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용익(南龍翼, 1628~1692)


남용익(南龍翼, 1628~1692)                               PDF Download

 

1655년 남용익이 참가한 조선통신사의 행렬도 (대영박물관 소장)
1655년 남용익이 참가한 조선통신사의 행렬도 (대영박물관 소장)
용익(南龍翼, 1628년~1692년)은 조선시대의 문신이며 학자다. 과거에 합격한 뒤,  문장과 글씨에 능하여 대제학,  이조판서등 요직을 두루거쳤다.  항상 근신하고 근면하였으며,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이단상(李端相) 등과 교류하였고, 1655년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와『부상록(扶桑錄)』을지었다.

1628년(1세, 인조6년)에 용인의 유곡(柳谷, 지금의경기도용인시처인구유방동)에서 부사 남득명(南得明)과 신씨(申氏)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운경(雲卿), 호는 호곡(壺谷)이다 . 증조할아버지는 무주현감(茂洲縣監) 남복시(南復始), 할아버지는 의빈부도사(儀賓府都事) 남진(南鎭)이다.  어머니 신씨는 평산 신씨(平山申氏) 신복일(申復一)의딸이다.  부인은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채성구(蔡聖龜)의 딸을 맞이 하였다.

1646년(19세, 인조24년), 이해에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1648년(21세, 인조26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남용익은어려서부터 글재주가 뛰어났는데,  이해의 정시문과에는 최연소로 급제하였다.  이후 승정원가주서(承政院 假注書), 시강원설서(侍講院說書),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등을 거쳐, 예조정랑, 병조좌랑, 홍문관 부수찬등 요직에 임명되었다.

1655년(28세,효종6년) 통신사의 종사관으로 뽑혀 일본에 파견되었다.  사절단은 총488명으로 구성되었는데,  4월 20일 궁궐을 떠나 양재역(良才驛) 방향으로 길을 잡아 부산으로 내려갔다.  6월 9일 대마도에 이르렀다.  대마도에 이르러 도요토미히데요시(豊臣秀吉)의 위패를 모신 법당에 절하기를 거절하여 음식 공급이 일시 중지되었으며, 이후 여러 협박을 받았으나 굴복하지 않았다.
9월 26일 그가 지은 ⌈부상일록(扶桑日錄) ⌋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이 일본 후지산을 지나는 장면이 보인다.

“오늘 여정이 길기 때문에 날이 밝기 전에 길을 떠나 새벽에 청견사(靑見寺)를 지났다.  절은 길가에 있는데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해, (우리나라와 달리마을의) 인가 사이에 섞여 있었다.  지붕이 옹기종기, 나무끝에 보이는데 행차가 바빠서 들르지 못하였다.  빙둘러서 한 언덕을 지나니 큰바다가 앞에 끝없이 펼쳐져 있다.  해가 이제 막 떠오르는데붉은 구름이 둘러쌌으며,  눈같은 물결이 깨끗하다.  바람에 나부끼는 돛은 뚜렷하게 비치고,  한가닥 폭포가 산기슭에서 흘러내린다.  우러러보니 후지산(富士山)이 말(馬) 머리에 도달해있다.  한 줄기 흰구름이 산허리 밑을 감추었고 정상에는 흰눈이 쌓여있다.  위 아래의 경치가 모두 살아있는 그림과 같고 밝은 거울과 같아 정신이 상쾌하였다. 산 아래를 빙 둘러지나서 후지가와(富士川)의 부교(浮橋)를 건넜다. 점심 때가 되어 요시하라(吉原)의 여관에쉬었다.”

10월 2일 드디어 통신사 일행은 일본의 수도 에도(江戶)에 도착하였다.  그날의 광경을 남용익은 이렇게 묘사하였다.

“에도(江戶)로 들어가는 길에 들어섰다.  가나가와(神奈川)에서 동쪽으로 70리거리다.   늦게 비가 올 징조가 있었으므로 행차가 정지하고전령이 왔다 갔다 말을 전하다가 한참 뒤에야 출발하였다.  바다를 옆에 끼고 수십 리를 나아갔다.  로쿠고바시(六鄕橋)를 건너는데 구경하는 사람들이 끊이지 아니하였다.  낮에 시나가와(品川)에 도착하였다. 관사를 새로 지어 아주 굉장하고 사치스러웠다.  그곳을 담당하는 관리들이 와서 기다리다가 이중으로 만든 찬합을 바쳤는데, 우리를 보호하면서 수행하는 왜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점심을 먹은 뒤에 관대를 다시 갖추고 전진하였다.
여기서부터 에도에 이르기까지 한쪽으로는 바다를 옆에 끼고 다른 한쪽으로는 인가가 촘촘하게 물고기 비늘처럼 연결되어 있다. 구경하는 자가 빽빽하여 담을 쌓은것과 같고,  배를 타고 바다에 떠서 구경하는 사람도 또한 한쪽에 둘러있었다. 오후 2시경에 에도에 도착하였다.  관문 스물여덟 곳과 네개의 큰 다리를 지났다.
겹겹으로 늘어선 점포와 수많은 인파,  번창한 모습은 이루다 기록할수 없다.  고위관료의 권속들은 아황색의 발을 드리우고 비단 장막으로 둘렀다.  또 붉은담요를 바닥에 펴고 여종들이 밖에 둘러섰으며, 수많은 사무라이들이 곳곳에서 관광하는데, 칼을 받들어 모시고 서있는 자들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혹자는 말하기를, ‘관백(도쿠가와쇼군)도 몰래와서 구경하였다.’ 고 한다.  숙소에 이르기 전 몇리쯤부터 목판으로 벽을 만들어 세웠는데, 질서 정연하고 아주 높으며 웅장한 것이 좌우 4~5리에 뻗쳐 있었다.  왜 그렇게 하였는지 물으니, ‘지난 24일에 화재가 나서 수 천여 가구가 불탔으므로 미처 수리하지 못한 곳에 이것으로 막아서 잿더미가 된것을 보이지 않게 하려는 것이라. ’하였다.   전날 우리 통신사 일행에게 곳곳에서 행차를 잠시 머물러 달라고 청한 것도 필시 이 때문이었던것 같다.  그들의 풍속이 과장되고 허탄하여 실속이 없음이 이와 같은것이다.”

일본통신사가 일본의 수도 에도에 들어가는 광경.
(1748년, 羽川藤永작품)

1656년(29세,효종7년) 2월 20일에 일본에서 귀국한 뒤, 호당(湖堂)  뽑혔다.  호당이란 인재양성제도의 하나로,  글재주가 있고,  장래가 유망한 젊은 관리 중에서 선발되었다.  장기 휴가를 받아 독서에 전념하도록 하는 제도였다.  이 해에문신 중시에 장원을 하였으며,  당상관으로 진급하였다.  또 형조, 예조참의 와승지에 임명되었다가 양주목사로 나갔다. 이해에 일본 통신사행을 기록한『부상록(扶桑錄)』을 썼다.

1666년(39세,현종7년) 진주사(進奏使) 부사의 신분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현종 연간에 대사간, 대사성을 거쳐 참판을 지냈으며,  경상감사, 경기 감사등 외직을 역임하고 형조판서에 올랐다.

1680년(53세,숙종6년), 이후좌참찬(左參贊),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을역임하였다.  이후대제학, 이조판서등 요직을 두루거쳤다.

1689년(62세,숙종15년), 소의장씨(昭儀張氏)가 왕자를 낳았다. 숙종이 새왕자를 원자로 삼으려하였는데,  그는 극력 반대하다가 함경도 명천(明川)으로 유배되었다.

1692년(65세,숙종18년), 2월에 유배지 명천에서 사망하였다. 1725년 ‘문헌(文憲)’ 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저서로 신라 시대부터 조선 인조 때까지 유명한 인물497인의 시를 모아 엮은 『기아(箕雅)』 가있다. 그리고 일본 통신사로 갔을 때의 일을 적은 『부상록(扶桑錄)』, 시문집으로 18권 9책의 목판본으로 발간된 『호곡집(壺谷集)』, 우리나라와 중국의 유명 시들을 골라 편집하고 평론을 곁들인 『호곡시화(壺谷詩話)』등이 있다.
남용익의 큰 아들은 충청도 관찰사를 지낸 남정중(南正重)과 1711년 (숙종37)에 통신사로 일본을 다녀온 둘째 아들 남성중(南聖重)이 있다.  손자는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使) 남한기(南漢紀)이고, 증손자는대제학 남유용(南有容), 고손자는 영의정을 지낸 남공철(南公轍)이다.

<참고자료>
⌈부상록․부상일기⌋
윤용혁, 남용익,<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저자미상, 남용익,<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박규진(朴奎鎭,1858-1934)


박규진(朴奎鎭,1858-1934)                                    PDF Download

 

규진(1858-1934)은 전라남도 화순 출신으로 조선시대 말엽과 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전통시대지 식인이다.  최익현(崔益鉉)과 정의림(鄭義林)에게서 한문과 성리학을 배웠으며,  나라를 잃어버린 암울한 시대에 살면서 은둔생활을 하는지식인들과 널리 사귀고, 화순지역의 유명정자와 서원에 많은 시를 남겼다.

1858년(1세, 철종 9년)에 태어났다.  본관은 함양(咸陽)이며, 호는 외당(畏堂)이다. 젊어서 면암(勉庵 ) 최익현(崔益鉉, 1834~1907)과 일신재(日新齋)  정의림(鄭義林,1845~1910)의 문하에서 공부를 하였다.   최익현은 이항로의 제자로 화서학파에 속하며,  정의림은 기정진의 제자로 노사학파에 속한다.   정의림은 정재규(鄭載圭),  김석구(金錫龜)와  함께 노사의 3대 제자로 알려졌는데, 특히 화순지역에 제자들이 많았다.  1868년 경에 기정진의 제자가 된 정의림은 1886년 경에 200명이 넘는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박규진은 이러한 정의림에게 학문을 배웠다.

1893년(36세, 고종30년) 겨울에 스승 정의림이 화순군 춘양면 칠송리(지금의회송리會松里) 칠송부락에서 원을 지었다.  그러한 건물을 짓게 된 이유를 정의림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난해 봄에 칠송마을에 강당터를 정하고 가을에 일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다음해 겨울 12월에 완공을 하였다.  아! 선비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위인(爲人)의 도리를 하고자 한다면 학문이 아니고 는불가능하다.  학문의도는 스승과 벗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니 스승과 벗에게 친히도를 묻는까닭이다.   배우는자는 또한 그 장소가 없을 수 없다. 상서(庠序)와  학교는 원래 윤리를 밝게하고 가르침을 세우는 곳이지만 삼대 이후에는 도를 따름이 전과 같이 않게 되었다.   또한 시장이 성곽 안에 있어서 다투고 싸울 일이 많아지고, 적막하고 한가한 취미는 적게 되었다.  이것이 이 서원을 일으키게 된 연유이다.”

 ( ⌈일신재집 ⌋4권,영귀정기)

 

그는 ⌈논어 ⌋에서 ‘영귀(詠歸)’라는 이름은 따 영귀정(詠歸亭) 이라하였는데,⌈논어⌋ 를 보면 공자가 어느날 제자들에게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랬더니 증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늦은 봄에 가벼운 옷을 입고 젊은이 대여섯 사람과 아이들 예닐곱 명 정도를 데리고 기수에 가서 목욕하고 기우제를 지낸 언덕에 올라 바람을 쐬고 시를 읊으면서 돌아오겠습니다.(莫春者, 春服既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詠而歸 。 )”

( ⌈논어 ⌋선진편)

 

공자는 이 말을 듣고 자신도 그렇게 하고 싶다고 맞장구를 쳤다.  이러한 고사에서 두글자를 얻어 영귀정이라 이름을 지은 것이다 .  정의림은 영귀정에 성인 아홉명의 영정을 모시고 본격적으로 젊은이들을 모아 가르쳤다.

박규진은 영귀정이 완성되던 날 그곳에 들려 다음과 같은 시를 짓고 기쁨을 함께하였다.

정자를 지으니 이름난 이 땅은 더욱 신비스럽구나.
(亭築名區地秘靈)

그 이름을 기수(沂水)의 맑은 물 한줄기에서 취했네.
(取諸沂水一原淸)

젊은이와 아이들을 데리고 바람을 쐬고 목욕하니 봄날이 길구나.
(冠童風浴春長在)

증점이 비파로 천기를 연주하니 만고의 소리로구나.
(曾琵天機萬古聲)

(⌈외당유고 ⌋)

 

이러한 글을 보면 박규진은 이미여러해 전부터 정의림의 문하에서 학문을 계속해 온 것으로 추정된다.  정자를 세운 그 뜻이 아주 오랜 공자시대의 그 뜻과 같음을 노래하고 그러한 전통이 자신이 사는 화순에서 이어짐을 대견스러워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1894년(37세, 고종31년)에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다.  화순군 능주면 우봉리에 사는 홍우용(洪祐鏞, 1872~1941)이 23살의 나이로 과거에 합격하여 장릉 참봉의 벼슬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그는 나라가 혼탁하여 관직에 나가는 일을 포기하고 낙향하였다.  홍우용은 박규진과 동문으로 정의림의 제자였다.

1905년(48세, 광무9년)에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  최익현, 정재규, 기우만등이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다 해 의병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  최익현은 다음 해에 의병을 일으켰다가 관군에 체포되어 대마도로 유배된 뒤,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박규진은 최익현에게도 배웠으니 스승의 죽음은 서쪽 멀리 떨어진 화순에도 들려왔을 것이다.

1910년(53세, 융희4년) 한일합방으로 국권을 상실하였다. 스승 정의림은 의병 운동의 실패와 국권상실의 절망감으로 일체의 외부활동을 중시하고 두문불출하다 10월 10일 별세하였다.  정의림은 사후에 그가 지은 영귀정 옆에 세워진 칠송사(七松祠) 배향되었다.  나중에 제자들 여러명도 이 칠송사에 배향되었는데 박규진의 이름은 배향 인물에 올려지지 않았다.  정의림의 제자들은 화순지역의 곳곳에 흩어져 강학활동을 열심히하여 많은 제자들을 양성했다. 특히 배석면(裵錫冕),  배치묵(裵致黙)과 같은 제자들은 100여명이 넘는 문도를 두었는데 박규진의 강학활동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1929년(72세, 일제시대), 이즈음 능주에 사는 홍우용이 금오산 아래에 정자를 짓고 이름을 우산정사(牛山精舍)라 하였다.  또 역락정(亦樂亭) 지었다.  박규진은 자연과 학문을 벗삼아 은거하는 홍우용을 찾아 그 정자를 방문하고 다음과 같은 시( ⌈외당유고 ⌋次牛山精舍韻)를남겼다.

사방에 물이 흐르고 가운데 봉우리 높게 서있네
(四圍水曲一高岑)

아름다운 나무가 숲을 이루니 땅 가득 그늘뿐
(佳木成林滿地陰)

도끼가 조금도 범하지 못하니 온통 새로 자란 나뭇가지
(少無侵斧多萌蘖)

많은 책들도 함께 있어 마음을 잡아 끄는구나.
(亦有藏書是貫心)

은둔하며 살다가 연기와 구름 잠긴 것만 보니
(幽居但見烟雲鎖)

한가한 이곳에서 세월 깊어 가는걸 어찌알리.
(閒處安知歲月深)

세상사 들리지않아 마음만은 즐거우니
(外事不聞中樂意)

현인과 군자가 서로 찾기 좋은 곳이네.
(賢人君子好相尋)

박규진은 또 전라남도 화순군 춘양면 우봉리에 있는 침수정(枕漱亭)에도다음과같은글을남겼다.( ⌈외당유고 ⌋謹次枕漱亭韻)

그윽한 정자가 작은 티끌도 허락하지 않고,
(幽亭不許上微塵)

물과 대나무가 맑고 한가로운 별세계의 봄이네.
(水竹淸閒別地春)

하늘의 밝은 달은 일생동안  읊조리던 자취요,
(霽月一生吟弄跡)

높은 풍격은 백세 동안 다스리던 몸이네.
(高風百世濟康身)

선현의 향기가 시로 남아 옛스럽고
(先賢芬馥題詩古)

후학들이 가슴에 품은 회포는 강연으로 새롭네
(後輩襟期講道新)

깨끗이 씻고 갈아 얻음이 있음을 알겠으니,
(澄汰磨礱知有取)

이 아름다운 이름은 단지 돌과 물 때문만은 아니라네.
(佳名非獨石流因)

1934년(77세, 일제시대)에사망하였다. 유집으로1994년에간행된 ⌈외당유고(畏堂遺稿) ⌋가있다.

<참고자료>
오인교, 南道정자기행(2553)-화순우산정사(牛山精舍),<한국매일>, 2015.10.6
이종범편, 화순역사인물을활용한컨텐츠개발용역결과보고서 , 2014.11.2
권수용, 근대기화순유학의부흥과정의림(鄭義林)의역할, 화순 역사인물을활
용한컨텐츠 개발용역결과보고서 , 2014

이하조(李賀朝:1664~1700)


이하조(李賀朝:1664~1700)                                 PDF Download

 

의 자는 낙보(樂甫), 호는 삼수헌(三秀軒)이며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증조는 이정귀(李廷龜)이며 조부는 이명한(李明漢)이고 아버지는 이단상(李端相)이다.  이단상은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과 깊은 학문적 교류를 가진 인물로 율곡의 계열로 분류된다.  이단상의 문하에 임영(林泳), 김창협(金昌協), 김창흡(金昌翕) 등이있다. 이가운데김창협은 그의 사위였으니 이하조에게는 자형(姊兄)이 된다. 이하조 의 형 이희조(李喜朝) 역시 송시열의 문하생이다.

이하조는 6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형 희조를 따라 공부 하였으므로 아버지의가 르침을 전혀 받지 못하였다. 그럼에도19세 되던1 682년에 사마증광시(司馬增廣試)에 합격하여 진사(進士)가 되었다.  그 뒤 대과(大科)는 단념한 채 학문에만 매진하였으며, 영지동(靈芝洞)에 집을짓고 삼수헌(三秀軒)이라 이름지었다.  이해에 형  희조와 함께 여강(驪江)으로 송시열을 찾아가 출처(出處)의 의리에 대하여 자세히 들었다.  송시열의 문인이 되어 성리학(性理學)과 경서(經書)를 주로 공부하였지만 시인(詩人)으로서의 면모를 보이기도 하였다.  때로 친구들과 산림을 유람하며 한아(閑雅)한 취미를 길러 시(詩)로 묘사하기도 하였다.

1686년 (숙종12) 3월에 형 희조와 우거하 고있던 민태중(閔泰重)과 학궁(學宮)의 제생 10여명이 파계(巴溪)로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을 찾아가《주자대전(朱子大全)》 의교정(校訂)하는 일을 도왔다.  이 시기에 간간히 시간을 내어 강산을 유람하며 시회(詩會)를 갖곤 하였는데 헤어질 때에 돌아오는 여름에 상당(上黨: 지금의 청주(淸州))과상산(常山)의 경계에서 모임을 갖기로 하였다.

기일(期日)이되어 우암은 손자 인주석(疇錫)을 대동하고 상당 남쪽경계에 성묘를 하였다.  이때 이희조가 기년상(朞年喪)을 당하여 서울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암이 그와 만나지 못하는 섭섭한 마음을 안고 파계로 돌아왔는데 이하조가 상산에서 뒤 따라와 서형이 머지않아 돌아올 것이라고 전하자,  산중에 오래 머물면서 그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그런데 조정에서 들려오는 여론이《주자대전(朱子大全)》에 차의(箚疑)하는 것은 망녕되게 국법에 저촉된다 하여조정의 논의가 매우 부정적이라는 것이었다.  이 소식을 듣고 우암은 탄식하며 산을 내려와  소장(疏章)을 올려 죄를 청하였다.  이 때문에 산속에서 이희조를 기다리고자 했던 계획이 어긋나게 되었음을 토로한 적이 있다.
우암이 82세의 나이로 이해 7월에 쓴 편지에 그 내용이 보인다.  이후로도 우암과 편지를 주고 받았는데 1688년(숙종14년) 이하조는 파계에서 모였던 일을 추억하였으며, 우암은 제자에게 답한 편지 글에서 그날의 모임에 대한 의미를 찾으며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안타까워 했다.

1694년(숙종20)에 시국이 안정되는 모습을 보이자, 친구들이 과거에 응시할 것을 권하였지만 응하지 않았다.  그 뒤에 세자 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의 제명(除命)에 응하였던 것은, 선대(先代)의 공음(功蔭)을 이어받아 벼슬하는 것이 세신(世臣)의 본분이며, 고을을 얻어 봉양하기에 편리하게 하려 한 것이었다. 시직(侍直)과 부솔(副率)주부(司僕寺主簿)가 되고 공조좌랑(工曹佐郎)이 되었다. 1698년(숙종24)에는 부평현감(富平縣監)이 되어 어진정사를 폈다. 이때에 정사를 보던 곳의 이름을《대학(大學)》의<청송장(聽訟章)>을취하여 ‘사무헌(使無軒)’이라고 하였다. 이 말은 공자(孔子)가 말한

“송사를 처결하는 것을 내가 남들처럼 할 수는 있지만,  반드시 처결해야 할 송사 마저도 일어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라고 한데서 인용한 것이다.

이런 내용으로 자형인 김창협(金昌協)에게 편지를 보내어 가르침을 구하였다.  김창협은 이에 대하여 처음에는 “송사를 없게한다.”는 말은 성인(聖人)의 일로서,  명덕(明德)을 밝히고 백성 을새롭게 한 뒤의 최고의 보람인 것인데,  어찌 그가 미칠 수 있는 경지 이겠느냐며 부정적인 시각을 가졌다.
그러나 그 뒤에 생각해보니 처남인 이하조가 어진 마음에서 출발하여 송사를 판결하지 않은 것이지,  단순히 편리를 추구하여 그런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처남이 어찌 송사가 없는 것이 오늘날엔 도저히 미칠 수  없는 성인의 일인 줄 몰라서 그렇게 하였겠는가 하며 반문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 말로 헌(軒)의 이름을 지어 자신의 뜻을 드러내었으니 훌륭한 일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700년(숙종26년) 병으로 경사(京師)에 돌아가 강도유수(江都留守)가 되었으나, 친분으로 인해 공정하지 못하다는 오해를 받을 소지가 있 는의혹으로 벼슬이 갈렸고,  병이 위독해져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였다.  7월 10일37세의 나이로 운명하였으며 처음에 영지(靈芝)와 7리 떨어진 비교적 가까운  독정리(獨井里)에 장사 지냈다가 1710년(숙종36년) 3월에 용인 문수산(文秀山) 선영(先塋)으로 옮겼다.

그는 안동(安東) 김창국(金昌國)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두었으나 일찍 죽었다.  그리하여당 형(堂兄)인 감사(監司) 이해조(李海朝)의 아들 숭신(崇臣)을 후사로 삼도록 하였으며,  네 명의 딸을 두었다.  숭신은 부사(府使)심징(沈徵)의사 위가되었다.

그의 자형인 김창협이 지은 뇌문(誄文)을 보면

“언의(言議)가 구차하지 않고 식견이 분명하고 발랐으며,  문사가 통창(通暢)하고 풍조(風調)가 울연(蔚然)하였다.”

라는 글이 보인다.  또 외사촌형인 서종태(徐宗泰)가 쓴 묘지명에 는

“세덕(世德)을 계승하여 집안에서 닦고 성대한 재능을 온축하였으니,  나와서 명예를 구하였으면 세상에 그 보다 앞설자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취를 거두어 스스로 진취(進取)하여 달려 나아가는 길에서 멀어진 것이 이미 고상하다.”

고하였다.

당시에 그가 지은 시문(詩文)이 1천여 편이 있다고 하며,  권상하(權尙夏)의 묘표에는 그의 유고 4책이 있다고 하였다.  지금 전해 오는 저서는《삼수헌고(三秀軒稿)》이다.  이유고는 자형인 김창협과 동생 김창흡이 산정한 고본(稿本)으로 이하조의 형 희조가 부록 등을 증보한 것인데,  친구인 나주목사(羅州牧使) 조정만(趙正萬)의 협조를 받아 그의 사후 13년이 지난 뒤에 발행한 5권 1책이다.

이인상(李麟祥: 1710~1760)


이인상(李麟祥: 1710~1760)                                 PDF Download

 

의 자는 원령(元零), 호는 능호관(凌壺觀) 보산자(寶山子)· 보산인(寶山人)· 종강칩부(鍾岡蟄夫)· 뇌상관(雷象觀)· 운담인(雲潭人)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증조부 이민계(李敏啓)는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낸 백강(白江) 이경여(李敬輿)의 서자(庶子)였다.  그가 9세 때에 아버지 이정지(李挺之)가 34세의 나이로 죽자,  어머니와 함께 어려운 생활을 하면서도 삼촌인 이최지(李最之)로부터 글 배우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고향에서 유년기(幼年期)를 보내고 22세 때 서울로 올라와서 26세에 진사시(進士試)에 입격(入格)하고,  이후 38세 때까지 관직생활을 하였다.  덕수장씨(德水張氏)를 아내로 맞이하여 4남 1녀를 두었는데, 그의 친구인 송문흠(宋文欽)과 신소(申韶)가 집을 마련해 주었고 송문흠은 이를 “능호관(凌壺觀)” 이라고 이름을 지어 주었다.
호(壺)자는 방호(方壺),  곧 방장(方丈)이라는 뜻 이므로 결국 자신의 집은 방장산(方丈山)의 경관을 뛰어 넘는다는 뜻을 갖는다.

38세 때인 1747년에는 중앙관직에 있다가 경상남 도함양군(咸陽郡) 의 사근찰방(沙斤察訪)으로 나갔다.  41세 때인 1750년에는 경기도 이천군(利川郡) 장호원읍(長湖院邑)에 위치한 음죽현감(陰竹縣監)에 부임하였다.  음죽현감으로 있으면서 강직한 성품 때문에 관찰사와 다투고서는 관직에서 떠났다.
42세 때인 1751년에는 친구 이윤영(李胤永)이 은거하고 있는 단양(丹陽)을 찾아가 은거하고자 하였으나 오래 있지는 못하였다.  다시 음죽현 서쪽설성(雪城)의 종강(鍾崗)에 칩거하여 여생을 보냈다.  그곳에 지은 정자는 “종강모루(鍾崗茅樓)”라고 이름을 지었다.  48세 때인 1757년에 부인을 잃고 51세 때인 1760년에 자신의 생을 마감하였다.

이인상은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문인 화가(文人畵家)이자 서예가(書藝家)로 알려져 있다.  그가 교류했던 인물들은 대부분 도암(陶菴) 이재(李縡)의 문인이다.
도암은 스스로

“정암(靜庵)과 율곡(栗谷)은 나의 스승이다”

라고 말하며 깊이 사숙(私淑)했던 인물이다.  또한 이인상이 사숙했던 인물로는 삼연(三淵) 김창협(金昌協)과 지촌(芝村) 이희조(李喜朝) 등의 노론계 학자들이었다.
율곡의 문하에 김장생이 있었고 김장생의 문하에 송시열이 있었으며 송시열의 문하에 김창협과 이희조가 있었다.  그 역시 노론의 학맥을 유지하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와 교유했던 인물로 “능호관기”를 써 주었던 송문흠을 비롯하여 시서화(詩書畵)에 능했던 이윤영(李胤永) 이있다.  송문흠은 그의 형 송명흠(宋明欽)과 함께 도암의 제자이다.  이윤영은 목은 이색(李穡)의 후손으로 이인상의 그림에 화제(畫題)를 많이썼다.  또한 신소(申韶), 오찬(吳瓚)과도 정치적 입장이나 문예적 인삶의 자세를 공유하였다.  이외에도 당대에 시서(詩書)에 명성이있었던 황경원(黃景源),  평안관찰사,  대제학,  좌의정을 지낸 문장가 였던 김종수(金鍾秀),  이조판서를 지낸 이최중(李最中)이 있었다.  또 광산 김씨 가문의 김순택(金純澤),  김무택(金茂澤) , 김양택(金陽澤),  김상악(金相岳),  김상숙(金相肅)과도 평생 동안 교유하였다.

이인상은 시서화(詩書畵)는 물론 전각(篆刻)에도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였다.  이미 당대에 많은 문인들이 그의 글씨와 그림에 대하여 인정하는 평가를 남겼다. 후대의 인물 김정희(金正喜) 역시 높은 감식안 으로 그의 예법(隷法)과 화법(畫法)에 문자기(文字氣)가 있다고 말하였다. 특히 김정희와 이윤영은 집안 대대로 인척관계를 맺고 있어서 그 교류하는 양상인 남다른 면이 있었다.

이인상은

“명나라는 부모의 나라이니, 부모의 원수는 의리에 있어 반드시 복수해야 한다.”

라고 하여 ‘반청의식(反淸意識)’을 가졌다. ‘대명 의리론(大明義理論)’를 견지함으로써 복수하려는 의리를 지키는 것이 사대부의 의무라고 생각하였다.  그의 고조부 이경여가 대표적인 반청주의자로서 심양에 억류되었던 사실이 있었던 것도 연결하여 생각해 볼 수 있다.
‘대명의리론’과 관련하여 옛것을 좋아하는 상징적문화  행위는 북벌(北伐論)이 쇠퇴하 는현실과 타협하지 않겠다는 생각의 반영으로 고동(古董) 수집과 감상에의 취향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그가 추구한 고(古)의 의미를 풀어보면, 역사적으로는 ‘선진(先秦)시대 이전’을 가리키고,  도덕적으로는 ‘세속적 가치와의 비타협’을,  정치적 차원으로는‘ 사대부적 처신과 의리의 강조’로,  문예적 차원으로는 ‘고문과 고동(古董)의 애호’로 드러났다.

그의 친구인 청천자(靑川子) 임경주(任敬周)에 따르면 이인상은 문(文)과 도(道)를 병행했던 까닭에,  문장가와 도학자 모두에게서 비판을 받았다고 한다.  문장가는 그에게 도에 힘쓰면 문에 전력할 수  없다고 말하였으며,  도학자는 그에게 외식(外飾)하는 문이 아니라 본질이 되는 도에 힘쓰라고 말했다고 한다.  임경주의 이러한 말을 참고하면 이인상은 문(文)과 도(道)를 모 두중시했던 이유로 도학가와 문장가 모두에게 공격 받을 수  있는 여지가 있었던 것이다.  즉 도학과 예술을 엄격히 구분하는 기준으로는,  도학에 전일하지 않는 인물로 간주되거나 문학의 독자성을 인정하지 않는 인물로 이해 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친구와 사귀며 편지를 주고 받을 때는 비교하는 마음을 일체 경계 해야하며,  잘난 체하는 마음을 일체 경계 해야하고,  잘못을 숨기는 마음을 일체 경계 해야한다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교우(交友)에서 경계 해야 할 마음가짐을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겠는데,  이는 곧 비교하는 마음,  잘난 체하는 마음, 잘못을 숨기는 마음이다.  이 세 가지를 전체적으로 말하자면 도의에 입각한 교우를 위해서는 사귐을 맺은 두사람 사이에‘ 진실한 마음을 수반한 상호 수평적 관계’가 전제 되어야함을 말한 것으로 이해 할 수 있겠다.

이인상과 그 친구들의 문예 취향(文藝趣向)은 이른바 동시대 경화사족(京華士族)과는 뚜렷한 거리를 두고 있다.  조선후기 경화사족은 일반적으로 서울에 거주하면서 많 은재력을 바탕으로 서화고동(書畫古董)과 서적(書籍)을 모으며 자신들의 품격있는 삶을 지향하였다.  그러나이 인상과 그 친구들은 경세적(警世的)인 성격을 띠고 있었음이 확연히 드러난다.  이인상은 서얼 출신(庶孼出身) 이었으나 사대부들과의 폭넓은 교유를 하였으며 아울러 사회적 약자들에게 까지 도관심을 나타냈었다.  일반적인 은일자(隱逸者)로 불리는 것을 꺼렸으며 현실과의 문제를 끊임 없이 고민했던 예술가 이자 문인이었다.

그의 문집으로는《능호집(凌壺集)》, 필사본《뇌상관집(雷象觀集)》, 또
다른 필사본으로《뇌상관고(雷象觀藁)》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