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군주 선조의 고민


<역사속의 유교이야기 20>

젊은 군주 선조의 고민

 

리나라는 5년마다 한 번씩 최고 통치자가 바뀐다. 새로운 대통령을 뽑는 날 자신이 투표한 인물이 대통령에 당선되면 그 사람들은 5년간에 변하게 될 대한민국의 미래를 상상하면서 커다란 희망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자신이 기대하지 않았던 인물로, 더구나 그 능력이 의심스럽다고 생각되는 인물이 선출되면 그를 찍지 않은 사람들은 절망에 빠진다. 그리고 5년간의 미래를 걱정한다. 단지 5년뿐인데도 그렇다. 그렇다면 조선의 임금들처럼 죽을 때까지 최고 통치자가 되는 경우는 어떨까? 사람들이 가지게 될 심리적 부담을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조선의 임금들은 종신직이었다. 죽을 때까지 최고 통치자로 산다. 선조는 1567년에 16세의 나이로 조선의 왕이 되었다. 그의 미래에 조선은 일본의 침략을 받아 경복궁이 불타고 임금이 종묘사직을 버리고 다른 나라로 망명을 준비하고 조선왕조실록의 보관 창고가 송두리째 불타버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누구도 그런 일을 예견하지 못했고, 누구도 그런 사건의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았다. 선조 자신도 처음부터 자신의 나라를 그렇게 멸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으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선조는 명나라로부터 조선의 국왕이라는 공식적인 통보를 받고서 나라 안의 대학자들을 궁궐로 불렀다. 장시간 동안 ⌈대학⌋ 공부를 하고 있던 그때, 그는 불려온 성리학자 기대승(奇大升, 1527-1572)에게 이렇게 질문했다.

“정자나 주자가 관직을 떠나 물러간 것은 그 당시 임금이 소인의 이간질로 지성으로 대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약 임금이 지성으로 했더라면 어찌 참소가 있겠는가?”

어진 사람들을 곁에 두고 훌륭한 정치를 펼쳐보고 싶다는 포부를 이렇게 바꿔 말한 것이다. 선조 자신은 정자나 주자처럼 훌륭한 학자들을 지성으로 대할 자신이 있다는 의사 표시이기도 하였다. 기대승이 이 앞의 설명에서 명도(明道)나 이천(伊川) 그리고 주자의 관직 생활이 여의치 않았으며, 자신들의 꿈을 정치에서 충분히 펼쳐 보이지 못했음을 설명하자 거기에 대해 그렇게 질문을 한 것이다.

기대승이 이렇게 대답했다.

“임금님의 가르침이 지당하십니다. 하지만 소인이 군자를 해치는 데는 천만 가지의 방법이 있기 때문에 임금이 비록 지성으로 어진 사람을 등용하려 해도 어진이가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중국 남송 때의 효종(孝宗)은 유능한 임금이었습니다.
주자는 근본을 바로잡고 근원을 깨끗이 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세 번이나 입궐하여 진언한 것이 모두 환관을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효종이 비록 어질다고 하더라도 왕에 오르기 전에 총애하는 자들이 주변에 많았기 때문에 인정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주자는 아첨꾼들이 조정을 좌지우지하고 있으면 임금이 비록 진심으로 국사를 운영한다고 하더라도 끝내는 반드시 후환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물러갔습니다.”

훌륭한 학자를 곁에 두고 일을 맡기려고 해도 그것이 쉽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소인이 군자를 해치는 방법이 수없이 많기 때문에 임금의 뜻이 그대로 이루어지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당시 기대승은 41세였다. 그 뒤 3년 뒤에 관직을 버리고 낙향할 것을 선택하였는데, 왜냐하면 기대승은 이미 조정에서 불합리하게 벌어지는 많은 것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또 기대승은 이렇게 말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어진이를 알아보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알고서 신임하는 것이 어렵다’고 했습니다. 만약 신임하지 않는다면 소인의 참소와 이간질이 어찌 이르지 않겠습니까.
우리 조정의 일로 말하더라도 중종 초년에 조광조(趙光祖, 1482-1520)가 정성을 쏟아 지극한 정치를 도모하고 마음을 다하여 국사에 임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학문이 성현의 경지에 미치지 못하여 당시 실시한 일들이 간혹 적중하지 않기도 했습니다. 그리하여 소인들의 무리가 끝내 사직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라고 모함하자, 중종도 믿지 않을 수 없어서 결국에는 큰 화를 입게 되었습니다. 대신을 신임하게 되면 소인은 이간질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어진이 하나가 참소를 받고 물러간다면 사람들은 세상을 등지고 발걸음을 멀리 할 것이며 조정에 나오는 자들은 녹만을 탐할 뿐입니다.”

기대승은 또 선조가 이황이며, 이항, 조식 등 원로 대학자를 초빙한 점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했다.

“지난번에 이황(李滉), 이항(李恒), 조식(曺植)을 올라오게 하신 일은, 그것이 비록 선왕의 뜻이었다고는 하지만 임금께서 계승하시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 이상 가는 일은 없습니다.
다만 이황은 1501년생이고, 이항은 1499년생이며, 조식 역시 1501년 모두 70세의 고령입니다. 이처럼 날씨가 몹시 추울 때에는 불러올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미 부르시는 명령이 내리셨으니 아마도 물러나 있기가 미안하여 괴로워 할 것입니다. 만약 집에 있으면서 병을 조리하는 것을 어렵게 여겨 길을 떠났다가 병이라도 얻게 되면 길에서 죽을까 걱정됩니다.
전하께서 만나보시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고 하더라도 어진 선비를 만나 뵐 때에는 관대하게 해야지 몰아붙여 촉박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날씨가 춥고 병이 있다면 일의 형세를 보아가면서 올라오도록 다시 명령을 내리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젊은 임금 선조는 이렇게 대학자들을 모시고 자신이 나라를 다스리는데 귀중한 조언을 듣고 싶어 했다. 기대승은 선조의 관심에 부응하여 이황과 이항 그리고 조식에 대해서 자신이 듣고 본 바를 상세하게 소개했다. 예를 들면 그는

“이황과 이항은 신이 직접 보아서 잘 알고 있으며 조식은 신이 보지 않아 잘은 모르지만, 일찍이 여러 벗들을 통해 그들의 사람됨에 대해서 들은 바가 있습니다. 이황에 대한 평을 보면, 자질이 매우 고명하고 정자와 주자를 조술(祖述)하여 근래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인물이 드뭅니다. 그의 성품이 명예나 이익에는 관심이 없으며 젊어서부터 벼슬살이를 싫어하여 고향에 내려가 사느라 고생이 많다고 합니다.”

라고 하였다.

하지만 젊은 선조가 너무 급하게 일을 추진하는 것을 염려하여 기대승은 다음과 같이 충언을 덧붙였다.

“부득이 성상(임금)의 학문이 고명해지신 뒤에야 정무(政務)의 득실과 시비, 그리고 여러 신하들의 현명함과 그렇지 못함, 나쁜 점과 좋은 점을 볼 수 있으실 것입니다. ⌈중용⌋ 구경장(九經章)에 이르기를 ‘몸을 수양하면 도가 확립된다.’라고 하여 ⌈중용⌋의 도는 수신을 근본으로 삼았습니다. 이천(伊川) 역시 뜻을 세우고, 현명한 인물을 구하고, 임무를 맡길 때 전적으로 맡기는 것을 천하를 다스리는 요체로 삼았습니다. 근본을 바로잡고 근원을 맑게 한 뒤에야 어진이가 기꺼이 등용되고자 할 것입니다. 어진이를 등용하지 못한다면 그들이 비록 큰일을 하려고 해도 어찌 진심을 다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뜻을 임금께서는 유념하셔야 합니다.”

이렇게 말한 기대승 자신 역시 선조 곁을 떠나 낙향을 선택하였다. 조정에서 그는 자신을 경계하던 영의정 이준경과 끊임없이 갈등을 겪었다. 결국 이준경의 문제점을 들어 기대승은 선조에게 상소까지 하였으나 선조는 이준경을 감싸고 돌았다. 이준경은 선조가 왕에 오를 때 큰 공헌을 한 사람이었다. 옷자락을 붙잡는 선조를 뿌리치고 길을 떠난 기대승은 낙향 길에 조그마한 종기가 몸에 퍼지면서 사망하였다. 선조는 그의 죽음이 안타까워 그가 경연장에서 남긴 말을 모아 문집으로 만들도록 하였지만, 엄밀히 따지면 기대승을 떠나게 한 것은 선조 자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