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멸망하는 길


<역사속의 유교이야기 17>

나라가 멸망하는 길

 

람들은 누구도 자신이 살고 있는 나라가 멸망하여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고대에도 현대에도 나라의 멸망은 바로 자기 자신, 나아가 자기 가족, 친척, 그리고 자기 마을이 파괴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현자들이 오래전부터 나라가 멸망하는 일에 대해서 수없이 지적을 해왔다. 예를 들면 ⌈맹자⌋는 이렇게 말했다.

“나라 안에는 법도를 잘 지키는 신하와 보필을 잘 해주는 신하가 없고, 나라 밖에는 적국이나 외환이 없다면, 그 나라는 반드시 망한다.
(入則, 無法家拂士, 出則, 無敵國外患者, 國恒亡.)”

안으로 지혜로운 신하가 없고 법률이 무시되고, 밖으로 그 나라를 위협하는 세력이 없다면, 즉 무사태평하다면 반드시 망한다는 것이다.

관자도 나라의 지도자가 군비폐지를 귀담아 듣고, 나라 안 밖으로 차별 없는 사랑을 부르짖으며, 일상생활을 탐닉하고 사사로운 논의를 귀하게 여기며, 황금과 재물을 좋아하고, 사람들과 어울리며, 보고 즐기는 것에만 집착하며, 궁중에는 벼슬의 청탁이 횡행하고 아첨과 허물을 덮는 일이 만연하면 국가는 멸망의 길을 걷는다고 하였다. 양육강식의 사회에서 살았던 춘추전국시대 사람들의 생각이지만 오늘날의 상황에도 틀리지 않는 말이다.

조선이 일본에 군사적으로 압도당하여 멸망의 길에 놓이게 된 것은 선조 때의 일이었다. 당시 지식인들은 어떤 생각을 하였으며, 선조는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 선조 초년에 있었던 경연의 기록은 그러한 것들에 대한 대답을 해준다. 퇴계 이황이 참석했던 1567년 겨울 11월 17일(음력)의 기록이다.

 

“천지는 만물을 생성(生成)하는 것으로 근본을 삼습니다. 변화와 운행이 잠시도 쉬지 않고, 만물이 각기 성명(性命)을 바르게 가지니 이것이 이른바 인(仁)입니다.”

 

성명(性命)이란 본성과 본래 지니고 태어난 운명적인 것을 말한다. 세상의 모든 사물들은 그러한 본래적인 것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인자함(仁)이라는 것이다. 엉뚱하게 사물들에 대해서 말하면서 인간의 도덕적인 품성 중 하나인 인자함을 언급한 것은 사물과 인간을 하나의 범주에 넣어서 설명하려는 것으로 성리학의 큰 특징 중 하나다. 퇴계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세상은 처음 개벽한 이래 거칠고 소박할 뿐이었는데 복희(伏羲)에 이르러 팔괘(八卦)를 그리고, 신농(神農)이 온갖 풀을 맛보아 의약을 제조하였으며, 황제(黃帝) 때에 비로소 제도를 만들고, 요순(堯舜) 때에 인문(人文)이 크게 갖추어졌습니다.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제위를 물려주면서 ‘진실로 중(中)을 잡아야 한다.’고 하였고, 순임금이 우(禹)임금에게 위를 물려주면서 ‘인심(人心)은 위태롭기만 하고 도심(道心)은 은미하기만 하니 오직 정밀하고 전일하여야 진실로 그 중을 잡을 수 있다.’라고 하여 그 당시에는 제왕이 서로 전하던 법을 중(中)자로써 말하였습니다.”

퇴계가 말하는 복희, 신농, 황제, 요임금, 순임금은 중국의 역사에서 실존한 인물들은 아니다. 우임금은 하나라를 세웠다고 하는 왕인데, 중국의 역사는 이 하나라에서 시작하여 은나라(상나라), 주나라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왜 퇴계는 이들을 언급하였을까? 중국의 철학자들, 즉 공자, 맹자 이후로 주자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실존했던 인물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의 의견을 쫒은 것이다. 중국인들은 특히 요, 순, 우 등의 임금을 이상적인 정치가로 보았으며, 요순시대와 같은 사회를 중국 사회가 추구해야할 궁극의 목표로 삼았다.

퇴계는 다음과 같이 설명을 이어갔다.

“기자(箕子)가 무왕(武王)을 위하여 홍범(洪範)을 진술했는데 ‘임금은 그 극(極)을 세우는 것이다.’라고 하여 그 때에는 극(極)자로 말했습니다. 공자에 와서 비로소 인(仁)자를 말했는데 공자 문하의 제자들 역시 ‘인’을 많이 질문했으며, 맹자(孟子)에 이르러서는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아울러 말하여 그 뜻에 있어 부족함이 없게 되었습니다. ‘인’은 임금에게 있어서 매우 중대하니 한번 호령하고 한번 생각하는 때에도 모두 ‘인’으로 마음을 삼아야 합니다.”

기자는 조선으로 망명하여 기자 조선을 세운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은나라 말기의 인물로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새롭게 등장한 주나라의 창건자 무왕을 위해 공헌을 하여 무왕이 은나라의 폭군인 주(紂)를 벌하고, 기자를 조선에 책봉하였다고 한다. 그 기자가 말한 ‘극(極)’이 나중에 공자, 맹자에 이르러 인(仁)사상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이다.

퇴계는 또 이렇게 말했다.

“임금의 악덕 중에 욕심 많고 사나운 것이 가장 큽니다. 임금은 항상 본심을 단정히 하고 근원을 맑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백성들이 난을 일으킬 염려가 없게 됩니다. 한 사람이 나라를 안정시킨 경우는 바로 요임금과 순임금입니다. 후세의 임금들은 명령을 내리고 시행하는 과정에서 선을 행하면 망해가는 나라도 안정이 됩니다. 하지만 실로 조그마한 악이라도 있게 되면 아무리 굳건하던 나라도 역시 멸망하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한나라가 안정의 길로 가느냐, 멸망의 길로 가느냐는 그 나라 임금이 정치를 하는데 선한 마음을 가지고 하느냐, 악한 마음을 가지고 하느냐에 따랐다고 본 것이다. 그렇다면 선조가 퇴계로부터 이러한 가르침을 들은 25년 뒤, 즉 1592년에 조선이 일본의 군대에 멸망의 문턱까지 가게된 것은 선조가 그 마음속에 악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혹시 퇴계에게 물어본다면 ‘그렇다’고 대답할지 모른다. 선조의 마음가짐이 왕이 된 첫해부터 시작해 차츰차츰 헤이해진 측면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선조 1인에게 모든 책임을 물을 수는 없을 것이다. 선조를 둘러싼 신하들, 특히 정책을 검토하고 추진한 신하들에게도 책임이 있을 것이며, 더 크게는 당시의 대학자들 예를 들면 퇴계 이황이나 고봉 기대승 등과 같은 대학자들에게도 나라가 그렇게 되도록 한 책임이 없을 수 없을 것이다.

이들의 뒤를 이어 선조를 가르치게 된 율곡은 어떤 방도를 제시하였을까? 크게 보면 같은 성리학자로서 율곡도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었지만, 율곡 나름의 미묘한 차이를 드러낸다. 율곡의 문장을 읽는 묘미는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단상(李端相: 1628~1669)


이단상(李端相: 1628~1669)                               PDF Download

 

관이 연안(延安)인 그의 자는 유능(幼能)이며, 호는 정관재(靜觀齋)  또는 서호(西湖)이다.  그는 좌의정 이정귀(李廷龜)의 손자이며 대제학 이명한(李明漢)의 아들이자 금계군(錦溪君) 박동량(朴東亮)의 외손이다.

1648년(인조26)에 진사시(進士試)에 장원하고,  이듬해에 정시 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뒤에 설서(說書)· 대교(待敎)· 봉교(奉敎)· 부수찬(副修撰)· 교리(校理) 등을 역임하면서, 서연(書筵)에 나아갔다.  여러 차례 이조(吏曹)와 병조(兵曹)의 정랑(正郎)을 지내고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으로 지제교(知製敎)를 겸하기도하였다.

1655년(효종6)에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만전념케 했던 사가독서(賜暇讀書)를 거친 뒤 대간(臺諫)에 들어가 구애됨이 없이 정론(正論)을 폈다.

김홍욱(金弘郁)이 강빈(姜嬪)의 신원(伸冤)을 청하였다가 장살(杖殺)된 일에 대하여 그의 억울함을 극언(極言)하여 효종(孝宗)의 탄식을 불러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훗날 결국 김홍욱을 복관(復官)시키게 하는 단초를 마련하였던 일도 그 일환이며,  조정에서 영녕전(永寧殿)을 수개(修改)하려 하면서,  정전(正殿)을 10실(室)로 하는 제도를 신설하여 협실(夾室)에 있는 여러 조위(祧位)를 일체 정전에 봉안하고, 협실에 신주를 모시는 제도를 폐지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상소하여,

“이렇게 할 경우 고제(古制)를 조금이나마 남겨 준 조종조(祖宗朝)의 유의(遺意)에 크게 어긋날 뿐 아니라,  조위에 계신 열성(列聖)의 위령(威靈)들께서도 필시 정전의 합사(合祀)하는 반열에 끼이게 되는 것을 스스로 불편하게 여기 실듯합니다.”

라고 극언 했던 일도 그 일환으로 볼 수 있겠다.  이 사안에 대하여는 응교(應敎) 남구만(南九萬)과 한 동안 격론을 벌인 일이 실록에 수록되어 있다.

또 그는 일찍이 전라도 지방을 두루 살펴 기근이 심한 고을을 구제하게 한 바 있거니와, 효종(孝宗)의 승하(昇遐)로 정국(政局)이 변하자,  두문불출하고 학문에만 전념하다가 잠시 청풍부사(淸風府使)를 지낸적이 있으며,  이어 응교를 거쳐 인천 부사(仁川府使)를 역임한 일이 있다. 훗날 공교롭게도 그의 아들이 동보(李同甫)가 인천현감(仁川縣監)으로 부임하게 되자,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이 송별하는 서문을 써주면서 그의 선친이 이곳을 맡아 선정(善政)을 베풀었던 일을 언급한 바 있다.

“그분이 이 고을을 다스리자 1년이 되기도 전에 백성들이 덕스러운  정사를 노래하고 사모하여 지금까지 그치지 않고 있으니,  인(仁)을 행 한효과는 이처럼 신속하고 오래 보존되는 것이다.”

라고 하여 그의 선정을 기리는 한편,

“이제 동보가 이 고을에 가면 지난날 정관(靜觀) 선생의 교화를 받았던 부로(父老)들 중에 아직 살아있는 자가 있어 동보의 의표(儀表)완연히 똑같음을 보고는,  모두 기쁜 마음으로 서로 말하기를, ‘우리를 어루만져 주겠네! 선대부(先大夫)의 유업을 실행하겠네! ’라고 할것이다.”

하면서 그를 격려하였다. 특기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가하면송준길(宋浚吉)은그를천거하면서,“경연(經筵)을열때에문학(文學)을한선비가없어서는안됩니다.”라고하였고, 또“이단상은학문이해박하고식견이있는사람인데지금먼시골에서지내고있으니아까운사람입니다.”라고하였으며,예조판서조복양(趙復陽)도“조정의신하들중에경학(經學)이이단상만한사람이없습니다. 마땅히불러들여시강(侍講)하는자리에있게해야합니다.”라고한기록이《실록(實錄)》에까지수록되어있는것을보면그의학문과덕성이어느정도였는지짐작하고도남음이있다.

그러나이단상은이를사양하고양주동강(東岡)으로은퇴하였다. 그뒤
승지(承旨)와 병조참지(兵曹參知)에임명되었으나모두사양하였고, 1669년에부제학(副提學)으로서연관(書筵官)을겸했으나곧사양하고물러났다.

그는또시문(詩文)에도능했던듯하다. 《일성록(日省錄)》1797년(정조21)조를보면, 반열에참석했던조관(朝官)과유생의응제시권(試券)을채점하여내리고, 입격(入格)한사람들에게차등을두어상을내린기록이있다. 이때부제(賦題)로삼은“붉은구름한뭉치가태양곁에펼쳐졌네[紅雲一朶日邊開]”는부제학이단상이지은“남쪽나라귀한손이바다를건너오니[南國星槎渡海來], 붉은구름한뭉치태양곁에펼쳐졌네[紅雲一朶日邊開], 천추의큰의리를아는이없어[千秋大義無人識], 석실산앞에서통곡하며돌아오네[石室山前痛哭廻]”라는시에서인용한것이다. 이글은김수흥(金壽興)을풍자하여지은것으로, 명(明)나라의관상선(官商船)에타고있던임인관(林寅觀) 등95인이1667년(현종8)에일본으로가던도중표류하여제주(濟州)에상륙하게되었는데, 김수흥이이들을청나라로압송할것을주장하자, 이를안타깝게여겨지은것이다. 그의작품자체도그렇거니와그의작품중한구를부제로삼아임금이직접글을짓게하였다는것은주목할만한사실이아닐수 없다.

그리고《송자대전(宋子大全)》을보면,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은친구였던그에대하여“정관재가세상에있던날에는[靜觀臨世日], 사람들이봉황새를양지에서본듯했고[人覩鳳朝陽] 나무를칠 때꾀꼬리가벗을구하듯했건만[伐木鶯求友], 산에묻히자이젠구슬이빛을감추고말았네[埋山玉掩光]”라고읊고있다. 이글은그의아들동보(東甫)의부탁으로그의묘명(墓銘)을지어주면서그의요청에따라오언율시(五言律詩)로화답한것인데,
“평생을추억하니감개의눈물을금할수 없다.”라는설명이곁들여져있다.
그와의교분관계를충분히알수 있는부분이기도하다.
그는1680년(숙종6)에민정중(閔鼎重)의건의로이조참판겸경연,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과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에추증되고, 다시이조판서(吏曹判書)에증추되었으며, 그의문하에서는아들희조(喜朝)와 김창협(金昌協)·김창흡(金昌翕)·임영(林泳) 등의학자가배출되었다. 일련의기록을보면비교적평탄한삶을살았던인물로여겨진다.

끝으로《현종실록(顯宗實錄)》에는“신병(身病)을이유로사직하고양주(楊州)에물러나살면서여러차례불러도벼슬을사양하고나아가지않으니, 사람들이명리(名利)에담박하다고하였다.”라고적고있는데반해《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1669년(현종10) 조에는<전부제학이단상의졸기(卒記)>라는제목하에,“전부제학이단상이졸하였다.”라고쓰고,“그가강론한견해는대부분명확하고투철하였으므로한때의사류(士類)들에게존중을받았으나, 불행하게일찍졸하였으니, 애석하다. 임종할때유소(遺疏)로훌륭하고덕있는이를초치하고큰사업에더욱 힘쓰라고주상에게권하였으며, 또장식(張栻)의말을인용하여남을믿고맡길때는일신의편견을막고, 남을좋아하고미워할때에는천하의이치에공변되게할것을주청하였다. 이어약을하사(下賜)한은전(恩典)을사양하였다.”라는기록에서도그의인간상을엿볼수 있다.

그는양주의석실서원(石室書院)과인천의학산서원(鶴山書院)에배향되어있으며, 저서로는《대학집람(大學集覽)》, 《사례비요(四禮備要)》, 《성현통기(聖賢通紀)》, 정관재집(靜觀齋集) 등이있다.시호는문정(文貞)이다.

지도자는 인자해야 한다


<역사속의 유교이야기16>

“지도자는 인자해야 한다”

 

곡은 29살 때부터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가 여러 차례 과거에 급제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 즉 ‘아홉 번이나 장원에 급제한 사람’이란 영광의 호칭을 얻게 되었지만 30대 초반까지는 아직 하급관료였다.

당시 조정에서는 퇴계 이황(1502-1571)과 고봉 기대승(1527-1572)이 대학자로 존경을 받고 있었다. 율곡도 퇴계의 명성을 듣고 있어서 23살 되던 1558년에 퇴계를 방문하여 가르침을 청한 바도 있었다. 퇴계는 성리학의 이기설(理氣說)에서 리(理, 이치)를 중시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그의 생각은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 즉 리와 기는 서로 함께 번갈아 가면서 일어난다. 즉 발동(發動)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율곡은 이를 과감히 수정하여 ‘리’라고 하는 것은 이름만 있는 것이지 혼자서 주체적으로 발동할 수는 없다고 보고, 이기일도설(理氣一途說)을 제창하였다. 기가 발동하면 리는 거기에 편승할 뿐이라는 ‘기발이승(氣發理乘)’이라는 표현은 율곡의 그러한 사상을 대표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사람이 사는 세상이나 이 우주공간에는 사물들이 어떤 원칙이 없이 무질서하게 존재하는 것 같지만, 크게 보면 어떤 원리가 존재한다. 예를 들면 달은 언제나 지구 주위를 규칙적으로 돌아간다. 달이 어느 날 지구를 떠나서 태양을 돌기 시작하면 어떤 일이 생길까? 그럴 수 없다. 퇴계의 경우는 그 ‘규칙’이나 ‘원리’를 중시하여 리를 중심으로 자신의 사상을 전개한다. 그런데 율곡은 지구나, 달, 태양 즉 물질적인 것을 중시했다. 지구나 달, 태양이라는 물질이 없다면 그것들을 움직이게 하는 ‘규칙’이나 ‘원리’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물질이 있어야 원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 두 사람의 사상은 나중에 조선시대 유학의 대표적인 두 견해로 자리를 잡게 되는데, 사실은 시대의 흐름이 사람들의 인식을 그렇게 바뀌게 하였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여기에서는 율곡의 선배학자인 퇴계가 임금인 선조를 향해서 ‘인자한 임금이 되시오’라고 가르친 이야기를 살펴보기로 한다. 선조 1년인 1567년 겨울(음력 11월 17일)에 있었던 이야기다.

선조가 글 잘하는 신하들, 즉 이황과 기대승 등에게 ⌈대학⌋을 배운 날이었다. 공부 장소는 비현각(丕顯閣)이었다. 선조실록에는 왕이 ‘소대(召對)’하였다고 하였는데, 소(召)는 부를 소, 대(對)는 대면할 대이니 비현각으로 불러서 대면하였다는 뜻이다. 비현각은 어떤 곳일까?

경복궁 사정전 동쪽에 위치한 동궁
경복궁 사정전 동쪽에 위치한 동궁

경복궁의 사정전 동쪽에 동궁이 있다. 동궁(東宮)이란 왕세자가 거처하는 곳으로 왕의 동쪽 궁궐에서 왕의 뒤를 이을 세자가 거처하면서 임금이 되기 위한 공부를 하는 곳이다. 왕세자가 거처하는 곳은 자선당(資善堂)이며, 그 한 켠에 공부하는 비현각이 있다. 위의 사진에 나오는 건물은 1999년에 복원된 것이다.
선조는 임금으로 등극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동궁이 편했던 모양이다. 동궁의 비현각으로 학자들을 불러 ⌈대학⌋ 공부를 하였는데, 이곳에서 이날 선조가 공부한 ⌈대학⌋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요임금과 순임금이 천하를 어짊으로 이끄니 백성들이 그를 따랐다. 걸임금과 주임금이 천하를 포악함으로 이끄니 백성들이 그를 따랐다. 그러나 임금이 명령하는 것이 임금이 좋아하는 것과 반대되면 백성들이 따르지 않았다. 그러므로 군자는 자신에게 <선을> 갖추고 난 뒤에 남에게 요구하였으며, 자신에게 <악이> 없는 뒤에 남을 비난하는 것이다. 자기에게 용서하지 않는 마음을 간직하고 있으면서 능히 남을 깨우칠 수 있는 사람은 있지 않다. 그러므로 나라를 잘 다스리는 방법은 자기 집안을 잘 다스리는데 있다.
(堯舜, 帥天下以仁, 而民從之. 桀紂, 帥天下以暴, 而民從之. 其所令, 反其所好, 而民不從. 是故, 君子有諸己而後, 求諸人, 無諸己而後, 非諸人. 所藏乎身, 不恕, 而能喩諸人者, 未之有也. 故, 治國在齊其家.)

이 앞에 나오는 ⌈대학⌋ 문장을 보면

“한 집안이 어질게 되면 한 나라가 어질게 되고, 한 집안이 사양하는 것을 중요시하면 한 나라가 그렇게 된다. 한 사람이 탐욕을 부리고 어그러지면 한 나라가 혼란에 빠지니, 일의 모양세가 이와 같다. 이것을 일러 ‘한 마디 말이 일을 그르치기도 하며, 한 사람이 한나라를 안정시키기도 한다’는 것이다.
(一家仁, 一國興仁. 一家讓, 一國興讓. 一人貪戾, 一國作亂. 其幾如此. 此謂, 一言僨事, 一人定國.”

라고 하여 어짐과 사양의 중요성을 지적하였다.
퇴계 이황은 이러한 구절을 다음과 같이 왕에게 설명했다.

“‘임금이 되면 어질어야 한다.’고 하였으니 인(仁)자는 임금에게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임금이 되면 어질어야 한다.’는 말은 대학의 앞쪽(「전삼장(傳三章)」)에 나오는 말이다. ‘임금이 된 자는 어질어야 한다. 신하가 된 자는 공경스러워야 한다. 아들은 효성스러워야하며, 부모는 자애로워야 한다. 사람들과 사귈 때는 믿음직스러워야 한다.
(爲人君, 止於仁. 爲人臣, 止於敬. 爲人子, 止於孝. 爲人父, 止於慈. 與國人交, 止於信.)’

이러한 말 중에서 ‘임금은 어질어야 한다’는 문장을 든 것이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설명을 이었다.

“어질고, 의롭고, 예의 있고, 지혜로운 것(仁義禮智)은 인간의 본성(性)에 있는 네 가지 덕(四德)입니다. 그런데 ‘어짐(仁)’은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옛사람들이 말하기를 ‘어짐은 마음의 덕이요, 사랑의 이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인은 바로 본성(性)이고, 그것이 발하여 측은한 마음이 생기는데 이것이 바로 정(情)입니다.”

명종이 그해 여름에 사망하고 정조가 그 뒤를 이었다. 여름에 명종이 사망하자 조정은 즉시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선의 새 왕을 책봉해달라는 요구를 하였는데, 정식 허가가 난 것은 11월이 되어서였다.
당시 국제관계는 오늘날과 달리 명나라의 천자로부터 임금의 정통권을 받아오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선조가 실질적으로, 명실상부하게 조선의 국왕이 된 것은 11월이었다.

11월 17일의 ⌈대학⌋ 공부, 특히 ‘임금은 어질어야 한다’고 하는 공부는 16살의 나이로 조선의 14대 국왕으로 막 등극한 선조에게 어떤 생각을 갖게 하였을까? 아마도 백성을 위해서 훌륭한 정치를 펴서, 역사에 길이 남을 성군이 되어야겠다고 하는 결의에 찬 각오였지 않았을까?

전통시대의 공부법


<역사속의 율곡학 스토리텔링15>

전통시대의 공부법

 

조가 어느날 경연의 자리에서 갑자기 율곡에게 이렇게 물었다.

“항상 어떤 책을 읽고, 또 가장 좋아하는 것은 무슨 책인가?”

율곡이 아홉 번이나 과거에 장원급제하고 경연을 할 때마다 논리정연하게 자기 주장을 펴는 것을 보고 어떤 책으로 공부하는지 궁금해진 것이다.

율곡이 이렇게 대답했다.

“과거 시험을 준비할 때 읽은 것은 읽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그 때 읽은 책들은 제외합니다. 학문에 뜻을 둔 뒤로는 ⌈소학(小學)⌋에서 시작하여 ⌈대학(大學)⌋·⌈논어(論語)⌋·⌈맹자(孟子)⌋까지는 읽었으나, 아직 ⌈중용(中庸)⌋은 읽지 못하였습니다. 다 읽고 나서 처음부터 다시 읽어 보아도 분명히 이해가 되지 않으므로 육경(六經)에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선조 8년, 즉 1575년 6월의 일이므로 당시 율곡은 40세 되던 해였다. 그는 그보다 3년 전에 친구인 우계 성혼과 더불어 성리학의 심오한 이론인 이기설(理氣說)과 사단칠정(四端七情), 그리고 인심도심(人心道心) 등의 학설을 논하여 우리나라 성리학의 수준을 한 차원 더 높은 곳으로 끌어올린 후였다. 그러한 그가 솔직하게 맹자까지 읽고 중용은 자꾸 읽어도 이해할 수가 없었으며 육경은 아직 읽지 못했다고 밝히고 있다.

율곡이 말한 책 중에 ⌈대학⌋이란 어떤 책일까?

대학⌋은 원래 오경 중 한권인 ⌈예기(禮記)⌋에 들어 있던 글이다. 제42편의 글인데 그것을 송나라 사마 광(司馬光)이 처음으로 뽑아내서 ⌈대학광의(大學廣義)⌋란 책으로 만들었다. 이 후 주자가 그것을 바탕으로 ⌈대학장구(大學章句)⌋를 만들었는데, 경(經) 1장(章), 전(傳) 10장으로 구성하고 주석(註釋)을 더하였다. 경에는 소위 3강령 8조목이 제시되어 있다. 3강령은 명명덕(明明德, 명덕을 밝히는 일), 신민(新民, 백성을 새롭게 하는 일), 지어지선(至於至善, 지선에 머무르는 일)이며, 8조목은 격물(格物) · 치지(致知) · 성의(誠意) · 정심(正心) · 수신(修身) · 제가(齊家) · 치국(治國) · 평천하(平天下)이다. 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입문서로 ⌈대학⌋이 중시되었는데, 그 이유는 이러한 내용을 잘 읽음으로써 배움의 기초 토대가 굳건히 자리를 잡을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지식인들의 일반적인 상황도 율곡과 같았다. 그들은 대개가 육경보다는 사서를 중시하였으며, 특히 주자학에 집중하여 성리학 관련 이론을 깊이 있게 이해하는데 학문적인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선조가 다시 물었다.

“사서(四書, 논어, 맹자, 중용, 대학) 중에서 어떤 글을 가장 좋아하는가?”

율곡이 이렇게 답했다.

“좋아하지 않는 것이 없으나 그렇다고 특별히 하나만을 좋아하는 것도 없습니다. 여가에 ⌈근사록(近思錄)⌋·⌈심경(心經)⌋ 등의 글을 읽고 있으나 질병과 공무(公務) 때문에 전념(專念)할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율곡은 몸이 건강한 편은 아니었기 때문에 병 때문에 자주 사직을 하고 고향인 파주로 내려가 그곳에서 책을 읽으면서 건강을 되찾았다. ⌈근사록⌋은 북송 시대의 사상가들인 주돈이와 장횡거(張橫渠), 정명도(程明道) 그리고 정이천(程伊川)의 저술과 어록(語錄)을 발췌하여 편집한 책인데, 1175년경에 주희(朱憙)와 여동래(呂東萊)가 함께 만들었다. ⌈심경(心經)⌋은 남송의 학자 진덕수(眞德秀)가 사서와 삼경(三經), 악기(樂記) 등의 서적과 주돈이, 정호, 정이, 주자 등의 글에서 인간의 마음과 관련된 내용을 발췌한 것이다. 요컨대 율곡은 성리학의 사상을 깊게 이해할 수 있는 ⌈근사록⌋과 ⌈심경⌋을 읽고 있었다는 것이다.

다시 임금이 이렇게 물었다.

“어렸을 때 문장을 익힌 적이 있는가? 그대의 문사(文詞)를 보건대 매우 좋은데, 따로 배운 적이 있는가?”

율곡은 어려서부터 시문을 잘 지었다. 그가 과거에 아홉 번이나 급제한 것은 그러한 문장 실력이 발휘되었기 때문이다. 율곡은 임금의 칭찬을 듣고 이렇게 답하였다.

“저는 어려서부터 문사를 배운 적은 없습니다. 어려서는 불교의 선학(禪學)을 자못 좋아하여 여러 경(經)을 두루 보았으나 착실(着實)한 곳이 없음을 깨닫고 유학(儒學)으로 돌아와서 우리 유학의 글에서 그 착실한 이치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역시 문장을 위하여 읽은 것이 아니었으며, 지금 문장을 짓는데 대략 문리(文理)가 이루어진 것도 역시 별도로 공부를 한 일은 없고, 다만 일찍이 당나라 한유(韓愈)의 문장과, ⌈고문진보(古文眞寶)⌋, 그리고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의 대문(大文)을 읽었을 뿐입니다.”

조선시대에 학자들은 대개 율곡이 말한 것과 같은 책들을 읽고 기초 교양을 쌓았다. 한문 문장도 그러한 글을 읽으면서 문장의 조리를 터득하였다.

명종 12년, 즉 1557년 8월 1일의 역사 기록을 보면 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 즉 유생들의 공부 방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소개되어 있다.

“학자는 몸가짐을 근본으로 삼고 문예를 말단으로 삼아야 합니다. 친구사이는 서로 이것으로 책망하고, 스승과 웃어른은 먼저 아이들에게 ⌈소학⌋을 가르쳐 그 근본을 세우고 다음으로 ⌈대학⌋을 가르쳐 그 규모를 세워야 합니다. 그리고 ⌈논어⌋·⌈맹자⌋·⌈중용⌋을 모두 주자가 정한 차례대로 그들을 가르치고 인도하여 차례를 뛰어넘는 버릇을 없앤 다음에 경·사·자·집(經史子集)을 섭렵하여 박학하게 한다면, 심지(心地)가 고명해져 문사(文詞)에 발하면 찬연히 문채가 있어 볼 만할 것입니다. 옛사람이 선비를 가르치는 방법은 여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율곡도 문장 공부를 별도로 한 적이 없다고 하였는데, 당시 학자들은 문장 잘 짓는 일을 말단으로 삼았다. 문장에 힘을 쏟기보다는 몸가짐, 즉 유교적인 수양 공부에 더 힘썼다. 그리고 ⌈소학⌋→⌈대학⌋→⌈논어⌋→⌈맹자⌋→⌈중용⌋의 순서로 배웠다. 이러한 순서는 주자가 정한 것이다. 이러한 공부를 마친 뒤에 비로소 각종 경·사·자·집(經史子集)의 서적을 읽어나가는 것이다. 율곡은 ⌈중용⌋의 단계에서 머물며 주자의 성리학에 대한 이론 공부에 천착한 것으로 보인다.

 

‘간언(諫言)’듣기를 싫어한 선조


<역사속의 율곡학 스토리텔링 14>

간언(諫言)’듣기를 싫어한 선조

 

 태종의 언행을 기록한 정관정요(貞觀政要)에 이런 말이 나온다.

“간언(諫言)이란 군주나 웃어른에게 충고하는 것을 말한다. 거울이 없으면 자신의 생김새를 볼 수 없듯이 신하들의 간언이 없으면 정치적 득실에 관해 정확히 알 방법이 없다. 시세의 흐름을 꿰뚫어보는 혜안을 가진 신하의 충언은 군주를 바로 서게 할 뿐만 아니라 천하를 태평성대로 만들 수 있다. 간언이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신하들이 침묵하는 이유는 충성스런 간언을 할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간언(諫言)’의 간(諫)자는 말씀 언(言)과 가릴 간(柬)자로 구성되어 있다. 가릴 간은 ‘분간하다’는 뜻도 있다. 즉 간언이란, 분간하는 말, 혹은 분간하고 가릴 수 있도록 하는 말을 뜻한다.

정관정요⌋의 ‘정관(貞觀)’은 당나라 태종의 연호이며, ‘정요(政要)’란 ‘정치의 핵심’, 혹은 ’정치의 요체‘라는 뜻이다. ⌈정관정요⌋는 제왕학의 교과서로 알려져 있는데, 당 태종이 부하 관료들과 정치에 대해서 주고받은 대화를 엮은 책이다.

정관정요⌋의 설명에 따르면 신하들의 간언이 없다면 거울 없이 자기 얼굴을 볼 수 없듯이 자신이 행하는 정치를 정확히 볼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한다. 그리고 신하들이 간언을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중요하다고 하였다. 이어서 ⌈정관정요⌋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군주는 신임하지 않는 자가 간언하면 비방한다고 생각하고 신임하는 사람이 간언하지 않으면 봉록만 훔치는 자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로 인해 성격이 연약한 사람은 속마음이 충직해도 말하지 못하고, 관계가 소원한 이는 신임 받지 못할 것을 두려워해 감히 말하지 못하는 것이다. 군주가 먼저 신하를 믿고 간언을 구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조선시대에는 경연제도와 함께 ‘간언’제도도 왕권을 견제하는 방법으로 중시되었다. 율곡이 참여한 1575년 6월 24일의 경연에 율곡과 선조 사이에 다음과 같은 말이 오고갔다.

 

율곡: 근래에 대간(臺諫, 간언을 담당하는 관리)이 말하는 것을 임금께서 따르지 않는 것이 많아 인심이 자못 해이해지고 있습니다.

선조: 이는 내가 불민한 탓이다. 그러나 요임금, 순임금 때에도 그 말이 틀리다고 따르지 않은 경우도 있었으니, 어찌 항상 한갓 그렇다고 따르기만 해서야 되겠는가?”

율곡: 진실로 옳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따라야 할 일은 속히 따르셔야 합니다.

 

율곡이 임금께서 간언을 담당하는 관리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고 지적하자 선조는 항상 따르기만 해서는 되겠는가하고 묻는다.

같이 경연에 참석했던 김우옹이 율곡을 지지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의 기강은 오로지 대간에게 달려 있으므로 대간이 제구실을 하지 못하면 기강이 무너집니다. 반드시 대간의 간언을 받아들여 그 사기(士氣)를 진작시켜야 합니다.”

선조임금은 간언을 자주 듣는 것이 싫었던지 다시 이렇게 말했다.

“대간의 말도 옳지 않은 것이 많다.”

임금의 고집스러운 발언에 율곡이 또 나서서 다음과 같이 발언을 하였다.

“대간의 말에 잘못이 있으면 따지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대간의 말이 항상 그럴 것이라 하여 처음부터 듣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율곡은 대간을 대신해서 자신이 이렇게 간언을 하였다.

“지금 백성들이 초췌하여 지고 기름진 땅과 연못이 이미 다 말라버렸습니다. 조정에서 비록 그들을 구제하고자 하나 은택(恩澤)이 아래에까지 미치지 않아, 마을마다 원망하고 근심하는 소리가 이전과 다름이 없습니다. 백성들은 조정이 깨끗하고 밝은 것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임금을 세운 것은 백성을 위해서인데, 백성이 이와 같으니 좀 더 깊이 생각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오늘날 인심이 바르지 않습니다. 관리는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고 법령은 행해지지 않아 어찌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임금께서 성심으로 백성을 위하시고 근본을 바로잡아 기강을 세워야 합니다. 그런 뒤에야 비로소 실효를 거둘 수가 있습니다.”

선조 27년(1594년) 7월 9일의 왕조실록 기사에도 조정의 언로(言路)와 간언에 대한 이야기가 이렇게 나온다.

“십수년 이래 사대부들 사이에는 말을 하는 것을 기피하여, 재상의 반열에 있는 자는 어물어물 우유부단하여 구차스레 무사하기를 바라는 것에 마음을 두고 있습니다. 대성(臺省, 사헌부와 사관원)에 있는 자는 시세에 따라 부침(浮沈)하여 좋은 벼슬을 보전하려는 마음을 갖는 것이 갈수록 심합니다. 그 폐단이 극에 달하였기 때문에 전하께서는 허물을 들을 수 없게 되셨습니다. 전하께서 허물을 들을 수 없어 국사가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을 생각하니 신들은 저도 모르게 모발이 송연해집니다.

더구나 지금은 형세가 매우 위급하여 이미 다 전복되었으니 이야말로 사람들이 스스로 분발할 것을 생각하여 계책이 있으면 반드시 알려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도, 한 사람도 임금에게 따지고 책망하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고, 전하께서 한 마디 말이나 한 가지 일을 채용하여 시행하셨다는 말도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말할 만한 일이 없어서 그런 것입니까, 아니면 말을 하였으나 취할 것이 못 되어 그런 것입니까?”

율곡도 선조대왕이 훌륭한 인물들을 등용한 뒤에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점을 지적하였으나, 이 상소문에도 그러한 사실에 대해서 비판한 것이다.

1594년은 율곡이 사망한 뒤 10년이 지난 때인데, 이때도 선조는 신하들의 간언 듣기를 싫어했던 것이다. ⌈정관정요⌋의 문구에서 보았듯이 “거울이 없으면 자신의 생김새를 볼 수 없듯이 신하들의 간언이 없으면 정치적 득실에 관해 정확히 알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정관정요⌋는 “시세의 흐름을 꿰뚫어보는 혜안을 가진 신하의 충언은 군주를 바로 서게 할 뿐만 아니라 천하를 태평성대로 만들 수 있다.”고 하였는데 조선의 선조는 간언 듣기를 싫어하여 그러한 기회를 상실하고 일본의 침략을 허용하여 국가가 위기에 빠지는 상황을 초래하였으니, 참으로 우둔한 군주였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민본주의 제도 – ‘경연’


역사속의 율곡학 스토리텔링 13

조선시대의 민본주의 제도 – ‘경연

 

늘날 민주주의 정치체제는 삼권분립을 바탕으로 권력기관이 서로 견제하고 균형을 취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군주제는 이와 달리 한명의 군주에게 모든 권한이 돌아간다. 그 권한을 제한하는 일이 없이 군주의 마음대로 모든 국가의 대사가 운영된다. 전통시대의 조선이라고 하는 나라는 임금이 절대적인 권한을 가진 군주제 국가였다.

하지만 조선시대의 군주제도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군주의 권한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의 권한을 견제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제도를 마련해두고 있었다. 예를 들면 사관이 왕의 일상사와 언행을 기록하는가 하면, 왕을 덕이 있는 군주가 되어 덕치정치를 하도록 가르치기도 하고, 임금에게 직언을 할 수 있는 관리를 두어 임금의 잘잘못을 따지도록 하기도 하였다.

왕을 가르쳐 덕치 정치를 펴도록 하는 제도는 경연(經筵)이다. 오늘날도 가끔 형식적으로나마 대통령이 석학을 초청하여 강의를 듣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이거나 단편적일 뿐이다. 조선시대에는 조직적으로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관료까지 두면서 임금을 가르쳤다.

율곡과 관련된 역사기록을 보면 율곡이 경연에 참석하여 발언을 하는 기록이 적지 않다. 예를 들면 1575년 6월 24일(음력)에는 율곡이 경연에 참석하여 임금과 함께 ⌈상서⌋를 읽는 기록이 있다. 또 그 이전인 1569년 9월 25일 기록에도 경연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날 율곡은 선조에게

“예로부터 큰일을 성취한 군주가 정치를 흥기시키려 했을 때에는 반드시 정성을 다하여 현자를 대하였습니다. 군신간의 주고받는 대화는 마치 메아리 울리듯 하였으며 마음을 열고 받아들였기 때문에 위 아래가 서로 믿게 되어 정치가 잘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군자가 현자를 섬기고 군신(君臣) 간에 대화가 잘 이루어졌다는 것은 바로 경연을 설명한 것이다.

율곡은 또 이렇게 말했다.

“지금 신이 여러 차례 궁궐에 들어와 전하를 뵈었는데 항상 신하들의 말에 조금도 응수하여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대개 한 집안의 부자(父子)와 부부가 아무리 지극히 친한 관계라 하더라도 만약 아비가 자식에게 답하지 않거나 지아비가 아내에게 답하지 않으면 그 정(情)도 막히게 됩니다. 하물며 그 이름과 위상이 현격히 다른 군신(君臣)의 관계는 어떻겠습니까?”

1569년은 율곡은 34세 되던 해로 궁궐에 들어와 선조를 가까이서 모신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그는 29세 때 호조좌랑으로 처음, 관계에 진출한 뒤로 30세 때 예조좌랑, 31세 때 이조좌랑, 그리고 32세 때 사헌부 지평, 홍문관 부교리 겸 경연시독관 춘추관기주관에 임명되었다. 이 해에 선조는 임금이 되었다. 율곡은 임금이 된지 얼마 되지 않은 선조의 과묵한 모습을 꼬집어 말한 것이다.

그리고 율곡은 경연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했다.

“여러 신하가 임금님의 얼굴을 뵙게 되는 것은 경연(經筵)뿐이기 때문에 입시하는 신하들이 미리 아뢸 내용을 생각하여 밤낮으로 궁리하고 정리해 놓았다가도 임금님의 앞에만 오게 되면 그 위엄에 겁을 먹고는 하고 싶은 말도 다하지 못하여 10분의 2∼3 정도에 그치고 맙니다. 대왕께서 아무리 마음을 비우고 응수를 해주신다 해도 오히려 아랫사람들의 뜻이 통하지 못할까 염려되는데, 하물며 입을 꼭 다물고 말씀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의 말을 막는 경우는 어떻겠습니까?”

경연을 준비하는 신하의 모습을 소개하고 있다. 아무리 유학 경전을 잘 읽는 신하라도 임금님 앞에서는 그 위엄에 눌려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왕의 응대가 쌀쌀하니 그 신하들, 즉 선생님들은 더 주눅이 들어 입을 닫아 버린다는 것이다.

이렇게 설명하고 율곡은 임금에게 천재지변으로 백성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다는 점, 그리고 시급히 백성들을 구제하는데 노력을 하셔야지 팔짱만 끼고 아무 일도 않고 있으면 안 된다는 점, 그리고 선조 대왕이 명종 대왕(明宗大王)으로부터 2백 년 조선의 우환을 받은 것이지 즐거운 세상을 이어받은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고 조선의 운명이 날로 위태로워지는데 임금께서는 어찌해서 발분하지 않는 것인지 물었다.

이렇듯 경연제도란 오늘날 민주주의 시대에도 뒤떨어지지 않은 백성을 위하고 군주의 권한을 견제하는 제도였다.

경연의 방법은 대체로 세종대왕과 성종대왕의 시기에 정비되었다. 경연은 시간에 따라 아침에 하는 조강(朝講), 낮에 하는 주강(晝講), 저녁에 하는 석강(夕講)으로 나뉜다. 처음에는 하루에 한차례, 혹은 두 차례의 경연을 하다가 차츰 성종 시기에 이르러, 하루에 3차례 경연을 하는 방식이 확립되었다. 경연에 참석하는 관리는 초기에는 6, 7명 정도였으나 차츰차츰 더 많은 관리들이 경연에 참가하였다. 경우에 따라서는 의정부, 승정원, 홍문관, 사헌부 등의 고위 관료들이 한자리에 모였기 때문에 경연 자리가 자연스럽게 정부 부서 간의 정책 협의 기구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율곡이 사망한 뒤의 1581년(선조 14년)에는 율곡의 친구이기도 한 우계(牛溪) 성혼(成渾)이 참석하였는데 그는 당시 관리의 신분이 아니었다. 그동안은 경연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관료들에 제한되어 있었는데 처음으로 재야의 성혼이 참석하게 된 것이다. 이후 재야 학자들이 자주 초빙되었다.

경연에 사용된 교재는 ⌈논어⌋, ⌈맹자⌋, ⌈중용⌋, ⌈대학⌋의 4서(四書)와⌈시경⌋, ⌈서경⌋, ⌈역경⌋, ⌈예기⌋, ⌈춘추⌋의 5경(五經), 그리고 역사서적인『자치통감(資治通鑑)』·『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등이었다. 말하자면 주로 유교 경전과 역사서적이다. 자치통감은 중국 송나라의 사마광(司馬光)이 지은 역사서이며,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은 남송의 주희(朱憙), 주자가 쓴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임금의 경연에는 유교와 관련된 책이 대부분이었다.

주요 텍스트 외에도 『성리대전(性理大全)』·『근사록(近思錄)』·『소학(小學)』·『심경(心經)』·『대학연의(大學衍義)』·『정관정요(貞觀政要)』·『국조보감(國朝寶鑑)』등이 부교재로 사용되었다.

강의를 하는 방식은 먼저 한 사람이 교재의 원문을 읽고, 번역을 한 뒤에 설명을 한다. 그 다음 국왕이 잘 모르는 점에 대해 질문을 하면, 참석자들이 보충 설명을 한다. 역사서는 통독(通讀)을 하고 사서와 오경의 경우에는 주석서를 읽어 그 뜻을 풀이하였다. 물론 당시 중요시된 주석서는 주자의 주석서로, 그 서적을 통해서 주자학, 즉 성리학의 핵심적인 내용을 배워나가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