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 향약 시행의 어려움을 말하다


<역사속의 율곡학 스토리텔링21>

율곡, 향약 시행의 어려움을 말하다

 

선조 6년, 즉 1573년 9월 21일의 이야기다.

날 율곡은 왕에게 ⌈서경⌋을 강의하였다. ⌈상서(尙書)⌋라고도 불리는 이 책은 ⌈우서(虞書)⌋, ⌈하서(夏書)⌋, ⌈상서(商書)⌋, ⌈주서(周書)⌋로 구성되어 있는데, 요순시대, 하나라시대, 은나라(상나라)시대, 그리고 주나라 시대의 정치 이야기를 기록한 역사 서적이다. 이날 율곡이 어떤 내용을 강의하였는지는 상세한 기록이 없다.

당시 조정에서는 향약(鄕約)의 실시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향약이란 ‘향촌의 약속’이란 뜻으로 마을의 자치적인 규약을 말한다. 1519년, 중종 14년에 조광조가 향약을 널리 실시하고자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한 적이 있었다.

율곡이 지은 ⌈경연일기⌋의 1573년(선조 6년) 9월 기록을 보면 ‘옥당(玉堂)과 양사(兩司)에서 상소하여 팔도 군읍(八道郡邑)의 사민(士民)으로 하여금 향약을 행하도록 하자고 잇달아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고 하였다. 옥당은 홍문관이며, 양사는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을 말한다. 이들 부서에서 향약 시행을 거듭 요청하여 선조는 허락을 하였다는 것이다.

1573년 9월 21일 경연장의 일이다.

선조 임금의 목소리가 다소 잠겨 있었다. 그것을 놓치지 않고 율곡은 이렇게 말했다.

“제가 병이 있어 오랫동안 고향에 물러가 있었는데, 오늘 전하의 목소리를 들으니 많이 잠겨있는 듯 하온데, 무슨 까닭으로 그러하신지 모르겠습니다. 전하께서는 여색을 경계하라는 말을 싫어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중략) 그런 일이 없으면 여색을 멀리하도록 더 힘쓰실 것이요, 듣기 싫어해서는 안 됩니다.”

율곡은 임금에게 강의를 하는 입장이었으나, 동시에 홍문관 직제학의 신분으로 왕을 대면하는 입장이었다. 홍문관의 관원들은 임금의 자문에 응하는 임무 외에도 조정의 일에 대해 옳고 그름을 논하거나 임금의 잘못을 간언하는 책임이 있었다. 임금의 목소리가 평소와 달리 잠겨 있다는 것은 무언가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판단하고 그 문제를 임금 스스로 파악할 수 있도록 간언을 한 것이다. 동시에 율곡은 임금이 사람들의 듣기 싫은 간언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하여 싫어해서는 안 된다는 충고도 덧붙였다.

조선의 임금 자리는 그렇게 어려운 자리였다. 율곡의 지적이 지나친 점도 있었으나 당시 율곡이 속해있던 홍문관은 특히 간언의 중추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임금이 사헌부나 사간원의 간언을 듣지 않으면 마지막으로 홍문관까지 합세하여 간언을 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한 홍문관의 관료로서 간언을 한 것이다.

선조도 임금이 된지 6년이나 지났기 때문에 그냥 꾸중만 듣고 있지는 않았다. 당시 22살의 혈기 왕성한 청년이었던 선조는 이렇게 대꾸했다.

“그대가 전에 올린 상소(上疏)에도 그렇게 말하였으나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람의 말소리는 원래 같지 않은 것인즉 내 말소리가 원래 그러한데 무슨 의심할 것이 있겠는가?”

쓸데없이 목소리를 핑계로 여색 운운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율곡도 그냥 물러설 사람이 아니었다.

“전하가 막 임금이 되었을 때도 제가 가까이서 뵈었는데, 그 때에는 목소리가 낭랑하여 이렇지 않았기 때문에 제가 감히 의심한 것입니다.”

옆에서 선조와 율곡의 이야기를 계속 기록하고 있던 사관도 두 사람의 대화가 날카로워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는지, 이렇게 기록했다.

‘이이(율곡)가 임금에게 일을 아뢸 때 어투가 너무 직설적이었는데, 이 때 전하가 자못 언짢아했다.’

이어서 선조는 화제를 돌려 율곡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대는 무슨 까닭으로 조정에 머물지 않고 오래도록 물러가 있었는가?”

율곡이 사퇴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있었던 것에 대한 불만을 토로한 것으로 화제를 슬쩍 돌린 것이다.

율곡은 그 전 해 1572년(37세)에 병으로 사직을 하고 고향인 파주로 내려가 친구인 성혼과 어울려 성리학 공부를 하고 있었다. 다음해 1573년 7월에 홍문관 직제학으로 임명되었으나 그는 바로 사퇴를 청하였다. 하지만 허락을 받지 못했는데, 여러 차례 상소를 하여 결국 허락을 받고 다시 파주로 돌아갔었다. 그런데 9월에 조정에서 다시 율곡을 직제학으로 임명하였다. 율곡은 또 사퇴를 청하였으나 이때는 허락을 받지 못했다. 이날 율곡이 임금에게 서경을 강의하게 된 것은 그런 일이 있고난 뒤였던 것이다.

율곡은 자신의 행동을 변명하듯이 이렇게 말했다.

“저는 몸이 쇠약하고 병들어서 힘써 전하를 모실 수가 없었습니다. 마음의 병이 있는데다 능력도 짧아서 조정에 있어도 도움을 드릴 수가 없는데, 구차하게 녹(祿)을 먹는 것을 생각하면 마음의 병이 더 심해졌습니다. 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물러가 있었으나 군신(君臣)의 의리야 감히 잊었겠습니까?”

선조는 그 말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

“그대는 이곳에 머물며 나를 보좌해야 하니 다시는 떠난다고 하지 말라.”

행여 젊은 임금이 여색에 너무 빠져 목소리가 상하게 되었는지 의심을 한 신하이기도 하였지만, 그것은 바로 자신을 위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을 선조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율곡은 이제 시급한 정무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향약(鄕約)을 오늘날 거행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여러 방면의 정치가 아직 원활하지 못하고 백성들의 생활이 고달픈데, 교화(敎化)하는 일부터 시행한다면 추진이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전하께서 거행하라고 명령을 내리셨으니, 이에 전하의 마음이 장차 큰일을 할 수 있음을 알겠습니다. 전하께서 더욱 힘써 몸소 솔선하신다면 무엇을 행한들 어렵겠습니까?”

율곡은 백성들의 생활이 고달픈데 그들을 교화하는 일이 그렇게 시급한 것인가 하는 뜻이었다. 이미 임금이 향약 시행을 결정한 이상 적극적인 반대는 못하지만, 자신의 생각은 그것에 적극 찬성할 수 없다는 뜻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다.

같은 자리에 참석하고 있던 김우옹(金宇顒)은 율곡의 의견과는 달랐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향약을 어찌 행할 수 없겠습니까? 무릇 일에는 근본이 있어야 하며, 이것은 임금에게 달려 있는 것으로 몸소 행하고 마음으로 체득하여 모범이 되고서야 행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중략) 만약 향약을 오늘날에 행할 수 없다고 여긴다면 크게 일을 그르치게 됩니다. 지난번 경연관(經筵官)이 주자의 말을 인용하여 향약은 행하기 어렵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매우 옳지 않습니다. 교화는 반드시 위에서 하는 것인데, 주자는 아랫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행하기 어렵게 여겼으나 이제 전하께서는 이룰 수 있는 자리에 계시니, 무엇 때문에 행하기 어렵겠습니까?”

김우옹은 임금의 의지만 있으면 향약의 시행이 어렵지 않을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율곡이 이미 청주목사(淸州牧使)로 임명되었을 때, 그곳에서 향약을 시행해본 경험이 있어 그 일이 임금의 의지만으로는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