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李翔:1620~1690)


이상(李翔:1620~1690)                                           PDF Download

 

관은 우봉(牛峯), 자는 운거(雲擧) 또는 숙우(叔羽),  호는 타우(打寓),시호는 문목(文穆)이며 송시열(宋時烈)을 통해 김집(金集)의 학문을 계승하였다.  이조참의(吏曹參議) 이유겸(李有謙)의 아들로,  젊어서부터 송시열의 문생이 되어 송시열의 기대와 관심을 한몸에 받았다. 과거공부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지조와 행실이 독실하였다.

1697년(정축,숙종24) 이후로는 사진(仕進)을 단념한 채 문을 닫고 들어 앉아 도리(道理)를 추구하였다.  선생의 천거로 한때 대직(臺職)에 제수 되었으나 1658년(효종9)에 산림(山林)이 진출할 때 박세채(朴世采), 윤증(尹拯)과 함께 유일(遺逸) 유일(遺逸): 초야에 묻혀있는 선비로 학식과 인품을 갖추고 있으면서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경우 이들을 과거시험 없이 발탁하는 인재등용 방법 중의 하나이다.  로 천거되기도 하였다.  그는 학문적 정치적으로 송시열을 따랐다.
현종(顯宗) 말년의 예송(禮訟)에서는 남인(南人)인 허적(許積)을 탄핵하다가 실세하였고,  1680년의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서인의 집권이 시작되자,  다시 기용되어 사업(司業), 형조참의(刑曹參議), 우윤(右尹), 대사헌(大司憲), 이조참판(吏曹參判) 등을 역임하였다.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이 분기될 때도 송시열을 따라 소론의 남인 등용론을 반대하였다.

1688년 이조참판으로 있을 때 그가 계모(繼母)와 근친상간의 혐의가 있는 먼 친적 유두성(柳斗星)을 조사하여 처리해 달라는 상소를 올리려고 할때, 송시열이 글을 보내어 말렸으나,  그는 유두성의 음행 사건을 고발하였다.  서인이 실세한 후에는 그 범죄에 관한 조서 내용이 뒤바뀌어서 증인을 교사하고 재산을 탐냈다는 죄로 처벌을 받았으며, 기사환국(己巳換局) 뒤에 옥중에서 심한 이질로 생을 마감하였다.

1717년에 복관(復官)되고,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추증받았다. 그는만년에 현재의 세종 특별자치시 전의면 관정리에 사관정(四觀亭)사관정(四觀亭): 관산(觀山)·관농(觀農)·관수(觀水)·관어(觀魚)를 하는 정자라 하여 사관정(四觀亭)이라는 이름을지었다고도 하고, 동쪽으로 운주산(雲住山), 남쪽으로 운점산(雲霑山), 서쪽으로 증산(甑山), 북쪽으로 월조산(月照山)을 바라본다 하여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도 한다.  이라는 정자를 짓고 제자들을 가르쳤는데,  1699년(숙종25) 그 지역의 향유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여 뇌암서원(雷巖書院)을 건립하고 그곳에 모셨다.  이후 서원을 재건하면서 그의 시호를 따서 문목사(文穆祠)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그의 죽음과 관련하여 《조선왕조실록》 숙종 16년 1월 19일 조에는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대개 이상은 평소에 당시 사람들에게 가장 미움을 받았는데,  서로 관계되지 않은 일을 상소하여 증거로 삼았으므로,  마침내 뜻밖의 화를 당하였다.  유두성은 바로 이상의 이성(異姓)인 먼 친족이므로 유두성이 죽더라도 그 재산은 이상에게 돌아갈 리가 없는데,  이것을 죄로 삼았으니,  참으로 심한 날조에서 나온 것이다.”

같은 내용이《숙종실록보궐정오(肅宗實錄補闕正誤)》16년 경오(1690) 1월19일조에는 <이상의졸기>라는 제목하에 좀 더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상은 글을 잘 지었으나 어리석고 학식이 없었으며, 재물을 탐내고 이익을 좋아하였다.  고향에 있을 때에는 오로지 무력으로 일을 처리하는 것을 일삼고,  무릇 자기땅에 가까운 남의 땅은 반드시 온갖 계책으로 꾀하여 차지하였으므로,  모 바른 밭에 곧바른 논이라는 속담이 있었는데,  대개 남의 땅이 혹 자기 땅과 엇갈려 섞여 있으면 자기 것에 갈라 넣어서 모 바르고 곧바르게 만든 것을 말한 것이다.  송시열에게 아부하고 또 제 아우 이숙, 이익의 세력을 끼고 과거에 합격하지 않고 유일(遺逸)로 몸을 일으켜, 외람 되게 임금의 부름에 끼어 재상 반열에까지 올랐다.

전후의 말은 다 그 시대의 흐름을 붙좇는 것이었으며,  송시열과 윤증 사이의 다툼은 이상이 실로 사이를 벌려 놓은 것이고,  송시열의 잘못도 그가 권하여서 된 것이 많다.  간통과 관련된 옥사를 밝힌 것은 그 사실이 어떠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말이나 행동이 방자하고 정실이 드러나서 그 마음은 길가는 사람들도 아는 바인데,  박태만의 소(疏)에 상세히 있으므로,  갖추어 논하지 않는다.  기사년 이후에 잡아와 준비를 마쳤는데,  장차 형을 받으려 할때에 약을 먹고 죽었다.”

(조선왕조실록.숙종(보궐실록) 16년1월19일)

그리고 죽은 스승 이상(李翔)의 추탈(追奪)된 관직을 회복해 주기를 청하는 전 현감 서행원(徐行遠) 등의 상소가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의 영조1년을사(1725,옹정3) 2월 13일(신사)조에 보이는데,  아래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죽은 스승은 문경공(文敬公) 김집(金集)의 문인이 고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의 문하에서 노닐었던 인물로,  본래부터 연원이 있고 조예가 정밀하고 깊어 한 시대의 기대를 받고 세 조정의 예우를 받았습니다.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은 집안에 있다고 해서 조금도 해이하지 않았고,  도를 지키는 정성은 근력이 약하다고 해서 꺾이지 않았습니다.  간사한 허적(許積)을 한번 배척한 일로 인해 윤휴(尹鑴)의 독수(毒手)에 심하게 당해 6년 동안 바닷가에서 고생하다가 겨우 살아서 돌아와 있던 중,  윤증(尹拯)이 스승을 배반하는 변고가 동문(同門)에서 발생하였습니다.  죽은 스승은 너무나 분하고 미운 마음에 편지를 보내 절교를 통고하였는데,  담긴 뜻이 매섭도록 엄격하였습니다.  이때문에 윤증의 당이 크게 질시하여 함정에 밀어 넣어 해치려는 손길이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결국에는 옥중에서 고생하다 죽도록 만들었고, 이것으로도 모자라 추탈(追奪)의 재앙이 다시 저승에 까지 이르렀습니다.  신들이 밤낮으로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고 사림이 억울해하며 한탄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위의 두《실록》의 내용과《승정원일기》의 내용을 놓고 보면 시각차가
현격하며 그의 행적에 대한 견해가 판이하게 서로 다름을 볼 수 있다.  이는 그가 당시에 정치적으로 숱한 파란을 격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오늘날도 역시 이러한 경향이 없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두 경우의 시각에 의한 기록을 인용하여 살펴보았다.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
《숙종개수실록(肅宗改修實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이담(李湛:1652∼1716)


 

이담(李湛:1652∼1716)                                           PDF Download

 

담의 자 는경화(景和), 호는성재(醒齋),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그는 세종대왕(世宗大王)의 다섯째 아들인 광평대군(廣平大君) 이여(李璵)의 10세손으로,  증조부는 첨추 이후재(李厚載)이고 조부는 장령 이형(李逈)이다.

아버지는 금산군수(錦山郡守)를 지낸 이중휘(李重輝)이며 어머니는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손녀인데, 후에 정경부인(貞敬夫人)에 봉해졌다.  그는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이담의 부인은 광주 안씨(廣州安氏)인데 시호가 익헌공(翼憲公)인 안윤덕(安潤德)의 후손이다.  시집가기 전에는 아버지를, 시집가서는 남편을,  남편이 죽은 뒤에는 아들을 좇는다는 삼종(三從)의 도리를 존중하였으며,  않게 하였다.

이담이 별세한 뒤에 신임사화(辛壬士禍)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 아들 현윤(顯允)에게 권유하여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한 것만 봐도 부인의 출처의리(出處義理)에 대한 식견이 예사롭지 않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겠다.  1724년 9월 15일에 향년77세를 일기로 별세하였고 공의 묘소 오른쪽에 부장(祔葬)하였다.

도곡(陶谷) 이의현(李宜顯:1669∼1745)이 쓴 묘갈명(墓碣銘)에 의하면,  이담은 태어나면서부터 모습이 단아하고 깨끗하며 성품이 온순하고 진실하여 자연히 도(道)에 가까웠으며 일찍부터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 우암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날로 발전함이 있었다고 한다. 특히 스승에게 극진하여 숙종(肅宗)때에 우암이 북쪽 변방으로 유배되어 갔다가 곧 남쪽 변방으로 옮겨가자, 그가 여러 유생들과 함께 대궐앞에서 소리 높여 변호하였고, 이어서 천리 먼길의 유배지로 그를 따라갔다.  뒤에 우암이 제주도 로유배되자,  또 다시 글을 올려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하였다.

이때 외숙인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1629∼1689)은 이미 화를 당하였고, 우암은 체포되어 상황이 다급하였는데,  이담이 틈을 타서 김수항의 묘도문(墓道文)을 우암에게 청하였다.   묘도문이 완성됨과 동시에 우암에게 후명(後命) 후명(後命): 귀양살이를 하고 있는 죄인에게 사약(賜藥)을 내리는 일을 이른다. 이 이르니 우암에게······이르니: 1689년 1월 숙의 장씨(張氏)가 아들(후일의 경종)을 낳자 원자(元子)의 호칭을 부여하는문제로기사환국이일어나서인이축출되고남인이재집권하였는데,이때송시열은  책봉을반대하는소를오렸다가제주도로 유배되었다.그러다가그해 6우로압송되어오던중정읍에서사약을받고죽었다.
바로 이 글이 우암 선생의 절필(絶筆)이 되었고 이담은 김수항(金壽恒)이 사사되자 그의 묘도문을 계기로 더 이상 글을 짓지 않았다고 한다.

그 후 이담은 광주(廣州)에 은거하여 세상과 왕래하지 않고 도서(圖書)와 역사책으로 즐거움을 삼았다.  1694년 정국이 바뀌어 조정에서 사산감역(四山監役)사산감역관(四山監役官): 서울의 북악산, 인왕산, 남산, 낙산(駱山)의 성곽과 숲을 지키던 무관 벼슬 이름이다. 을 제수하니, 이담은 마지못해 나아갔다.  이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는데 아산현감(牙山縣監)과 임천군수(林川郡守)를 지내기도 하였다.  아산에는 겨우 13개월 동안 부임하여 있었는데 고을이 잘 다스려져서 유애비(遺愛碑) 유애비(遺愛碑): 지방관의 선정을 칭송하여 세운 송덕비를 이른다. 가 있으며,  활과 갑옷을 잘 수선하여 포상 하였으나 적극 사양하여 면하였다.

뒤에 임천에 있을 때에도 역시 그러하였다.  임천에는 토호(土豪)들이많았는데, 이담이 강력히 제재하여 간악한 짓을 못하게하니,  백성들이

“백년 이래로 처음 보는 일이다.”

라고 칭찬하였다.  그러나 어사(御史)는 토호들의 말을 듣고 이담을 탄핵하였다.  취조하여 변론함에 털끝만한 문제가 없었는데도 다른 일로 얽어 면직되었다.

이담은 이에 식솔을 모두 데리고 광주로 돌아와서 벼슬길을 단념한 채 남을 원망하는 말이 없이 지냈다.  그러나 얼마 후에 중풍을 앓게 되어 하는 수 없이 도성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1715년에 모부인(母夫人)이 별세하자 그 이듬해까지 그리워하여 눈물을 흘리며 몇 달 동안 음식을 먹지 못하다가 피로가 누적되어 마침내 9월 19일에 향년65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이담은 지방관(地方官)으로서의 선정(善政)을 베푼 일 말고도 그의 효성(孝誠)과 청렴함을 특기할 만한 사실이 있다.  그가 지극한 효성과 순수한 행실이 있어 5세에 어머니를 잃고 계비(繼妣) 부인을 섬길적에 정성과 효도를 다하였다.  또한 부친이 말질 (末疾: 고치지 어려운병)에 걸려 여러해를 고생하였는데,  그가 좌우에서 간호하여 시종 게을리 하지 않았다.  상(喪)을 당하자 몹시 슬퍼하여 몸이 상할 지경이 었는데 아랑곳하지 않고 예문(禮文)보다도 더한 슬픔을 표출하였다.

또한 형을 아버지 섬기듯이 하여 정성을 다하여 모셨고,  노년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물뿌리고 청소하는 예절을 지켰다.

또한 형 이재상(宰相)의 지위에 오르자,  간혹이 일로 요구하고 청탁하는 자가 있으면 나무라고 물리쳐 용서하지 않았다.  조용하고 청렴한 것을 좋아하여, 옛 친구 중에 고위관직(高位官職)에 오른자가 있으면 일체 찾아가지 않았으며, 외직(外職) 한자에게는 반드시 생략 하였다고한다.  그의 이종 동생인 옥오재(玉吾齋)송상기(宋琦:1657∼1723)가 지은 만시(挽詩)에서도 그들이 평소에 얼마나 친분을 쌓으면서 살아 왔는 지가 잘 드러나 있다.
제목은 <이종형 임천 군수 이경화를 기린 만시 [姨兄李林川景和挽]>로 되어 있다.

이종사촌 종형제가 누구인들 없으리오만
兩姨群從世誰無
우리들의 깊은 정은 친형제와 같았다오
吾輩深情卽友于
시는 외숙 인해 접었어도 눈물 외려 마르잖고
詩廢渭陽餘淚在
애통한 맘 풍수에 어려 그 한몸이 고단했지요
痛纏風樹一身孤
영고성쇠 진작부터 부운처럼 여겼건만
榮枯久作浮雲看
오늘 와서 유명 달리 할 줄 어찌 알았겠소
存沒那知此日殊
어이하리 큰 형님은 홀로인 걸 슬퍼하니
何况長公悲隻影
한밤 외기러기 울음소리견 디지못 하리다
不堪中夜斷鴻呼

이담의 아버지 이중휘(李重輝)가 김광찬(金光燦)의 딸과 혼인하였으므로, 송상기와는 이종 형제가 된다.  원문의 ‘우우(友于)’는 형제 간의 우애를 말하는 것으로, 《서경》 〈군진(君陳)〉의 “형제 간에 우애한다.〔友于兄弟〕” 라는 말을 줄여 인용한것이다.  3구의 뜻은 이담이 외숙(外叔) 김수항(金壽恒)의 사사(賜死)를 계기로 시 짓기를 그만 두었지만 외숙의 죽음에 대한 슬픔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말을 묘사한 말이며, ‘위양(渭陽)’은 외숙을 의미한다.

《시경》〈위양(渭陽)〉에

“외삼촌을 배웅하러 위수까지 나왔는데, 무엇을 드릴까요. 수레랑 말을 드리지요.
[我送舅氏, 曰至渭陽. 何以贈之, 路車乘黃.]”

라고하였다.  4구의 뜻은 이담이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었다는 말을 묘사한 것으로,  그가 다섯 살에 어머니 상을 당하였다는 사실을 역시 도곡(陶谷)이 지은 묘갈명에서 확인할 수 있다.  4구의 ‘풍수(風樹)’는 풍수지탄(風樹之嘆)으로,  부모 잃은 자식의 아픔을 말한다.  《한시외전(韓詩外傳)》에

“나무는 고요하고자 하여도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은 봉양하고 싶어도 어버이가 기다려 주지않는다.
[夫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

라고 하였다.  7구는 이담의 백씨(伯氏) 이유(李濡:1645∼1721)가 홀로 생존하여 슬픔을 견디지 못한다는 말이며, ‘장공(長公)’은 맏형을 의미한다.  소식(蘇軾)이 소순(蘇洵)의 맏 아들이고,  그의 문학이 뛰어났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를 장공이라고 불렀던 데에서 연유한다.‘ 단홍(斷鴻)’은 무리를 떠난 외로운 기러기라는 말이다.
 <참고문헌>
이의현, 《도곡집(陶谷集)》.
송상기, 《옥오재집(玉吾齋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송(李淞: 생년 미상)


이송(李淞: 생년 미상)                                               PDF Download

 

의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무백(茂伯)  또는 고청(孤靑), 호는 노초(老樵) 또는 서림(西林)이다.  그는 세자시강원 보덕(世子侍講院輔德)을 지낸 이민곤(李敏坤)의 아들이며 여호(黎湖) 박필주(朴弼周)의 문하생이다.

일찍이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1756년(영조32)이민곤이 조영국(趙榮國)을 탄핵하다가 북도(北道)로 유배되어 가는 도중에 금성(金城)의 역사(驛舍)에서 불에 타죽는 참상을 보고,  벼슬에 나아갈 뜻을 단념한 채 서산(西山)에 은거하며 오로지 학문 연마에만 전념하였다. 이송의 그러한 정서와 처절한 심정을 역사의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국역일성록》 정조 20년 12월  29일조(條)를 보면 예조(禮曹)에서 충신(忠臣), 효자, 열녀의 별단(別單)에 고쳐서 부표(付標)한 내용이 수록 되어있다.  그 중에 이송에 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계모를 섬기고 봉양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일찍이 그의 아비의 귀양살이를 따라갈 적에 금성(金城)의 역사(驛舍)에 이르러 한밤중에 불이 났는데 그의 아비는 이미 손쓸 수가 없게 되었다.  있었다.  관을 옮겨 장사 지내게 되어서는 묘를 지키면서 울부짖고 옷깃이 다 해졌으며 나물과 과일을 3년간 한번도 입에 가까이 하지 않았다.

상기(祥期)가 끝날 때가 되어도 빗질을 하지 않자 머리털과 살갗에 구더기가 생겼고 성묘할 때울 부짖으며 발을 구르자 사나운 호랑이가 와서 지켜주었다.  삼년상을 마친 뒤에 소년의 귀밑머리가 일시에 백색으로 변하고 몸이 점점 쇠약해지더니 병에 걸려 그수명을 더 연장 시키지 못하였다.”

나라에서 충신과 효자와 열녀를 장려하기 위하여 올리는 별단의 내용이니, 없다.

이는 아마도 당시에 효자의 한 표본으로 삼고자 했던 의도가 있었던 듯하다.  이를 뒷받침이라도 하듯이 그의 시문(詩文)  역시 주로 부친 의 글을 차운(次韻)하거나 부친을 그리는 마음을 애절하게 묘사한 내용이 많은 것도 주지할 만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이송은 특히 성리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대체로 이이(李珥)의 이기묘합설(理氣妙合說)을 존중하였으며, 실학의 대가인 홍대용(洪大容), 박지원(朴趾源), 박제가(朴齊家), 이덕무(李德懋), 유득공(柳得恭) 등과도 폭넓게 교류하였는데,  박지원, 홍대용과는 동갑 나이로 우의(友誼)가 두터웠다.  그리하여 이송은 실학을 깊이 연구하여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현실적 측면에 관심을 기울였다.  조정에서 여러번 불렀으나 나가지않고 저술과 연구에만 평생을 바쳤다.

저서로는《노초집(老樵集)》이 있으며, 박지원과 함께 홍대용을 위한〈담헌묘지(湛軒墓誌)〉를 지은 바 있다.

정인보(鄭寅普)가 이송이 지은 담헌의묘표(墓表)를 읽고,

“아 이 글이야 말로 바로 소위 고문(古文)의 전아(典雅)함을 훌륭히 다하였다.”

고 하였다.  그리고 정인보는 <담헌홍덕보묘표(湛軒洪德保墓表)>를 쓰면서 다음과 같이 긴 글을 남겼다.

“연암(燕巖)이 지은 묘지명과 비교하면 연암은 탕일(宕逸)하며 기이(奇異)한 데가 보이지만,  서림(西林) 은순실(醇實)하고 깊고 아름다우며 그 꽃다운 향내가 멀리 풍긴다.  내가 감히 누가 낫고 누가 못하다는 것을 속단하여 평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글을 볼때 담헌을 아는 면은 서림이 더 깊은 듯하다.  그리고 또 서림의 글은 곡절이 있을 뿐만 아니니 그 홀로 아는데 이르러서는 연암과 어찌 그 우열을 비교할 수 있겠는가.  서림은 자신이 이미 당시에 이름이 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또 세속에는 글을 아는 이가 드물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무도 그 이름을 들 수 있는 이가 없었다.

이 묘표는 다행히도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지만,  그가 고심담사(苦心覃思)하여 유현하고 오묘한 것을 끌어내어 놓은 것이 또 이루 얼마나 되는지 알지 못할 정도 일텐데,  이것들이 이미 다 흩어져 없어지고 만 것인가?  혹 이것이 사람들 사이에 버려져 있다가 바람에 날리고 서리에 젖어 찢기고 좀먹고 쥐가 물고가서 굴러다니다가 없어지고 만 것인가?  서림은 세상에서 고매한 선비이니, 응당 사후의 영예(榮譽)에 대해 기뻐하고 슬퍼하는 그런 관심은 없겠지만 그의 화려한 유문(遺文)은 다만 일인일가(一人一家)의 정화(精華)를 이루었을 뿐만이 아닌데,  가려져 드러나지 않고 이런 지경에 이른 것은 슬픈 일이다.  지금 인보가 종합해 본 서림의 시문(詩文)은 비록 이것 밖에 안 되지만 세상에 글을 아는 이가 있다면 응당 농암(農巖) 이후 4~5명의 문장가에 서림이 그 사이에 들어감을 알 것이다.  그의 법(義法)이 근엄(謹嚴)하고 운용이 급박하거나 번거로움이 없으며,  또 음절이 잘 어울리고 문장이 빛나서 그 뛰어남이 다른이 와는 비교할 수가 없다.”

이 글에서 정인보는 이송에 대하여 농암 이후의 문장가로 손꼽을 정도로 극찬을 하고 있다.  또한 담헌에 대해서는 이송이 오히려 연암 보다 더 깊이 알고 있다고 보았다.

이는 아마도 이송이 1770년(영조46)에 금강산에서 홍대용을 처음 만나 알게 된 후,  늘 함께 다녔던 그런 친분에서 표출된 결과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들은 또 동해(東海) 지역의 유람도 함께 하며 다수의 시 작품을 남겼다.  그 뒤 홍대용이 이송과 산사(山寺)에 같이 가기로 하였는데,  열흘이 못되어 갑자기 홍대용이 죽었다.  그리하여 이송은 그를 애도하며 담헌 묘지(湛軒墓誌)를 지었던 것이다.

그의 저서《노초집(老樵集)》에는 홍대용(洪大容)이 중국에 가는 사신의 일행을 따라 북경에 가서 머물며 교제하였던 중국의 학자 엄성(嚴誠)의 시작품에 대한 서문(序文)이 있고,  논(論)과 잡저(雜著)에는 중국의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하여 명쾌하고 조리있는 평론을 가한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이러한 연유로 정인보는 그의 유문(遺文)이 흩어져 버리고 빛을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던 듯하다.

<참고문헌>
《노초집(老樵集)》
《조선고금명현전(朝鮮古今名賢傳)》
《호보(號譜)》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