의 본심인 사단의 보존을통해 인간이 천부적으로 부여받은 본성인 인의예지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이며, 정자(程子)와 주자(朱子)가 말한 거경(居敬) 거경(居敬): 항상 마음을 바르게 가지고 몸가짐을 조심하여 덕성을 닦음을 이른다.   공부가 이것이다. …중략…

지금 심(心)을 근본으로 삼고 의(意)를 긴요하고 절실하게 하며 지(志)와 식(識)을 입문하는 곳[入門處]으로 삼아서 공부를 하여 매일 새롭게 한다면 몸도 역시 자연스럽게 바르게 될 것이고 언행도 한결같이 바른 데에서 나올 것이니, 이와같이 한다면 성인(聖人)과 같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몸이 위주가 되고 의(意)와 지(志)와 식(識)을 포괄하는 심(心)을 바르게하여성인의경지에이르겠다는의지를‘정(正)’이란한글자에담고있으니,이를통해그가평소에무엇을추구해왔는지를충분히짐작할수 있겠다.
그리고 그는 40세의 짧은 삶을 사는 동안 관직(官職) 생활보다는 학행(學行)으로 더 이름이 알려졌으며,  문장(文章) 보다는 경술(經術)에 더 명성이 있었다.  이와 관련된 일화가 《조선왕조실록》영조 34년 11월  6일조의 기록에 보인다.

“지금 강(講)하는 《대학(大學)》은 바로 임진년에 사부(師傅)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는데, 공부를 끝내지 못하고 7년 동안 시탕(侍湯)하다가 신축년에 저군(儲君)이 되어서비로소 강을 끝마치게 되었다.” …중략…

또 하교하기를,

“옛날에 이곳에서 내가 가르침을 받은 것은 바로 고인이 된 사부 이현익(李顯益)으로부터였는데, 오늘 일어나는 감회때문에 내 마음이 서글프다. 그 아들을 해조(該曹)에서 특별히 채용하도록 하라.”

영조(英祖)가 동궁시절에 이현익으로부터 《대학(大學)》을 배우던 때를 잊지 않고 그의 자식에게까지 벼슬을 내려주도록 명한 것은 대단한 은전(恩典)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이현익이 경술(經術)에 조예가 깊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여호(驪湖) 이양행(金亮行:1715∼1779)이 쓴《정암집(正菴集)》의 서문에서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선생이 삼주(三洲)에서 강학 하실 때 따르던 선비가 매우 많았으나,  선생의 설(說)을 독실하게 믿어 목표로 삼고 정성을 다하여 생각하고 혼신을 다해 실천[精思力踐]우뚝 명가(名家)를 이룬 자로는 정암이 최고였다.”

라는 평을 보아도 그의 학문적 성취가 어떠 했는가를 충분히 가늠할 수 있겠다.  다시 서당(西堂) 이덕수(李德壽:1673∼1744)  이덕수(李德壽): 이덕수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전의(全義)이며 자는 인로(仁老), 호는 벽계(蘗溪) 또는서당(西堂)이다. 참판 징명(徵明)의 아들이며 김창흡과 박세당의 문인이다. 가 남긴 그에 대한 만시(輓詩)를 살펴보기로 한다.  제목은 <이중겸을 애도하는 만시[李仲謙挽]>로 되어 있다.

그대 같이 호학한 이 세상에 누가 있으랴
好學如君世孰方

삼주노자 그댈 보고 승당을 허여하셨네
三洲老子許升堂

분석해온 의리들은 명주실처럼 세밀하고 주자의 화상을 그려놓고 <회암선생 주문공 화상찬(晦庵先生朱文公畵像讚)>을 지었다. 이 화상찬에서 주자의 학문을 기리면서 “현묘하고 은미한 의리는, 누에실과 소털처럼 자세히 분석했네. 마음은 넓고 넓어서, 바다처럼 넓고 하늘처럼 높았네. 호걸스런 재주요, 성현의 학문이었도다. 경성과 상서로운 구름이요, 태산과 교악이셨네.
[義理玄微, 蠶絲牛毛. 心胸恢廓, 海闊天高. 豪傑之才, 聖賢之學. 景星慶雲, 泰山喬嶽.]”라고 찬양한 것에 전거를 둔 표현이다.

柝來義理蚕絲細

강학하던 곳 풍류는 고비 고비(皐比): 범의 가죽. 강석(講席). 옛날에 스승이 앉는 자리에는 반드시 호피(虎皮)를 깔았으므로 강석(講席)을일컫는 말로 쓰인다. 가 향기롭네
講處風流臯比香

백리 밖의 현악 현악(絃樂): 노(魯)나라의 자유(子遊)가 무성(武城)의 수령이 되어 예악(禮樂)을 가르치자, 고을 사람들이 모두현(絃)을 뜯으며 노래하였다고 한다. 《논어(論語)》 <양화(陽貨)>편에 보인다. 소리 무성마을 재상인지
百里絃歌武城宰

오랜 세월 믿기 힘든 수문랑 수문(脩文): 수문은 전장제도(典章制度), 예악교화(禮樂敎化) 등의 문교를 닦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이 되더니만
千秋疑信脩文郞

선유동의 하늘에 뜬 마음 아픈 저 달만이
屳遊洞裡傷心月

밤이 되면 맑은 빛이 옥량 위를 비춰주네
夜夜淸輝滿屋梁  《서당사재(西堂私載)》 1권에 실려 있다.

시의 수련(首聯)에서는 이현익이 공부하기를 좋아하여 김창협이 그의 학문적 성취를 인정하여 준 것을 묘사하였다.  함련(頷聯)에서는 주자(朱子)와  같이 의(義)와 리(理)를 치밀하게 고증하였으며 훌륭한 강의(講義)를 하였다고 했다.  또한 경련(頸聯)에서는 그가 예악(禮樂)을 숭상하였음을 언급하고,  미련(尾聯)에서는 그런 그가 세상을 떠나 슬픈 작자의 심정을 달에 투영시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의 생애와 업적·있겠다.

<참고문헌>
이현익, 《정암집(正菴集)》.
이덕수, 《서당사재(西堂私載)》.
전재동, 『正菴李顯益의論語 해석연구』자료소개와 「論語說」분석
을중심으로」, 한국국학진흥원, 『국학연구』18,2011.
한국고전종합DB(http://db.itkc.or.kr/)

이존중(李存中: 1703∼1761)


이존중(李存中: 1703∼1761)                               PDF Download

 

관은 전주(全州), 자는 경이(敬以), 호는 척재(惕齋) 또는 하당(荷堂)이며, 이중휘(李重輝)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영의정 이유(李濡)이고,  아버지는 서윤 이현숭(李顯崇)이며, 외조부는 홍수헌(洪受瀗)이다.  그리고 그는 광평대군(廣平大君)  이여(李璵)의 후손이다.

그는 사마시(司馬試)에 장원하여 진사가 되고,  정릉참봉(貞陵參奉)을거쳐 익위사 사어(翊衛司司禦)를 역임 하였으며 세자 시강원(世子侍講院)에 출입하여 자주 의견을 진술하였다.  1750년 (영조26)에 합천군수(陜川郡守)로 있으면서 다시 식년문과(式年文科)과에서 삼장원(三壯元: 초시·복시·전시에서 모두 장원을 차지함)을 석권하고 통정 대부(通政大夫)의 품계에 올라 여주목사(驪州牧使), 동부승지(同副承旨) 등을 역임하였다.

1751년 (영조27)에 대사간으로 있으면서 권신 김상로(金尙魯)형제를 신임사화(辛壬士禍) 당시의 적당(賊黨)으로 지목하여 탄핵했다가 대신을 능욕했다는 죄명을 입어 거제도(巨濟島)로 귀양가게 되었으나,  굽히지 않고

“신은 국가의 세록지신(世祿之臣)으로서 나라의 일이 날로 비뚤어지는 것을 목격하고 그냥 있을 수  없어 죽음을 무릅쓰고 이 글을 올립니다.”

라고 하여 강경한 자세를 취하여 투철한 애국심을 보이기도 하였다.

이때 부제학 윤급(尹汲)이 차자를 올려,

“이존중(李存中)은 젊어서부터 명망을 짊어진 선비로서 대단(臺端)의 우두머리가 되어, 우직한 충성심에 북받쳐 숨김 없이 말을 다하였으니,  강직한 기풍이 존중할 만한 것이 있습니다.  진실로 마땅히 너그럽게 용납하고 용서해서 퇴패한 세도(世道)를 부지해야 될 것인데,  대조(大朝)의 처분이 지나치게 엄중하여 불러서 힐책하고 즉시 먼 바다로 귀양을 보내시니,  이것이 어찌 성명(聖明)의 세상에 바라는 바이겠습니까?  아, 언로(言路)의 열리고 닫힘은 실로 나라의 흥망에 관계되는 것이니,  결단코 가볍게 꺾어서 국맥(國脈)을 손상시켜서는 안 됩니다.”

라고 하며,  이렇게 하는 것은 사기(士氣)를 위축시키는 처사이므로 권장 할 일이 못된다고 극력 구원하자, 특별히 파직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는 4개월 뒤에 다시 정의현(㫌義縣)으로 옮겨졌다가 1753년(영조29) 풀려난 뒤 예조참의(禮曹參議)에 제수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낙향(落鄕)하여 학문 연구에만 전심하면서 강직한 삶을 추구하였다. 오원(吳瑗) 등과 사귀는 한편 특히 윤심형(尹心衡), 이태중(李太重) 등과는 더욱 친밀하게 지냈다.

그는 평소에 강직하고 합리적인 사고를 가져 사색당파(四色黨派)의폐단을 제거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가 김상로(金尙魯)형제의 비위를 힘써 탄핵한 공로를 인정받아 그의 사후 정조 때에 와서 이조판서(吏曹判書) 겸대제학(大提學)에 추증되었다.
이와 관련한 기사로 《일성록(日省錄)》의 정조 즉위년 4월 13일조에 보면 ‘고(故) 대사간 이존중(李存中)에게 특별히 문형(文衡)을 증직하도록 명하였다.’ 라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는 참찬관 홍국영이,

“고 대사간 이존중은 흉적 김상로(金尙魯)가 정권을 훔친 때를 당하여 한 통의 소를 장하게 진달하여 힘써 흉적을 토죄하다가,  결국 두번 이나 험한 바다를 건너 10년이나 귀양살이를 하다가 죽었으니,  선대왕께서 뒤늦게 안타까워하시는 하교가 여러 차례 연석에서 나왔습니다. 지금은 흉적 김상로의 죄상이 드러나 주벌이 행해졌으니,  조정에서 포장(褒獎)하는 도리로 보아 의당 특이한 은전(恩典)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라고하였다.

정조가 하교하기를,

“참찬관의 말이 옳다.  내가 매우 비통해 하고 있다. 언로(言路)를 장려하고 사대부의 기풍을 수립하는 도리에 있어 의당 포증(褒贈)하는 은전이 있어야 할 것이다.  더구나 그는 문형에 준점(準點)된 자이니, 대제학을 특별히 증직하라.”

하여 내려진 증직이 었다.

그 뒤 1768년(영조44)에는 그의 아들인 문학 이상악(李商岳)이 부친의 일에 대하여 상소하여 아뢰기를 ,

“신이 지극히 애통한 마음이 있는데, 어찌 관직을 논할 수 있겠습니까?  아! 신의 망부(亡父)인 신(臣) 이존중(李存中)이 간관(諫官)의 이름을 가졌으니,  마음 속에 있는 것을 숨기자 않는 것은 충성[忠]을 위한 한 가지 일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런데 네번이나 바다의 험한 파도를 건너고 아홉 번이나 죽을 고비를 당했으면서도 후회함이 없었으며,  몰(沒)함에 임해서는 심장을 가리키면서 신에게 말하기를,

‘나는 그만 지만 너는 힘쓸지어다.’

라고 하였으니, 아비와 아들이 죽고 살 즈음에 그 말이 몹시 슬픕니다.”

라 고호소 하였다.  결국 영조는 나이 젊은 신진(新進)의 무리가 ‘충(忠)’자를 함부로 거들먹 거리며 아비에 대한 억울함을 호소하였다고 지목하여 이를 억제하고 윤허해 주지 않았다.

이 기록들을 통하여 이존중이 강직한 삶을 살았던 것을 본받아 그 아들 역시 그러한 삶을 외면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이 글을 보면서 그 아버지에 그 아들 이라는 말이 새삼 다가오는 것을 느껴보았다.
저서에는《척재집(惕齋集)》, 《국조명신록(國朝名臣錄)》등이 있다.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일성록(日省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척재집(惕齋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의철(李宜哲: 1703~1778)


이의철(李宜哲: 1703~1778)                               PDF Download

 

관은 용인(龍仁),  자는 원명(原明), 호는 문암(文庵)이며,  아버지는형조좌랑(刑曹佐郎) 이세운(李世運)이고,  외조부는 성집(成鏶)이다. 조여벽(趙汝璧)의 사위이며, 이재(李縡)의 문인이기도 하다.

1727년(영조3)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진사가 된 뒤 장릉참봉(長陵參奉)과 군자감봉사(軍資監奉事) 등을 역임하고, 1748년(영조24)에 춘당대 문과(春塘臺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이듬해 검열(檢閱)이 되었다.
1752년(영조28)에 정언(正言)이 되어, 임금이 대각(臺閣)의 진언(進言)을 지나치게 척벌하여 언로(言路)가 막혔다고 상소했다가 영조의 노여움을 사서 대정(大靜)으로 귀양을 갔다.

1753년(영조29)에 귀양에서 풀려나 다시 정언이 되고, 그 후 수찬(修撰), 부교리(副校理), 지평(持平), 대사간(大司諫),승지(承旨)회양부사(淮陽府使)를 역임하였다. 1769년(영조45)에 영조가 홍봉한(洪鳳漢)에게

“이철이 고서를 많이 읽고 성격 또한 침착하고 깨끗한데 너무 오랫동안 침체시켜 두었다.”

고 말하여 발탁 할 뜻을 보이고 이어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을 제수하였다.

그는 또 도승지(都承旨)가 되어 기로문무과(耆老文武科)의 시험을 주관하기도 하였다.
그가 공조참판(工曹參判)으로 발탁 된 뒤 대사간(大司諫)이 되고, 대사성(大司成)으로 재직 할 당시에 전라도 광주 유생유적(柳迪) 등이 박세채(朴世采)의 문묘종향(文廟從享)을 방출(放黜)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유적 등은 청금안(靑衿案)에서 삭제되고 호남 유생으로 관학(館學) 및 경성(京城)에 있는자는 쫓겨나게 되었다.  이때 그가

“선비는 국가의 원기(元氣)이니 관용을 베풀것”

을 청하였다가 진도(珍島)로 유배되었다.

1775(영조51)년에 유배지에서 풀려나 다시 승지(承旨)가 되고, 1776년(영조52)에 영조가 승하하자,  찬집청당상(纂輯廳堂上)이 되어 채제공(蔡濟恭) 등과 함께 영조의 행장(行狀)과 시장(諡狀)의 찬술을 주관하였다.  그 뒤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 예조참판(禮曹參判),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문암집(文庵集)》이있다.

그리고《조선왕조실록》의 영조 25년조의 기사를 보면, 영조(英祖)가 직접 <임문휼민의(臨門恤民儀)>를 짓고 경조(京兆)의 관원에게 명하여 궁민(窮民)을 선발하여 아뢰도록 한 일이 있다.  그리고 다시 의주(儀註)를 지어 예조(禮曹)에 내리면서

“사민(士民) 가운데 사부(士夫)의 과녀(寡女) 및 그 밖에 받게하라.”

하고, 승지 윤광의(尹光毅)에게 이르기를,

“조사(朝士)서파직되어 가난한 자도 마땅히 구휼하여야 할 것인데,  그들이 스스로 와서 받겠는가?”

하자, 윤광의는 임금이 내리는 물건을 어찌 직접 받지 않겠느냐고 하였다.  이에 이의철은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

“임금이 내리시는 것이 비록 소중하기는 하나, 신하의 염의(廉義)도 또한 가것이 아닙니다.”

라고 하였고,  윤광의가 다시 반박을 하자, 그는

“선비의 처신에 어찌 지위의 고하(高下)가 있다하여 스스로 그 몸을 가볍게 행동 하겠습니까?”

라고 물러서지 않고 강력히 주장을 하자, 영조는

“좋다.  내가 이로 인하여 조사를 욕 되게 할까 두렵다.”

하고, 이어영갑(令甲)을 밝혀 전의조관(朝官)은 종들로 하여금 대신 받도록 한 일이 있다.  이는 이의철이 평소에 선비의 정신이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에 대하여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 보아야 할 듯하다.

그 뿐만 아니라 《국조보감(國朝寶鑑)》제 69권, 정조(正祖) 1년조에는 의철(李宜哲)이 상소하여,

“예경(禮經)에 ‘장례 지내기 전에는 상례(喪禮)에 관한 글을 읽는다.’ 고 하였고, 열 조(列朝)의 고사에는 또 산릉(山陵)을 마치기 전이라도 강연(講筵)을 폐지하지 않은 규례가 있습니다.”

라고 하자,  정조가, 비답하기를,

“이미 경의 박학함에 대해서 듣고 경을 시강관(侍講官)으로 삼고자 하였었다.  경이 상소하여 청한 바가 옳다.”

하고, 이어 유신(儒臣)에게 명하여《예기》의 상례에 관한 편(篇)을 초록하여 진강하게 한 기록이 보인다.  이는 이의철이 예설(禮說)에 조예가 깊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 는사례 이기도 하며,  그가 《의례주(儀禮註)》를 낸 것과 서로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일찍이 갑산부사(甲山府使)로 재임 할 당시인 1751년(영조 27)에 백두산을 유람하면서 그 일정과 감회를 소상하게 기록해 놓은 글이 그의 문집에 실려 있다.  그것이 곧 <백두산기(白頭山記)>이다.  그 기록에 의하면

“이 산의 형태는 두루뭉술한데 오직 한 곳에 돌산이 솟아 그 꼭대기가 열려서 사방의 일곱 봉우리가 에워 싼 가운데 큰 못이 있으니 이것이 이른바 천지라는 곳이다.”

라고하였다.

이의철의 <백두산기>가 알려지기 전까지는 1764년(영조 40)  박종(朴琮)의 <백두산 유록(白頭山遊錄)>이 최초의 백두산 기행문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이의철은 그보다 10여년 이전에 이미 백두산을 다녀와서 기행문을 남겨 놓았던 것이다. 학계에서는 현재 이의철의<백두산기>가 박종의<백두산유록>과 함께 250여년 전의 백두산 정황을 기록으로 알려 주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하고 있다.

<참고문헌>
《영조실록(英祖實錄)》
《정조실록(正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승학(李承鶴:1857~1928)


이승학(李承鶴:1857~1928)                                 PDF Download

 

의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자화(子和),  호는 청고(靑皋)인데, 담양(潭陽) 장전리(長田里)에서 출생하였고, 양녕대군(讓寧大君)의 후손이며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문인이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하였지만 9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모친을 여의고 울기를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12세에 처음으로 입학하였는데 총명하여《중용(中庸)》한 권을 9일만에 다 외우고, 《상서(尙書)》<요전(堯典)>을 하루 아침에 뜻을 알고 다음 날 아침에 외우는데, 집주(集注)까지 한자도 틀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를 보고 그의 부친이

“재주가 너와 같으면 누가 배우기가 어렵다고 하겠느냐.”

했다는 말도 있다.   관례(冠禮)를 치른 뒤에는 기정진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그의 부친인 진사 이최선(李最善) 역시 시대를 외면하지 않고 위태로운국 가의 안녕과 백성들의 고달픈 삶을 해소하기 위해 1862년 그의 나이 38세 때에《삼정책(三政策)》을 지어

“기강의해이와염치의상실은삼정의폐단보다더욱심하다.”

고 역설 하였으나 담양 부사(潭陽府使)에 의해 기각되어 조정에 까지 이르지 못하였다.  그러나《삼정책》을 본 기정진은 그의 경륜이 주도면밀하고 재능이 우수하여 세상에 쓰일 만하다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는 일화가 전해 온다.

그의 나이 20세가 되었을 때,  서울에 친척 한 분이 과거(科擧)를 주선 하겠다고 하였다.  자신의 외숙(外叔)이 시험을 주관하니 300금만 주면 목적한 바를 얻을 수  있다고 하였으나,  그는 거절하고 주지 않아서 불리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뒤 고종 19년 임오년에 조정에서 현량한 선비를 뽑으려고 하자,  그가 책문(策問)을 지어 올려 선발되었고,  그것이 문과초시(文科初試)를 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884년 동학 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 당시에 그를 지명하여 죽이려하자,  방장산(方丈山)으로 피신하여 있었는데,  그 이듬해에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기정진의 손자가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장성에서 의병(義兵)을 일으킨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승학은 한 필의 말을 달려서 팔도에격 문(檄文)을 보내었다.  그리하여 곳곳에서 답장이 오고 발송하는 일이 수 백건 이었으나,  그는 조금도 막 없이 처리하였다.  그리하여 의병을 일으키고 금성산(錦城山)에 제사를 지내면서 국조(國祚)의 융성을 빌고,  진(陣)을 광주(光州)로 옮겨 서울로 진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선유사(宣諭使) 신기선(申箕善)을 보내어 임금의 명령으로 타이르기를,

“의병이 일어나면 도리어 화가 커지는 것이니,  즉 일로 해산하라.”

고 하여,  그날로 군사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부친이 별세한 후에 집안에 불이 나서 5천 여권의 책과 가산(家産)이 불에 타버리자,  다시 외당을 짓고 전답을 팔아서 서적을 모으느라 가산이 기울었다.  식솔을 거느리고 살기가 곤란하여 50세에 농사에 힘쓰기 시작하여 종을 데리고 들에 나가야만 했다.  그리하여 8년만에 남의 곡식을 빌리지 않게 되자,  이후에는 들에 나가지 않았고, 회갑을 맞이한 이후부터는 집안일을 아들에게 맡기고서,

“글을 읽는 종자(宗子)가 끊어지면 10대의 집안이 맥이 끊기는 법이니 마음에 두고 새기도록하라.”

고 하였다.

담양군(潭陽郡) 창평면에 ‘문일정(聞一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이 정자는 그가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책을 읽고 학문을 연마하며 현실의 문제에 관심을 가졌던 곳이기도 하다.  그들의 실천적 의식과 행동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후손들에게도 면면히 이어지도록 하였다.  그는 을사조약(乙巳條約) 이후에 기우만(奇宇萬)이 이끄는 장성의병(長城義兵)에 가담하였으며 아관파천(俄館播遷) 때에도 의거(義擧)했던 인물이다.  성균관 박사(成均館博士)를 지낸 손자 옥산(玉山) 이광수(李光秀)는 이기(李沂), 윤주찬(尹柱瓚), 민형식(閔衡植)등과 함께 자신회(自新會)라는 조직에 가담하고 을사오적(乙巳五賊)을 암살할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과정에서 발각되어 사형을 언도 받기도 하였다.

이승학은 당시에 성행하던 이기설(理氣說)의 학문보다는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전념하였다. 저서로는《청고집(靑皐集)》 4권이 있고, 《종사유록(宗事遺錄)》을 간행한 바 있다.  그가 후손에게 이르기를,

“후일에 아름다움이 넘치는 말로 행장(行狀)을 청하여서 남의 웃음거리가 되게 하지 말라.  이는 내가부 끄럽게 여기는 바이다.”

하였다.

실천을 중시하고 위기지학을 강조하기보다는 열인찬기(悅人讚己)로 외형만 추구하며 부화뇌동(附和雷同)하는 요즘 세태를 바라보면서 이승학과 같은 인물은 더욱더 발굴하여 작게나마 세인의 본보기로 삼아야 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참고문헌>
《위키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