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연구원의 율곡학 진흥 국고보조금 추진 사업단 출범

율곡연구원의 율곡학 진흥 국고보조금 추진 사업단 출범

‘율곡학 콘텐츠 개발 및 사회적·국제적 확산 사업’ 개요

 

사단법인 율곡연구원(이사장 김진선)은 금년 6월 1일부터 문화체육관광부의 국고보조금을 지원 받아, ‘율곡학 콘텐츠 개발 및 사회적·국제적 확산 사업단’(단장 최영진 성균관대학교 교수)을 출범시키고 다양한 율곡학 진흥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금년 12월말까지 추진되는 이 사업은 총 예산 2억 2천 5백만원이 투입되는데, 다음과 같이 1) 조선시대 역사문헌 자료를 활용한 율곡학 콘텐츠 개발 사업, 2) 한자·한문교육을 통한 인성교육과 사회적 확산 사업, 3) 국제적 네트워크를 활용한 율곡학의 국제적 홍보와 확산 사업 등을 실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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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원(朴光元, 1659~1741)



박광원(朴光元, 1659~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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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원(朴光元, 1659년~1741년)은 조선시대 중기에 활동하였던 문신이자 성리학자로, 형조정랑(刑曹正郞), 종묘봉사(宗廟奉事),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등을 역임한 인물이다.  부친의 소개로 송시열의 문하에 들어갔다.  주자를 특별히 추앙한 그는 유생들을 모아 상소문을 올려 최석정(崔錫鼎)이 『예기류편(禮記類編)』를 편찬하면서 주자가 ⌈대학⌋과 ⌈중용⌋을 독립시킨 의도를 무시했다고 비판했다.  아울러주자, 이황, 이이 등의 단점을 들춰내고 비판한 윤휴를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규정하고 배척하였다.

1659년(1세, 효종10년)에 증장령(贈掌令)인 박상현(朴尙玄, 1629∼1693)의 둘째 아들로 광주(光州)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전라도 순천(順天)이며,  자는 사선(士善), 호는 백야당(白野堂)이다. 형으로 박광일(朴光一)이 있으며,  동생으로 박광선(朴光善)이 있다.  부친 박상현은 명나라를 숭배하는 사상이 철저하였으며,  주희의 학문을 근본으로 삼고 경전에 널리 밝은 학자였다.

1684년(26세, 숙종10)에 형 박광일과 함께 회덕(懷德)에 있는 우암 송시열(宋時烈)을 방문하여 가르침을 청했다.  그의 문집에 들어있는 회천문답(懷川問答) 은 당시 송시열과 대화한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주요 내용은 유림이 어지럽게 된 세태를 개탄하면서,  당시 송시열과 대립하고 있던 윤휴(尹鑴, 1617-1680)를 비판하고 그를 사문난적(斯文亂賊,  유학의 교리를 혼란하게 만든 도적놈)이요, 이단이라고 공격하였다.  송시열은 윤휴가 주자를 비판하고 이황(李滉), 이이(李珥), 성혼(成渾) 등의 단점을 끄집어내 비웃는데서 유림 사회가 혼탁하게 되었다고 보았다.

1699년(41세, 숙종25년)  증광사마시(增廣司馬試)에 생원1등으로 합격하였다. 나중에 벼슬이 형조정랑(刑曹正郞)에 이르렀으며, 권상하(權尙夏, 1641-1721), 이희조(李喜朝, 1655-1724) 등과 교류하고 예(禮)와 경학, 성리학등에 대해서 논했다.

1701년(43세, 숙종27)형 박광일이 천거를 받아 내시교관(內侍敎官),시강원자의(侍講院咨議) 등에 임명되었지만 사양하고 관직에 나가지않았다.

1709년(51세,숙종35년) 3천 여명에 이르는 유생들과 함께, 그는 최석정(崔錫鼎,1646-1715)이 지은『예기유편(禮記類編)』이 체계적이지못하다고 상소(배척예기류편소排斥禮記類編疏)를 올렸다.  『예기유편』은 총 18권 5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가례(家禮)·방국례(邦國禮)·학례(學禮)·길례(吉禮)·흉례(凶禮)·가례(嘉禮)·빈례(賓禮)의 순서로 편집되었다.  최석정은 본래『예기』 속에 들어 있던 ⌈대학⌋ 과 ⌈중용⌋ 을 복원하여 다시 ⌈예기⌋ 에옮겨놓고자한것이다. ⌈대학⌋과 ⌈중용⌋ 은 주자가 사서(四書)로 한권으로 독립시킨 것이다.  오늘날 학계에서는 이러한 시도에 대해서 높게 평가를 하는데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최석정은 기존의 선현들의 연구결과를 토대로 자신의 사색을 통해 『예기』의 착간들을 찾아내고 수정보완하려 했다. 그는 주자와 진호(陳澔) 그리고 고려말 조선초의 권근(權近) 등 기존의 『예기』 연구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사실은 그의주석은 중국에서 조차 연구하지 못했던 과업을 수행했던 것이다. 이것은 그의논리적이고 수학적인 그의 명민한 예지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희재의논문 「최석정의『예기유편』에서 본 학례」참조)

박광원이 다른 유생들과 함께 올린 상소문은 주자의 학설을 무시한 ⌊예기유편」이란 글이 당시 화복(禍福)을 만들어내는 하나의 이슈가 되었다고 하면서 그 책을 ‘배척하다가 화를 만나게 된 사람이 얼마이고,  두둔하다가 보답을 받게 된 사람이 또한 얼마입니까?’ 라고 물었다.  그리고 만약에

“그의 글( ⌊예기유편 」)을 불태워버리지 않고 그 사람(최석정)을 내치지 않는다면 주자(朱子)를 위해 스스로 재앙의 자리로 들어가기를 달갑게 여기는 사람들이 장차 꼬리를 물게 되어 그 수를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라고 경고하였다.  조정에서는 얼마 후 ⌈예기유편 ⌋을 없애도록 하였다.

1712년(54세, 숙종38년) 경기전(慶基殿) 참봉(參奉)이 임명되었다. 이어 강릉침랑(康陵寢郞), 종묘봉사(宗廟奉事),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등을 역임했다.

1721년(63세, 경종1년) 몸이 약한 경종을 대신하여 연잉군(영조)을 왕세제로 책봉하는 문제로 조정 안팎이 시끄러워졌다. (신임사화辛壬士禍) 노론파와 소론파가 서로 얽혀 싸움이 시작되자 고향으로 귀향하였다.

1725년(67세, 영조1년) 다시 관직에 복귀하였다. 4월에 의금부 도사에 임명되었다. 7월에 형조정랑으로 임명되었다가 이조정랑, 청암도찰방(靑巖道察訪) 등에 임명되었다.

1738년(80세, 영조14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

1741년(83세, 영조17년)에 사망하였다. 시문집으로『백야당문집(白野堂文集)』 4권 2책이 있다. 이 문집은 1873년(고종10년)에 간행된 것으로, 5 대손 박제유(朴濟裕)가 편집하고,  그의 아들들이 간행했다. 국립중앙도서관과 성균관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문집 가운데에는 인간의 본심이 원래 착하지만 수양하지 않으면 어리석거나 간악하게 된다는 것을 시로 표현한 「논심성정(論心性情)」, 윤선거와 윤증부자에 대해 비판을 가한「왕형공론(王荊公論)」, 당쟁의 상황을 기록한「뇌정문답(雷霆問答)」등이 있다.

<참고자료>
⌈숙종실록⌋

이미선, 박광원,<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한국학중앙연구원
이동술, ⌈백야당문집⌋,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이희재, ⌈최석정(崔錫鼎)의『예기유편(禮記類編)』에서 본 학례(學禮)⌋, ⌈공자학⌋ 22권,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