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의 중국 유교사 공부


<역사속의 유교이야기 19>

선조의 중국 유교사 공부

 

선시대는 유교가 국교와 마찬가지의 위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특히 성리학은 하나의 정치 이념과도 같은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는데 어떤 과정을 통해서 그러한 영향력을 갖게 되었을까?

선조가 즉위한 해, 즉 1567년에 이루어진 경연의 기록은 그러한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다. 당시 16세였던 선조는 대학을 공부하면서 기대승에게 다음과 같은 중국 유교사 강의를 들었다.

“요임금, 순임금, 우임금, 탕임금, 주나라의 문왕, 무왕, 주공 그리고 춘추시대의 공자는 도(道)의 정통입니다. 요임금, 순임금 시대에는 고요(皐陶)·직(稷)·설(契) 같은 이가 있었습니다. 탕임금 시대에는 이윤(伊尹) 같은 사람이, 그리고 주나라의 기초를 세운 문왕에게는 태공망(太公望)과 산의생(散宜生) 같은 이가 있었습니다.”

이들이 유교를 만들어낸 것은 아니지만, 중국 유교의 역사는 이들 없이는 성립되지 않는다. 이들의 존재를 전제로 유교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요임금과 순임금은 하나라 이전의 임금들이다. 우임금은 하나라를 세운 왕이고, 탕임금은 은나라를 세운 왕, 그리고 문왕은 주나라의 기초를 세운 왕, 무왕은 그의 아들로 주나라를 세운 왕이며, 주공 단(周公 旦)은 문왕의 아들이요 무왕의 동생인데, 무왕 사후에 그의 아들 성왕을 도와 주나라의 발전 기반을 튼튼히 한 정치가이다. 그는 또 주나라 창업의 공신이기도 하고, 노나라의 시조이기 때문에 유교를 집대성한 공자가 특히 흠모하였다.

기대승은 이러한 소개를 한 뒤에, 유교의 역사에 대해서 이렇게 이어갔다.

“공자에게는 3천 제자가 있었습니다. 3천 제자들 중에서 안자(顔子)와 증자(曾子)가 그 종지(宗旨)를 얻었으며, 그 뒤에 자사(子思)가 증자의 전승을 받았고, 맹자(孟子)는 자사의 문인에게서 수업을 하였습니다.”

중국 근대시기에 활약한 사상가 양계초(梁啓超, 1873-1929)는 ⌈논어⌋와 ⌈맹자⌋가 한나라 때만 하더라도 2급, 3급의 책으로 치부되었으며, ⌈맹자⌋의 경우는 그 이름조차도 희미하여 제자백가 중의 하나 정도로 밖에는 인정받지 못했다고 하였다. 당시 중요한 유교 경전은 오히려 다섯 경전, 즉 오경인 ⌈시경⌋, ⌈서경⌋, ⌈예기⌋, ⌈춘추⌋, ⌈역경⌋이 중요한 책으로 꼽히고 있었다. 그러나 기대승은 성리학자로 송나라 때 형성된 신유학, 즉 성리학의 영향을 크게 받았기 때문에 중국 유교를 말하면서 공자 → 증자 → 자사 → 맹자로 이어지는 도통을 중시하여, 젊은 왕에게 그러한 관계를 설명한 것이다. 성리학적인 이념은 조선의 통치자에게 이렇게 전파되었다.

이어서 기대승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맹자가 죽은 뒤에는 공자의 도(道)가 끊어져서 천여 년을 내려오다가 송(宋)나라 때 이르러서 비로소 끊어진 도통이 이어졌습니다. 대표적인 인물로 염계 선생(濂溪先生)인 주돈이(周惇頤)가 있었는데, 학문이 고명하며 저술로는 ⌈태극도설(太極圖說)⌋과 ⌈통서(通書)⌋가 있습니다. 또 두 정씨가 나왔는데 형인 정호(程顥)는 호를 명도 선생(明道先生)이라 하였으며 저술로는 ⌈어록(語錄)⌋이 있고, 아우 정이(程頤)는 호를 이천 선생(伊川先生)이라 하였으며 저술로는 ⌈역전(易傳)⌋이 있습니다. 이들은 후학들에게 학문을 강론하여 유교를 공부하는 사문에 공로가 있었는데, 그들 제자로는 귀산(龜山) 양시(楊時)와 예장(豫章) 나종언(羅從彦)이 있습니다. 연평(延平) 이동(李侗)은 나종언에게서 배웠고, 주자는 이동의 제자로서 경서의 주석을 찬정(撰定)했으니 결국 두 정씨를 비롯한 여러 유학자들의 학문을 집대성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북송의 신유학자들과 주자에 대해서 상세한 설명을 하였다. 선조가 신하들과 유교 공부를 하면서 경우에 따라서는 깊이 있는 대화가 가능했던 것은 이러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조를 가르치는 당시의 유학자들 역시 기대승이 소개한 중국의 사상가들의 철학적 사유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선조는 기대승의 설명을 유심히 듣고 있다가 이렇게 질문했다.

“요·순·탕·무는 모두 훌륭한 신하를 얻어 함께 지극히 훌륭한 통치 성과를 이룩했으나 삼대(三代) 이후에는 비록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할 어진이가 있더라도 벼슬하기를 좋아하지 않고 도를 스스로 지키면서 은거하였다. 이는 그들이 때를 얻지 못하여 그런 것인가, 당시의 사정이 좋지 못해서 그런 것인가? 비록 태평성대를 만나더라도 그렇게 은거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무엇 때문에 그러한가?”

기대승이 복잡한 중국 유학사를 설명하고 있는 가운데, 젊은 임금인 선조는 자신 앞에 놓인 일에 대해서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국에서 삼대(三代)란 태평성대를 구가했던 하․은․주 시대를 말한다. 이 이후에 역사는 타락과 혼란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중국인들의 상고(尙古)주의적인 역사관이다. 옛 시대는 훌륭하고 그 이후 지금은 태평성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삼대의 시대에는 훌륭한 신하들이 많이 나왔기 때문에 그러한 좋은 시대가 되었는데 왜 나중에는 그렇게 좋은 신하들이 나오지 않고, 초야에 은거를 해버리게 되었는가? 그 때문에 세상은 더 혼탁하게 된 것은 아닌가? 지금 조선에 훌륭한 학자들이 많은데 그들을 어떻게 불러낼 수 있을까? 나는 어떻게 하면 요임금, 순임금과 같은 훌륭한 임금이 될 수 있을까? 선조 임금은 자신의 문제를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대승은 중국에 있었던 다양한 고사며 사례를 설명하며 지식인들이 자신의 임금을 위하여 일을 하려고 하였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았음을 설명하였다. 예를 들면 그는 고요(皐陶), 기(虁), 후직(后稷), 설(契), 이윤의 사례를 소개하고, 한 무제(漢武帝)와 같은 자는 ‘진시황(秦始皇)의 분서갱유(焚書坑儒) 이후에 육경(六經)을 드러내었으니 함께 일해 볼 만한 임금이라고 할 수도 있으나, 대체로 큰 공로를 좋아하여 내심에는 욕망이 많고 외면으로는 인의(仁義)를 과시했기 때문에 동중서(蕫仲舒) 같은 어진 사람을 얻고서도 등용하지 못하였다’는 이야기나, 송나라 때 정명도(程明道)나 정이천(程伊川)이 벼슬에 나가지 못한 일, 그리고 주자와 장횡거가 자신들의 포부를 펼치지 못한 사례를 아주 길게 설명하였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끝을 맺었다.

“후세에 간혹 조용히 물러나서 세상에 나오지 않으려는 자도 있고, 위에서는 알아주나 동료들의 질투로 등용되지 못하는 자도 있으며, 임금과 뜻이 맞지 않아 물러나는 자도 있지만, 진실로 성심을 다하여 어진 사람을 구한다면 후세에도 어찌 그런 자가 없겠습니까. 또 유학자로서 오직 학문에만 힘을 쏟고 임금을 섬기지 않으면서 자기의 지조만을 고상하게 가지려는 자가 어찌 없겠습니까. 대체로 어진이가 자중(自重)하지 못한다면 비록 등용한다고 한들 국가에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기대승의 설명은 단순 명쾌한 것은 아니었다. 젊은 임금의 질문을 간략히 파악해서 정곡을 찌르는 답변을 하지 못했다. 마지막 문장은 그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지도 잘 파악이 안 되게 만드는 말이었다. 그는 중국의 사정은 장황하게 잘 알고 있었으나, 젊은 임금을 옆에서 모시면서 우리나라를 태평성대로 만들어가고 그를 요순에 버금가는 성군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는 명쾌한 답을 내놓지는 못했다. 이러한 문제가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의 뒤를 이은 차세대 젊은 유학자 율곡 이이에게 선조가 깊이 빠져든 이유는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