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명(李頤命:1658~1722)


이이명(李頤命:1658~1722)                                PDF Download

 

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지인(智仁)· 양숙(養叔), 호는 소재(疎齋)이다.  세종(世宗)의 서자(庶子)인 밀성군(密城君) 이침(李琛)의 후손으로, 영의정을 지낸 이경여(李敬輿)의 손자이며,  생부(生父)는 대사헌을 지낸 이민적(李敏迪)인데 지평 이민채(李敏采)의 양자가 되었다.  생부가 홍문관(弘文館)책을 읽게 한 적이 있었다고 전한다.  어머니는 창원 황씨(昌原黃氏)인데 의주 부윤 황일호(黃一皓)의 딸이다.

외조부는 박장원(朴長遠)이며,  장인은 김만중(金萬重)이다.  당색으로는 서인(西人) 이었다가 그후 노론(老論)이 되었다.
숙종(肅宗)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에 기용된 후 1680년(숙종6년)에 별시문과(別試文科)을과(乙科)에 급제하고 1686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재차 급제하여 당상관(堂上官)이 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때 사형당한 이사명(李師命)의 동생이라는 이유로 남인(南人)들에게 집중 공격을 받았다.  기사환국때 송시열(宋時烈)등과 함께 죽은 형이 정치적으로 신원(伸冤)되지 못하자,  대사간(大司諫)으로 있으면서 1698년 이를 문제삼았다가 공주(公州)로 유배되었다.
이듬해에 유배에서 풀려나 석방 되었지만 1701년이 되어서야 예조판서(禮曹判書)가 되었으며 그 뒤에 이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여러벼슬을두루거친후에1706년(숙종32년)에우의정(右議政)에제수되고, 1708년(숙종34년)에좌의정(左議政)과영의정(領議政)을역임하였다.

이이명은 숙종(肅宗)을 섬김에 다른 신하들 보다도 인정을 많이 받았다.
1710년(숙종36년)에 내의원(內醫院)것이 전후로 11년이나 된다.  그의 정성을 아름답게 여긴 숙종이
“내 병을 근심하는 자는 경(卿) 한 사람뿐이다.” 라고 까지하였다. 1717년 숙종의 임종 직전에 홀로 임금을 마주하였을 때 소론이 지지하는 세자(世子) 곧 훗날 경종(景宗)에게 불리한 말을 하고 노론이 지지하는 연잉군(延礽君) 곧 훗날 영조(英祖)를 지지하였다 하여 소론과 남인들로부터 불만을 샀다.  이 당시 노론의 영수인 이이명이 숙종과 독대한 내용은 숙종 이사관(史官)들을 교묘하게 따돌렸기 때 문에《실록(實錄)》에 전하지 않는다.  숙종이 승하(昇遐)하자,  그가 고부사(告訃使)의 자격으로 청(淸)나라 연경(燕京)에 가서 이 사실을 알리고 돌아왔다.

포르투갈 신부 사우레즈 등을 만나 교유(交遊)하면서 천주교(天主敎)· 천문(天文)· 역산(曆算)· 지리(地理) 등에 관한 책을 가지고 이듬해 돌아와 국내에 소개하기도 하였다.  당시 연경에는 네 군데의 천주교 회당이 있었고 신부들이 상주하며서 양과학과 종교를 전파하고 있었다.  이때에 아들 이기지(李器之)가 함 께동행하였는데, 사우레즈 등에게 서양식 계란 떡,  지금의 카스텔라를 대접받았다.  숙종의 주치의 이시필(李時弼)도 동행했었는데, 훗날 귀국하여 서양식 계란 떡을 만들어 보려하였으나 그 맛을 내는 것은 실패하였다고 한다.

당시 글루텐 성분이 적은 우리의 밀가루로 반죽을 만들었으나 제대로 부풀어 오르지 않은 까닭이었다. 노론(老論)의 영수(領袖)인 그가 실생활에 긴요하게 사용되는 벽돌을 이용한 온돌 개발과 풀무를 이용하여 열효율을 높이고자 했던것과 외발수레의 사용 등 청나라의 문물에 개방적인 태도를 취한 것은 특기 할 만하다.

노론을 주도하며 주자도통주의(朱子道通主義)에 기반을 둔 정치이념을 적극 실현하고자 하였고,  서양의 학술 사상(學術思想)을 국내에 소개하기도 했던 그는 또 일찍이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서양문물(西洋文物)과 지도(地圖) 입수에 심혈을 기울였다. 특히, 요동(遼東)과북 경(北京)에 이르는 지형의 군사 형세를 그리고,  관방(關防)에 관련된 내용을 기록한 국방 지도인<요계관방지도(遼薊關防地圖)>를 만들어 숙종에게 올렸다.  이 지도는 청나라에서 구입한《주승필람(籌勝必覽)》안에 들어있는 <요계관방도>와,  모사한<산동해방지도(山東海防地圖)>에 우리나라 관방의 중요 부분을 더하여 제작한 것이다.

그는 또 양반 사대부에게도 군포(軍布)를 징수해야 한다고 주청한 바있는데,  그의 주장은,  이들 역시 조선의 백성이므로 양민(良民)들과 동등하게 병역(兵役)을 적용하고,  병역 을징발하거나 군포와 호포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었다.  그러나 이 주장은 곧 남인(南人)과 서인(西人) 모두에게 지지를 받지 못하였다.

그런가하면 1721년(경종1년)에는 영의정 김창집(金昌集)과 충익공(忠翼公) 조태채(趙泰采)와  종부제(從父弟)인 충민공(忠愍公) 이건명(李健命)과 함께 어전에서 연잉군을 왕세제(王世弟)로 책봉할 것을 주청하다가 소론의 반대 로그 결정 이철회되자,  유봉휘(柳鳳輝) 등의 탄핵을 받고 남해(南海)로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이들 세명과 함께 이이명을 포함하여 노론 사대신(四大臣)이라고한다.  이러한 와중에 목호룡(睦虎龍)의 고변(告變),  즉 노론이 숙종 말년부터 경종을 제거하려고 음모를 꾸몄다는 고변을 계기로,  8개월 동안 국문(鞫問)이 진행되었다.  그 결과 다음해 인1722년(경종2년)에 체포되어 한강 나루에 이르러 사사(賜死)되었다. 그의 시신은 공주(公州) 죽곡(竹谷)에 장사 지냈다.  이를 역사에서는 신임사화(辛壬士禍)라고 부른다.  이때에 노론의 많은 인물들이 화를 입었다.  아들 이기지도 1721년에 죽음을 맞이하여 아버지보다 먼저 죽었다.

그 뒤 1725년(영조원년)에 적신(賊臣)을 주벌(誅罰)하고 군흉(群兇)을 귀양보내는 한편, 충성을 포상하고 죽음을 애도하는 은전(恩典)을 크게 베풀게 됨에 따라 그의 벼슬이 회복되었고 시호가 내려졌으며 과천(果川)의 사충서원(四忠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1727년(영조3년)에 임천(林川) 옥곡(玉谷)에 묘를 다시 써서 장사지냈다.

저서 및 작품으로는 《소재집(疎齋集)》20권과 <강역관계도설(疆域關係圖說)>· <동국강역도설(東國疆域圖說)>· <양역변통사의(良役變通私議)>· <전산촬요(田算撮要)>· <강도삼충전(江都三忠傳)>· <요계관방지도(遼薊關防地圖)>가있다.

외국의 침략을 예견한 조정


<역사속의 유교이야기 25>

외국의 침략을 예견한 조정

 

1574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8년 전 정월은 조정 안팎으로 뒤숭숭했다. 그 전해 12월에 하얀 무지개가 태양을 꿰뚫고 지나가는 이변이 있었는데, 새해 정월 5일에도 다시 그러한 불길한 흉조가 하늘에 나타났다. 그 다음날 6일에는 지진이 일어났다. 율곡이 지은 ⌈경연일기⌋에는

“경성(京城)에 지진이 있었다.”

고 하였다.

서울에 지진이 있었으니 임금이 사는 궁궐에도 그 흔들림이 전해졌을 것이다. 당시에는 지진도 무지개가 태양을 관통하는 흉조만큼이나 나쁜 조짐이었다. 연산군 시대에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으로 있었던 이세영(李世英) 등이 올린 상소를 보면 지진에 대해서 이렇게 소개했다.(연산군 4년 7월 8일 기록)

임금이 약하고 신하가 강하거나, 임금이 포학하여 함부로 죽이면 지진이 있고, 대궐 안에서 정치를 어지럽히는 여자가 있으면 지진이 있고, 외척(外戚)이 멋대로 세도를 휘두르고, 내시가 권세를 부리면 지진이 있다. 그리고 형(刑)과 벌이 중용의 도를 잃으면 지진이 있고, 감옥에 원통한 죄수가 있으면 지진이 있고, 임금이 간하는 말을 듣지 않거나, 안으로 여색(女色)에 빠지면 지진이 있고, 오랑캐가 침범하여 사방에 병란(兵亂)의 조짐이 있으면 지진이 있다.

또 성종 23년(1493) 당시 서울에 지진이 일어나 땅이 흔들리자, 당시 영의정 등 고위 관리들은

“무능하고 부덕한 사람이 너무 오래 재상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변고가 생겼다”

면서 사직서를 내기도 하였다. 임금은 하늘이요 신하는 땅인데, 땅이 진동한 것은 신하들이 잘못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한나라 유학자 동중서는 이변이 발생하는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했다.

“후대에 이르러 군주가 음란하고 태만하여 국가가 쇠약해져서 백성들을 다스릴 능력을 상실하게 되자, 제후들은 등을 돌리고 양민을 학대하여 토지를 강탈하는 등 덕에 의한 교화를 폐하고 형벌에만 의존하게 되었다. 형벌이 온당치 못하면 사악한 기운이 생긴다. 사악한 기운이 밑에서 쌓이면 원한이 위로 축적하게 된다. 위아래가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곧 음양의 기운에 혼란이 일어나 이변이 발생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재이(災異)가 발생하는 원인이다.”
(⌈한서⌋「동중서전」)

기상이변이 생기는 것은 인간 사회의 부조리에 의한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또 그의 대표적인 저서인 ⌈춘추번로⌋에서 임금 왕(王)자를 이렇게 해석하기도 하였다.

“ 옆으로 그은 3획은 천(天), 지(地), 인(人)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 가운데를 위에서아래로 이은 것은 그 의미를 통하게 한 것이다. 천지(天地)와 인간의 가운데를 취하여 그것을 이어 하나로 통하게 하는 것은 왕이 아니면 누가 할 수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오직 인도(人道)만이 천(天)과 대등한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천지와 군주는 동일한 존재다”

유학자들의 생각에 기상이변이 일어날 때 군주의 역할은 그래서 중요한 것이다. 군주는 행동과 마음가짐은 단정하게 하고 백성들과 잘 소통함으로써 다가올 재난에 대비해야한다.

경복궁의 사정전
경복궁의 사정전

 

선조 임금은 거듭된 흉조를 당하여 음악 듣는 것을 중지하고, 반찬의 가짓수를 줄였다. 그리고 정전(正殿)의 사용을 피하였다. 정전은 궁궐에서 큰 행사가 열릴 때 사용하는 곳이다. 신하들과 조회할 때도 가끔 정전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기본적으로는 외국의 사신이 오거나 새로운 임금이 즉위할 때 사용한다.

선조는 경연의 자리를 옮겨 사정전(思政殿)의 처마 밑에서 하기로 했다. 하지만 정월에, 더구나 아침에 하는 조강(朝講)을 그곳에 하기는 날씨가 너무 추웠다. 그래서 신하들의 권유로 비현각(丕顯閤)에서 소규모로 강연을 하기로 했다. 비현각은 동궁에 있는 것으로 왕세자가 공부할 때 사용하는 조그만 전각이다.

이 비현각에 임금을 모시고 들어간 관료들은 대신, 대간, 강관뿐이었다.

율곡의 ⌈경연일기⌋에는 당일의 모습이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이때 입시관(경연에 참석하는 관리)들이 모두 사정전 문 밖에 나아갔으나, 지사(知事) · 특진관(特進官)은 비현각이 협소하여 들어갈 수 없었다. (중략) 임금이 비현각에서 이탁에게 말하기를,

“근래에 위로는 천변이 심상치 않고, 아래로는 민생이 곤궁하다. 나의 덕을 돌아보니 진취하는 바는 적고 퇴보는 많아 국사를 그르치는 일이 많았다. 지금은 다행히 모면해 나간다고 하더라도 자손에게는 반드시 근심이 있을 것이다. 이제 영의정에게 묻노니 장차 어떻게 하면 하늘의 노여움을 풀고 민생을 소생시키며 나라를 편히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8년 전, 선조 임금의 말은 마치 예언자의 말과도 같았다. 이탁(李鐸, 1508-1576)은 당시 67세로 영의정에 오른지 2년쯤 되었다. 1531년(중종 26)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535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는데, 정언, 지평, 이조정랑, 대간 등의 직책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그는 덕이 많고 청렴한 학자로 이름이 높았다.

경복궁 동궁의 비현각
동궁의 비현각

 

선조가 자신의 덕을 돌아보니 퇴보가 많고, 국사를 그르치는 일이 많았다고 한 것은 100% 진심으로 말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흉조를 맞이하여 임금의 자리에 있는 자로서 그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또

“지금은 다행히 모면해 나간다고 하더라도 자손에게는 반드시 근심이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는데, 재앙은 바로 18년 뒤, 자신의 임기 중에 일어났다. 그가 진심으로 반성하고 심기일전을 하였다면 임진왜란을 통해 일본사람들에게 그렇게 어처구니없이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본은 당시 바야흐로 혼란의 시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1338년에 출범하였던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가 멸망하였다. 무로마치 막부의 최고 수장인 15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 수도인 교토에서 1573년에 축출되었다. 일본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에 의해서 차츰차츰 하나의 통일된 제국으로 통합되고 있었다. 그의 부하인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그 밑에서 더 큰 야심을 키우고 있었다.

선조의 질문에 영의정 이탁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신의 생각으로는 주상(임금)께서 마땅히 유념하실 것은 경천(敬天) · 근민(勤民) 두 가지 일입니다. 주상께서 하시는 일이 어찌 하늘의 뜻에 합치되지 않는 것이 있겠습니까. 이변이 생기는 것은 실로 신과 같이 못난 자들이 중요한 자리를 더럽히는 까닭이오니, 보잘 것 없는 저를 파면하시고 현명한 재상을 다시 임명하시면, 치도(治道)를 이룰 수 있을 것이요, 천심을 기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사이 정사는 그리 어지럽지 아니하고 지방에서 뇌물을 주고받는 일도 드뭅니다. 또 의견을 구하는 교서를 내리어 겸손히 자책하심은 지성에서 나온 것이니, 성탕(成湯)의 여섯 가지 자책도 이보다 더 할 수 없습니다.

‘근민(勤民)’이란 백성들 다스리는 일을 부지런히 하는 것을 말한다. 부지런히 정치에 힘쓰라는 것이다. 이탁은 자신을 파면할 것을 제안하고, 또 교서를 내려 직언을 널리 구하도록 하였다. 이탁이 말한 성탕(成湯)의 여섯 가지 자책이란 은(殷)나라의 첫 임금 성탕 때의 일을 말한 것으로 당시 7년간이나 가물어 스스로를 자책한 일을 말한다. 성탕 임금은 스스로 뽕나무 밭에 들어가 비가 내릴 것을 기원하면서

“정치가 알맞지 않은가? 백성이 일을 잃었는가? 궁실이 사치한가? 궁녀의 청탁이 성행하는가? 뇌물이 행해지는가? 참소하는 자가 설치는가?”

하고 자책하였다고 한다. 그러한 자책 이후에 곧바로 사방 수 천리에 큰비가 내렸다.(십팔사략(十八史略)) 이탁은 이러한 자책보다 임금이 겸손히 자책하고 널리 지성으로 직언을 구하는 일이 더 절실하다고 하였다. 그러면 하늘의 노여움이 풀리고 백성들도 편안해질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을 이었다.

옛 사람의 말에 ‘알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행하기가 어렵다’ 했고, 또 ‘하늘을 공경하는 것은 실질로써 해야지 형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진실로 능히 실질로써 하늘에 응대하면 하늘의 꾸지람은 풀리게 될 것입니다. 흰 무지개의 변은 고금으로 병난(兵難)의 상징이라 하니, 변방이 수비를 미리 조처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탁의 말은 일본에서 준비되고 있는 조선 침략의 기미를 분명하게 파악한 것처럼 보인다. 물론 조선의 관리들이 일본을 방문하여 염탐하고 조사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하늘의 불길한 이변을 통해서 외국의 침략을 사전에 예견하였다는 것은 그러한 위기상황을 사전에 대처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임금이 무엇을 해야 할지 멀리 물어볼 것도 없이 영의정인 이탁의 입에서 다 나왔다. 무지개의 변은 외국의 침략을 뜻하니 국방을 튼튼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까지 해놓고 일본 침략을 대비하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임금 한 사람에게만 그 책임이 있을까?

우리 민족은 일본에게 두 차례나 침략을 당했다. 침략해 올 것을 예견하면서도 침략을 당한 것은 20세기 초의 식민지 침략 때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의 세 번째 침략은 없을 것인가? 요즘 일본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두 번이나 침략을 당한 경험을 잊지 말고, 철저한 대비를 서둘러야 한다.

하얀 무지개가 태양을 관통하다


<역사속의 율곡학 스토리텔링 24>

하얀 무지개가 태양을 관통하다

 

곡이 38세 되던 1573년, 선조 6년 12월 28일(음력)에 하얀 무지개가 태양을 관통한 일이 발생하였다. 율곡이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임명된 지 3일째 되던 날이었다.

율곡이 임명된 우부승지란 승정원(承政院)의 정삼품(正三品) 당상관(堂上官)이다. 승정원은 왕명을 취급하는 기관으로서, 도승지는 이조, 좌승지는 호조, 우승지는 예조, 좌부승지는 병조, 우부승지는 형조, 그리고 동부승지는 공조의 일을 분담하여 담당했다.
아울러 이들은 경연에 참석할 수 있는 경연 참찬관(經筵參贊官)과 춘추관 수찬관(春秋館修撰官)을 겸하였으며, 해당 업무에 관해 국왕의 자문 역할도 하였다. 왕이 내리는 교서(敎書)나 신하들이 왕에게 올리는 문서는 모두 이 승정원을 거치도록 되어있어서 그 역할이 매우 중대하였다. 오늘날의 대통령비서실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선조실록에는 그날의 기록에 이렇게 적혀있다.

“하얀 무지개(白虹)가 해를 관통했다. 영의정이 대궐에 들어가 임금을 뵈니 선조임금이 비망기(備忘記)로 이렇게 일렀다. ‘요즘 어진 선비가 조정에 있어서 훌륭한 말을 앞 다투어 아뢰는 것은 전에 없이 기쁜 일인데, 상서로운 일이 일어나지 않고 도리어 이변이 발생하였구나. 이것으로 보면, 위에서 옛 도를 회복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곧은 말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영의정은 당시 관료 중에는 최고의 위치에 있는 책임자로 임금을 보좌하고 모든 관리들을 거느렸으니 지금으로 말하자면 국무총리에 해당한다. 이러한 영의정이 급히 임금을 뵙고 임금의 교지(敎旨)가 담긴 비망기를 받아온 것이다.

비망기에는 하얀 무지개가 해를 관통한 일을 이변으로 표현하였다. 무지개가 해를 관통하는 것은 요즘 사람들의 지식으로는 별로 특이한 일도 아니지만, 당시로서는 흉조라 하여 전란이나 국가적인 재앙이 일어날 징조로 보았다. 하얀 무지개에 대해서 진서(晋書)(천문지)에는 온갖 재앙의 근본이라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영의정이 급히 임금을 찾아 교지를 받게 된 것이다.

임금의 교지에는 유감의 표명만 나와 있지만, 그 다음날 조정은 흉조에 대처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임금에게 조정의 행사를 취소하도록 권한 것이다.

그러한 조치에 대해서 12월 29일자 선조실록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승정원이 태양의 이변을 이유로 정월 초하루의 망궐례(望闕禮)와 9일의 문소전(文昭殿) 대제(大祭)를 정지하기를 요청하였는데, 임금이 그 의견에 따랐다.”

정월 초하루의 망궐례는 문무백관이 임금 앞에 모여 절을 하며 수복강녕을 기원하는 의식으로 요즘의 신년 하례식과 같은 행사이다. 문소전 대제는 종묘와는 별도로 궁궐 내에 지은 원묘(原廟)인 문소전에서 지내는 큰 제사를 말한다. 이들 행사는 어느 것이나 일 년의 시작을 준비하는 중요한 행사였는데 그런 행사를 취소한 것이다. 그만큼 태양을 관통한 하얀 무지개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이렇게 하얀 무지개가 태양을 꿰뚫고 지나간 일은 그 전 해인 1573년에도 있었다.

당시 1월 19일, 선조실록의 기사에 이런 기록이 있다.

“하얀 무지개가 태양을 꿰뚫었다. 임금이 다음과 같이 교시를 전했다. ‘근래 재난의 징조를 나타내는 이변이 끊이지 않았는데, 이제 또 이러하므로 아주 유감스럽다. 궁궐을 피하고 반찬을 줄이겠다.’”

임금이 자신의 과실을 반성하고 덕을 닦는다는 뜻으로, 정전(正殿)에 나아가 조의(朝儀)를 행하는 것을 삼가고, 반찬의 숫자를 줄이겠다고 한 것이다.

율곡은 ⌈경연일기⌋ 1574년 1월 기록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으니 조야에 직언을 구하는 교서를 내렸다. 또 성운(成運) 과 이항(李恒)을 불러 역마(驛馬)를 타고 올라오라 하였다. 이는 장차 재앙을 방비할 계획을 묻기 위한 일이었다. 하지만 성운과 이항은 병이 있다고 사양하고 오지 아니하였다.”

1573년에도 무지개가 뜬 다음날인 30일에 임금은 정전(正殿)에서 피신하고, 반찬을 줄이고 음악 듣기를 중지하였다. 율곡의 경연일기(1574년 정월조)에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임금이) 재변(災變, 재난이 일어날 이변)으로 인하여 정전(正殿)을 피하고, 반찬을 줄였으며, 음악을 듣지 않았다.”

⌈경연일기⌋에는 또

“우의정 노수신(盧守愼)이 병으로 사퇴하자, 지체 없이 체직(遞職)을 명하니 뭇 사람들이 의혹하였다.”

고 하였다. 임금이 우의정 사퇴를 받아들이고 지체 없이 교체를 명한 것은 역시 무지개의 이변 때문이었다.

우의정 노수신은 광주(光州) 사람으로 동인에 속한 인물인데 나중에 영의정(재임기간 1585-1588)까지 지냈던 인물이다. 선조실록에는 그의 사퇴가 왜 문제가 되었는지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나중에 다시 만들어진 선조수정실록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우의정 노수신(盧守愼)이 병으로 사퇴를 청하자 임금이 즉시 허락하였다. 이는 임금이 무지개의 이변이 일어나는 것을 대신이 적격자가 아니라서 그럴 것이라고 의심하였기 때문이다. 이이(李珥)가 좌의정 박순(朴淳)에게 말하기를,

“재변이 이러하므로 임금의 마음이 너무나 두려운 나머지 의심하지 않는 사람이 없고 의혹하지 않는 일이 없습니다. (중략) 마침내 이탁(李鐸)과 박순이 노수신을 체직하지 말 것을 계청하니 성상이 따랐다.”

 

무지개가 태양을 꿰뚫는 이변이 일어나니 임금은 자신이 신하들의 임명을 잘못한 것인지 의심한 것이다. 그래서 우의정의 교체를 선택하였다. 이러한 임금의 행동에 대해서 관료들은 몇 차례의 간언을 통해서 잘못을 지적함으로써, 결국 우의정 노수신은 교체되지 않고 사표가 반려되었다.

무지개가 태양을 관통하는 사건은 1574년 1월 5일에 한번 더 일어났다. 선조실록의 기록에

“눈이 오고 흰 무지개가 태양을 관통했다.”

고 하였다. 율곡이 한창 활동하던 시기에 궁궐에서 일어난 일들을 살펴보았다. 그가 살고 있던 시대에는 이렇듯 자연의 이상 현상이 정치와 밀접하게 연계되어 해석되는 시대이기도 하였다.

군주의 덕이 부족하고 사회 풍속이 타락해지면 하늘에서 경고를 내렸다. 자연의 이상 현상이나 자연 재해가 바로 그 경고라고 본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 조짐이 있으면 임금은 자신의 부덕함을 반성하고 백성들의 교화에 힘썼다. 이러한 사상은 유교의 한 부분이기도 하므로 유교의 역사관 혹은 정치관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실을 중시한 개혁가 율곡


<역사속의 율곡학 스토리텔링 23<

현실을 중시한 개혁가 율곡

 

약(鄕約)은 중국에서 전해진 것이다. 송나라의 <여씨향약(呂氏鄕約)>이 그 시초다. 여씨 향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함께 약속을 한 자는 덕업(德業)을 서로 권하고, 과실은 서로 바로 잡으며, 예속으로 서로 사귀고, 환난을 당할 때는 서로 도우며, 착한 일은 장부에 기록하고, 잘못이나 혹은 약속을 위반하는 일은 역시 장부에 기록한다. 잘못을 세 번 저지르면 벌을 주고 그래도 고치지 않을 경우에는 관계를 끊는다.”

이러한 내용은 남전여씨(藍田呂氏)의 형제들이 같은 마을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만든 자치 규약이었다. 북송시대에 활동하였던 여씨 형제들은 모두 여섯 형제 가운데 다섯 형제가 과거에 합격한 명문집안의 자제들이었다. 그들은 관중지방에서 북송의 대유학자인 장재(張載)와 정호(程顥), 정이(程頤)의 형제들에게 학문을 배웠다. 이들은 모두 북송의 고급관료로 외교, 국방, 경제 분야에 관여하고 예학자로서 사회의 교화(敎化)에 앞장섰다. 여씨 향약은 그러한 사회 교화 활동의 결과였다. 덕업을 서로 권장하고 예로서 서로 사귀며, 착한 일을 장부에 기록한다는 항목에서 그들이 지향한 유교적인 교화의 정신을 발견할 수 있다.

주자는 이러한 여씨향약을 보완하여 <주자증손여씨향약(朱子增損呂氏鄕約)>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고려시대 말에 주자학과 함께 우리나라에 알려진 것이다. <주자증손여씨향약(朱子增損呂氏鄕約)>은 여씨 향약과 거의 차이가 없는 것으로 일부 주자가 추가한 부분도 사실은 여씨 향약을 만들었던 여씨 형제들의 자료를 참고한 것이었다.

이러한 향약은 향촌의 주민들 모두를 대상으로 한 것이라기 보다는 향촌에 거주하는 사대부 혹은 사인층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아울러 이들 향약은 국가 권력과는 상관없이 향촌 내의 유력자를 중심으로 한 자치적인 규율이었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자율성이 강하였기 때문에 향약에서 정한 약속을 어겼을 경우에 어떤 행위를 강제할 수 없는 문제점도 있었다.

“잘못을 세 번 저지르면 벌을 주고 그래도 고치지 않을 경우에는 관계를 끊는다.”

라는 규정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최대한 강제할 수 있는 것이 관계를 끊은 수단 밖에는 없었다.

우리나라에서 향약이 실지로 널리 시행된 것은 조선시대 중엽 이후부터이다. 중종때 사림파인 조광조, 김식 등이 건의하여 전국 각지에 향약 실시가 반포되었다. 이후 퇴계 이황(李滉)과 율곡 이이 등이 우리나라 실정에 맞는 향약을 마련하여 실시하였다.

퇴계는 여씨 향약 중에서 특히 과실이 있을 경우에는 서로 시정한다는 ‘과실상규(過失相規)’의 항목을 중심으로 향약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예안향약(禮安鄕約)>이다. 예안 향약은 가정생활의 기본 윤리에서부터 향촌 마을 생활의 기본 윤리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규율을 정하였다.

퇴계는 향약의 제정에 임하는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옛날 향대부의 소임은 덕행과 도예(道藝)로서 고을 사람들을 이끌고 법을 따르지 않는 것을 규탄하는 것이었으며, 선비된 사람도 또한 반드시 집에서 몸을 바로잡고, 향중에서 이름이 들어난 뒤에야 나라에 나아가 등용되었다. 효제충신이라는 것은 인도(人道)의 대본(大本)이요, 집과 향당이라는 것은 그것을 실행하는 터전이기 때문이다.”

이어서 그는 향약 제정의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사람을 잘 얻으면 한 마을이 조용하고, 사람을 못 만나면 한 마을이 해체되거늘, 하물며 향속(鄕俗) 중에는 임금님의 덕화(德化)가 못 미쳐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서로 공박하고, 강한 자와 약한 자가 서로 갈등하며, 효제(孝悌)와 충신(忠信)의 도리가 허물어져 행해지지 아니하니, 예의를 버리고 염치에 등을 돌림이 날로 심해져 오랑캐나 금수와 같이 되어가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임금님의 정사(政事) 중에 큰 걱정꺼리이다. 그런데 그것을 바로 잡을 책임이 바로 향소(鄕所)에 있으니 실로 그 책임이 또한 무겁도다.”

여기에서 퇴계가 말하는 ‘향소’란 유향소(留鄕所)를 말한다. 유향소는 조선시대 때 지방 군현의 수령을 보좌하던 자문기관이다. 지방의 유력자나 벼슬에서 은퇴한 자 중에서 뽑아 지방의 풍속을 지도하고 향리의 부정을 막도록 하였다. 퇴계의 향약은 이렇듯 지방 유향소의 역할이 크고 지방의 행정조직과 연계된 것이 특징이다.

퇴계는 이어서

“혹자는 먼저 가르칠 종목을 들지 않고 다만 벌칙만 든 것을 의심할 것이다. 이것도 진정 일리가 있다. 그러나 효제충신이란 마음속에 타고난 떳떳한 성품에 바탕을 두고 있고, 또 국가에서도 학교를 세워 가르치는 것이 어느 하나 바르게 인도하지 않는바가 없으니, 하필 우리들이 따로 조목조목 열거할 필요가 있겠는가?”하면서 벌칙을 내릴 대상과 벌칙을 열거하여 향약을 마무리했다.

율곡은 36세 되던 1571년 6월에 청주목사(淸州牧使)로 임명되었다. 그 때 중국의 <여씨향약(呂氏鄕約)>을 토대로 <서원향약(西原鄕約)>을 만들었다. 그 다음해에 그는 병으로 사직하고 고향이 파주로 귀향함에 따라 향약이 지속적으로 실시되지 못하고 중단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2년 뒤(선조 6년, 1573년 9월 21일)에 조정에서 향약에 대한 논의가 있을 때는 향약의 실시를 반대하였던 것이다.

그는 왜 반대하였을까?

“(지금 우리 사회에) 진실은 적고 허위가 난무하게 되었습니다. 감옥에 갇혔다가 여러 사람들의 도움으로 구제를 받았다 하더라도 꼭 죄가 없어서 구제되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한 고을의 수령으로 많은 사람의 칭송을 받은 자라고 해서 꼭 공적이 있어서 그렇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율곡이 판단한 당시 선조시대의 사회에는 불합리한 일들이 너무도 많았다. 그래서 그는

“진실은 적고 허위가 성행하고 있다.”

고 한 것이다. 그는 이어서 당시 사회에는 술자리를 베풀어 선비들을 유혹하여 부정한 행위가 성행하고, 관리의 임용을 담당하는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혼탁한 세류에 물든 자들이 적지 않다고 하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향약을 시행할 수 없는 몇 가지 이유를 더 열거하였다.

“아래 백성들의 경우는 굶주림과 헐벗음이 절박하여 본심을 모두 잃어 부자 형제 사이라도 서로 길가는 사람이나 다름없이 보고 있으니, 그 밖의 일이야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사람의 도리를 제대로 유지하지 못하고 형벌과 정치가 제대로 제어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해온 방식대로 따르고 우리의 관습을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아무리 훌륭한 성인이 윗자리에 앉아있다고 하더라도 교화를 펼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율곡은 사회가 혼탁하여져서 선조 임금이 설사 공자와 같은 성인이라 할지도 향약은 시행될 수 없다 판단한 것이다. 이상적으로는 향약을 실시하는 것이 좋겠지만 현실의 조건이 그리 할 수 없으니 시행을 서둘러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이러한 생각은 현실을 중시한 개혁가 율곡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이의현(李宜顯: 1669~1745)


이의현(李宜顯: 1669~1745)                               PDF Download

 

의 호는 도곡(陶谷),  자는 덕재(德哉)이며 본관은 용인(龍仁)이다. 파주 목사(坡州牧使)를 지낸 이정악(李挺岳)의 손자이며,  좌의정(左議政)을 지낸 이세백(李世白)의 아들이며,  김상헌(金尙憲)의 손녀 사위이다.  명망있는 가문에서 성장한 그는 김상헌의 증손인 김창협(金昌協)의 제자가 되어 수학하였다.
율곡의 문하생이었던 김장생(金長生)과 김장생의 문인이었던 송시열(宋時烈)과 송시열의 문하생이었던 김창협으로 학맥이 이어진다.

이의현의 어린시절은 남인(南人)과 서인(西人)이 경쟁하고 또다시 서인이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나뉘던 때였다.  그는 1694년 26세의 나이로 별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기 전까지 아버지와 여러 스승으로 부터 수학하였다.  아버지로부터 《훈몽자회(訓蒙字會)》, 《사략(史略)》, 《당시(唐詩)》, 《소학(小學)》등을 배웠으며,  당시 대사간(大司諫)이었던 이혜(李嵇)윤이건(尹以健) ,윤이성(尹以性)형제에게도 수학하였다.  11세에는 이모부(姨母夫)인 이수실(李秀實)에게 《사략(史略)》7권을 배웠다.  12세에는《효경(孝經)》, 《논어(論語)》, 《시경(詩經)》, 《사기(史記)》를 배우고,  당시(唐詩)한유(韓愈)의 시(詩)를 읽었다.

13세에는 우홍성(禹弘成)의 집을 왕래하며 공부하였다.
15세가 되던 1683년에는 김창협을 빈객(賓客)으로 모시고 관례(冠禮)를 올렸으며 그해1 0월에 관찰사를 지낸 함종어씨(咸從魚氏)  진익(震翼)의 딸과 처음 결혼을 하였다.  이후 황해감사(黃海監司)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 해주(海州)로 갔으며 그 뒤 평양(平壤)과 경기도 광주(廣州)에서 지내며 학문을 연마하였다.

21세가 되던 1689년에는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인하여 서인(西人)이 실권(失權)하고 남인(南人)이 득세하였다.  이때 아버지를 따라고양(高陽)의 원당(元堂)으로 이사했다가,  그 이듬해에 경기도 광주로 이사하여 시(詩), 산문(散文), 변려문(騈儷文) 등의 공부에 주력하였다.  그 뒤 기사환국 때 장희빈에게 쫓겨 났던 인현왕후(仁顯王后)가 1694년 갑술환국(甲戌換局)을 맞이하여 다시 중전(中殿)의 자리로  돌아온 것을 기념하여 베푼 별시(別試)가 있었다.

이때 아버지인 이세백과 김창협의 요청에 따라 과거에 응시한 결과 합격하였다. 그 뒤 벼슬길에 올라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을 비롯하여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 ,승정원 도승지(承政院都承旨),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등 청요직(淸要職) 을두루거쳤다.

35세 되던 1703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49세 되던 1717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모두 3년 동안의 상복을 입으며 효를 다하였다. 1720년에는 동지정사(冬至正使)가 되어 연경(燕京)에까지 가게 되었는데 이때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제수되었다.  이때 남긴《경자연행잡지(庚子燕行雜誌)》에 그의 학문과 문학세계를 보여 주는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이의현은 처음부터 과거에 급제하여 명성(名聲)을 얻는 길로 나가고싶어 하지 않았다. 스승인 김창협에게 이러한 뜻을 보일 때마다 초심을 잃지 말라는 스승의 말에 따라 매일 책을 보며 학문에 힘썼다고 한다.  벼슬길에 대한 그의 회의적인 심경이 잘 나타나 있는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더구나 1721년(신축)부터 이듬해인 1722년(임인)까지 계속된 옥사로 노론의 사대신(四大臣)으로 지목받던 김창집(金昌集), 이이명(李頤命), 이건명(李健命), 조태채(趙泰采) 등이 죽임을 당하는 등 노론세력이 소론에게 축출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의현도 김일경(金一鏡) 등에게 탄핵을 받아 벼슬에서 물러나게 되었으며 이듬해에는 운산(雲山)으로 유배되어 3년간을 보냈다.  이것을 역사에서는 신임사화(辛壬士禍)로 규정하는데, 장희빈의아들이소론의도움을받아경종(景宗)으로즉위한다음해부터 벌어진 사건이었다.  유배 기간 동안에 이의현은 학문에 대한 열정을 다시 되찾아 사서삼경(四書三經)을 포함한 여러 책들을 깊이 연구하였다.

경종이 죽고 노론(老論)의 지지를 받던 영조(英祖)가 즉위하자,  1725년에 그는 사면령(赦免令)을 받아 운산에서 돌아왔다.  그리하여 영조에게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영조는 그에게 홍문관(弘文館)과 예문관(藝文館)의 대제학(大提學)  벼슬을 주어,  이재(李縡), 이병상(李秉常)을 이어 세번째로 문형(文衡)의 자리에 오르게 하였다.  1727년 우의정(右議政)이 되었으나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실각하여 양주(楊州) 도산(陶山)으로 물러나 있다가 이듬해인 1728년에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다시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등용되었다.

그러나 이후로는 도산에 본거지를 두고 생활을하며 중국에 다녀 오기도하였다.  1735년영의정이 되었으나 이미 벼슬에서 마음이 멀어진 상태였으므로 다시 도산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인생의 말년이던 1740년에는 둘째 부인송씨(宋氏)에게서 난 외아들이 요절하는 슬픔을 겪었다.  이의현은 자신의 삶을 정리한 기록으로 1735년에서 1742년에 걸쳐 <자표(自表)>와 <자지(自誌)>를 남겼으며,  1744년에는 일생의 연대기인 《기년록(紀年錄)》을 완성하였다. 현재 전하고 있는《도곡집(陶谷集)》의 <유지(遺識)>에서 그의 저작물의 목록을 알 수 있다.  그의 저술은 다음과 같다.

<만부(漫瓿)> ,<장소록(章疏錄)>, <계의장첩등록(啟議狀牒等錄)>,    <응제록(應製錄)>, <금석록(金石錄)>, <일혜록(壹惠錄)>, <술덕록(述德錄)>, <지과록(志過錄)>, <잡술록(雜述錄)>, <간독록(竿牘錄)>, <여췌록(餘贅錄)>, <당후일기(堂后日記)>, <병정일록(丙丁日錄)>, <잠필록(簪筆錄)>, <연행일록(燕行日錄)>, <서천일록(西遷日錄)>, <사고(私考)>.

또한 자신의 일생을 16단계의 분기(分期)로 구분하고 16종의 시집을 (詩集)을 엮었다.  그 시집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형탑록(螢榻錄)>, <표직록(豹直錄)>, <앵천록(鶯遷錄)>, <오번록(鰲藩錄)>, <조갱록(蜩羹錄)>, <작얼록(鵲臬錄)>, <용곡록(龍谷錄)>, <연사록(燕槎錄)>, <우세록(牛歲錄)>, <복사록(鵩舍錄)>, <학귀록(鶴歸錄)> ,<호구록(狐丘錄)>, <여적록(驢跡錄)>, <홍추록(鴻樞錄)>, <태배록(鮐背錄)>.

율곡이 향약 시행을 반대한 이유


<역사속의 율곡학 스토리텔링 22>

율곡이 향약 시행을 반대한 이유

 

1573년(선조 6년) 9월 21일, 율곡은 경연의 자리에서

“향약(鄕約)을 오늘날 시행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라고 말하며 향약 시행에 대해서 완곡하게 반대의견을 제시했다.

그 다음해(1574년, 선조 7년) 1월 1일자로 기록된 「우부승지 이이의 시폐와 재변에 관한 만언소」에서도 율곡은

 

“향약(鄕約)을 널리 실시하는 것이 아름다운 일이긴 하나, 어리석은 저의 생각으로는 지금의 풍속을 가지고 향약을 실시한다면 좋은 성과가 없을까 염려됩니다.”

 

라고 주장하였다.

향약이란 지방 향촌에서 백성들끼리 정한 약속으로 향촌의 자치 규약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향약을 중앙의 조정에서 실시를 논한다는 것 자체가 사실은 그 취지를 훼손시킬 수 있는 위험한 일이다. 자치 규약이 아니라 강제 규정으로 변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율곡은 그러한 문제점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당시 조정의 대다수 관리들의 의견은 향약 시행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면 1573년 9월에 율곡과 같이 경연에 참가하였던 김우옹(金宇顒, 1540-1603)은, 만약 향약을 당장 실행하지 않는다면 일을 크게 그르치게 될 것이라고까지 주장하였다. 김우옹은 당시 34세로 38세였던 율곡보다 4살 젊은 관료였다. 김우용 역시 율곡처럼 선조의 두터운 심임을 받았는데, 서인 그룹에 가까웠던 율곡과는 다소 대립적인 동인 그룹에 속한 인물이었다.
김우옹은 1573년에 이황에게 시호를 내리도록 건의하고, 또 조광조를 모신 도봉서원에 사액을 내리도록 건의하기도 하였으며, 1579년에는 율곡을 비난하는 사람들의 주장에 반박하고 율곡을 두둔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그도 적극적으로 향약을 지지했는데 율곡은 왜 향약 실시 반대 입장을 취했을까?

선조가 왕의 자리에 오른 이후에 향약 시행에 대해서 관료들의 제안이 잇달았다. 예를 들면 황억(黃億)이 상소를 올려 여씨 향약(呂氏鄕約)을 시행하자고 하였다. 이에 대해 예조에서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여씨 향약의 법을 시행하면 모든 사람들이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계하게 되어 교화를 베풀고 풍속을 바르게 하는 데 반드시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흉년을 만나 백성들이 기근과 추위를 면하기에 급급하여 예의를 돌아볼 겨를이 없습니다. 그런데 억지로 모이게 하여 향약을 강론하느라 분주하게 되면 소요가 일어날 폐단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니 유능한 인물이 많은 곳을 택하여 먼저 그 가능성을 시험해 보도록 하되 급하게 몰아치지 말고 점차적으로 시행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선조 4년, 1571년 2월 28일 선조실록 기사)

흉년으로 백성들에게 예의를 가르칠 여유가 없으며 또 향약을 가르치기 위해서 백성을 모을 때 소요 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선조도 이러한 예조의 지적에 따라 향약의 실시에 대해서 선뜻 반기지 않았다.

그러나 예조의 반대 의견에도 불구하고 홍문관(弘文館) 관리들은 1572년(선조 5년) 10월 25일에 또 다음과 같은 의견을 제시하면서, 향약 실시를 재차 요청하였다.

“임금이 재앙을 당하면 마땅히 두려워하고 스스로를 반성하고 수양해야 하며, 의견을 구하고 간언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요즈음 헌부(憲府)의 상소에 대하여 성상께서 짜증과 불평스러운 말로 답하셨으니, 말을 받아들이는 도량을 넓히기를 청합니다. 또 간원이 향약을 시행하자고 청하였을 때 성상께서 해괴한 풍속이라 하여 고인의 법도를 회복하는 것을 괴이한 일로 여겼으니 매우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홍문관의 이러한 건의에 뒤이어, 향약을 시행하자는 관리들의 간언이 잇달아 올라오자 선조는 결국 마지못해서 향약의 실시를 허가하였다.

그러한 임금의 결정에도 율곡은 향약 실시에 대해서 반대를 하였는데, 그는 아직 그것을 실시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1574년에 임금께 올린 만원소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성상(임금)께서 처음 자리에 오르셨을 때는 백성들 사이에 희망에 차서 그런 대로 선을 지향하려는 생각들이 많았습니다. 만약 그때에 성덕(聖德)이 날로 풍성해지고 정치가 날로 향상되었더라면 오늘날의 인심이 어찌 이 지경에 머물러 있겠습니까? 오직 초년(初年)에 대신들의 보필이 적절하지 못했기 때문에, 전하를 천박한 법규로 그르치게 하고 민생을 비천한 지경으로 몰아넣었습니다.

대신들이 간혹 공명(公明)한 마음으로 공론을 제기하기도 하였으나, 깨끗하고 올바른 의견은 미약하고 저속한 견해가 고질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선한 말을 듣거나 선한 사람을 보면 남의 체면 때문에 흠모하는 자도 있고, 겉으로는 좋아하는 체 하면서 속으로 꺼리는 자도 있고, 혹은 버젓이 손가락질하면서 비난하는 자도 있었는데, 진심으로 선한 말과 선한 사람을 좋아하는 자는 아주 드물었습니다.”

율곡의 생각으로는 선조 초년에 임금을 보필하던 신하들이 정치를 잘못하여 백성들의 삶이 궁핍해졌다는 점, 그리고 진심으로 선한 말과 선한 사람을 좋아하는 자가 드물다는 점을 든 것이다. 선한 말과 선한 사람을 좋아하는 자들이 드물다는 것은 백성들 사이에서 보다는 백성들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관리들 사이에서의 사정을 말한 것이다.
그는 대신들 사이에 저속한 견해가 고질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선한 말을 듣거나 선한 사람을 보면 남의 이목 때문에 겉으로는 좋아하는 체 하지만, 사실은 속으로 꺼린다는 것이다. 혹은 버젓이 손가락질하면서 비난하는 자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한 말과 선한 사람을 좋아하는 자는 아주 드물었다고 하였는데, 요컨대 관리들 자신들이 향약과 같은 도덕적인 규약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1573년 9월 21일에 향약을 반대하면서 율곡이 지적한 이유가 바로 그러한 것이었다. 그는 ‘여러 분야의 정치가 원활하지 못하고 백성들이 고달프기’ 때문이라고 하였는데, 백성들이 궁핍해져 있고, 관리들이 그러한 제도를 실시할 만큼 성숙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1574년에 올린 만언소에서 그는

“지금의 습성을 가지고 향약을 실시한다면 좋은 풍속을 이룩하는 성과가 없을까 염려됩니다.”

라고 한 것이다. 관리들 자신들이 변하지 않는 상황에서 향약을 실시하게 된다면 향약의 취지가 변질되어, 소기의 성과를 이루기 힘들 것이라고 본 것이다.

율곡, 향약 시행의 어려움을 말하다


<역사속의 율곡학 스토리텔링21>

율곡, 향약 시행의 어려움을 말하다

 

선조 6년, 즉 1573년 9월 21일의 이야기다.

날 율곡은 왕에게 ⌈서경⌋을 강의하였다. ⌈상서(尙書)⌋라고도 불리는 이 책은 ⌈우서(虞書)⌋, ⌈하서(夏書)⌋, ⌈상서(商書)⌋, ⌈주서(周書)⌋로 구성되어 있는데, 요순시대, 하나라시대, 은나라(상나라)시대, 그리고 주나라 시대의 정치 이야기를 기록한 역사 서적이다. 이날 율곡이 어떤 내용을 강의하였는지는 상세한 기록이 없다.

당시 조정에서는 향약(鄕約)의 실시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향약이란 ‘향촌의 약속’이란 뜻으로 마을의 자치적인 규약을 말한다. 1519년, 중종 14년에 조광조가 향약을 널리 실시하고자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한 적이 있었다.

율곡이 지은 ⌈경연일기⌋의 1573년(선조 6년) 9월 기록을 보면 ‘옥당(玉堂)과 양사(兩司)에서 상소하여 팔도 군읍(八道郡邑)의 사민(士民)으로 하여금 향약을 행하도록 하자고 잇달아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고 하였다. 옥당은 홍문관이며, 양사는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을 말한다. 이들 부서에서 향약 시행을 거듭 요청하여 선조는 허락을 하였다는 것이다.

1573년 9월 21일 경연장의 일이다.

선조 임금의 목소리가 다소 잠겨 있었다. 그것을 놓치지 않고 율곡은 이렇게 말했다.

“제가 병이 있어 오랫동안 고향에 물러가 있었는데, 오늘 전하의 목소리를 들으니 많이 잠겨있는 듯 하온데, 무슨 까닭으로 그러하신지 모르겠습니다. 전하께서는 여색을 경계하라는 말을 싫어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중략) 그런 일이 없으면 여색을 멀리하도록 더 힘쓰실 것이요, 듣기 싫어해서는 안 됩니다.”

율곡은 임금에게 강의를 하는 입장이었으나, 동시에 홍문관 직제학의 신분으로 왕을 대면하는 입장이었다. 홍문관의 관원들은 임금의 자문에 응하는 임무 외에도 조정의 일에 대해 옳고 그름을 논하거나 임금의 잘못을 간언하는 책임이 있었다. 임금의 목소리가 평소와 달리 잠겨 있다는 것은 무언가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판단하고 그 문제를 임금 스스로 파악할 수 있도록 간언을 한 것이다. 동시에 율곡은 임금이 사람들의 듣기 싫은 간언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하여 싫어해서는 안 된다는 충고도 덧붙였다.

조선의 임금 자리는 그렇게 어려운 자리였다. 율곡의 지적이 지나친 점도 있었으나 당시 율곡이 속해있던 홍문관은 특히 간언의 중추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임금이 사헌부나 사간원의 간언을 듣지 않으면 마지막으로 홍문관까지 합세하여 간언을 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한 홍문관의 관료로서 간언을 한 것이다.

선조도 임금이 된지 6년이나 지났기 때문에 그냥 꾸중만 듣고 있지는 않았다. 당시 22살의 혈기 왕성한 청년이었던 선조는 이렇게 대꾸했다.

“그대가 전에 올린 상소(上疏)에도 그렇게 말하였으나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람의 말소리는 원래 같지 않은 것인즉 내 말소리가 원래 그러한데 무슨 의심할 것이 있겠는가?”

쓸데없이 목소리를 핑계로 여색 운운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율곡도 그냥 물러설 사람이 아니었다.

“전하가 막 임금이 되었을 때도 제가 가까이서 뵈었는데, 그 때에는 목소리가 낭랑하여 이렇지 않았기 때문에 제가 감히 의심한 것입니다.”

옆에서 선조와 율곡의 이야기를 계속 기록하고 있던 사관도 두 사람의 대화가 날카로워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는지, 이렇게 기록했다.

‘이이(율곡)가 임금에게 일을 아뢸 때 어투가 너무 직설적이었는데, 이 때 전하가 자못 언짢아했다.’

이어서 선조는 화제를 돌려 율곡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대는 무슨 까닭으로 조정에 머물지 않고 오래도록 물러가 있었는가?”

율곡이 사퇴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있었던 것에 대한 불만을 토로한 것으로 화제를 슬쩍 돌린 것이다.

율곡은 그 전 해 1572년(37세)에 병으로 사직을 하고 고향인 파주로 내려가 친구인 성혼과 어울려 성리학 공부를 하고 있었다. 다음해 1573년 7월에 홍문관 직제학으로 임명되었으나 그는 바로 사퇴를 청하였다. 하지만 허락을 받지 못했는데, 여러 차례 상소를 하여 결국 허락을 받고 다시 파주로 돌아갔었다. 그런데 9월에 조정에서 다시 율곡을 직제학으로 임명하였다. 율곡은 또 사퇴를 청하였으나 이때는 허락을 받지 못했다. 이날 율곡이 임금에게 서경을 강의하게 된 것은 그런 일이 있고난 뒤였던 것이다.

율곡은 자신의 행동을 변명하듯이 이렇게 말했다.

“저는 몸이 쇠약하고 병들어서 힘써 전하를 모실 수가 없었습니다. 마음의 병이 있는데다 능력도 짧아서 조정에 있어도 도움을 드릴 수가 없는데, 구차하게 녹(祿)을 먹는 것을 생각하면 마음의 병이 더 심해졌습니다. 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물러가 있었으나 군신(君臣)의 의리야 감히 잊었겠습니까?”

선조는 그 말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

“그대는 이곳에 머물며 나를 보좌해야 하니 다시는 떠난다고 하지 말라.”

행여 젊은 임금이 여색에 너무 빠져 목소리가 상하게 되었는지 의심을 한 신하이기도 하였지만, 그것은 바로 자신을 위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을 선조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율곡은 이제 시급한 정무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향약(鄕約)을 오늘날 거행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여러 방면의 정치가 아직 원활하지 못하고 백성들의 생활이 고달픈데, 교화(敎化)하는 일부터 시행한다면 추진이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전하께서 거행하라고 명령을 내리셨으니, 이에 전하의 마음이 장차 큰일을 할 수 있음을 알겠습니다. 전하께서 더욱 힘써 몸소 솔선하신다면 무엇을 행한들 어렵겠습니까?”

율곡은 백성들의 생활이 고달픈데 그들을 교화하는 일이 그렇게 시급한 것인가 하는 뜻이었다. 이미 임금이 향약 시행을 결정한 이상 적극적인 반대는 못하지만, 자신의 생각은 그것에 적극 찬성할 수 없다는 뜻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다.

같은 자리에 참석하고 있던 김우옹(金宇顒)은 율곡의 의견과는 달랐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향약을 어찌 행할 수 없겠습니까? 무릇 일에는 근본이 있어야 하며, 이것은 임금에게 달려 있는 것으로 몸소 행하고 마음으로 체득하여 모범이 되고서야 행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중략) 만약 향약을 오늘날에 행할 수 없다고 여긴다면 크게 일을 그르치게 됩니다. 지난번 경연관(經筵官)이 주자의 말을 인용하여 향약은 행하기 어렵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매우 옳지 않습니다. 교화는 반드시 위에서 하는 것인데, 주자는 아랫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행하기 어렵게 여겼으나 이제 전하께서는 이룰 수 있는 자리에 계시니, 무엇 때문에 행하기 어렵겠습니까?”

김우옹은 임금의 의지만 있으면 향약의 시행이 어렵지 않을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율곡이 이미 청주목사(淸州牧使)로 임명되었을 때, 그곳에서 향약을 시행해본 경험이 있어 그 일이 임금의 의지만으로는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젊은 군주 선조의 고민


<역사속의 유교이야기 20>

젊은 군주 선조의 고민

 

리나라는 5년마다 한 번씩 최고 통치자가 바뀐다. 새로운 대통령을 뽑는 날 자신이 투표한 인물이 대통령에 당선되면 그 사람들은 5년간에 변하게 될 대한민국의 미래를 상상하면서 커다란 희망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자신이 기대하지 않았던 인물로, 더구나 그 능력이 의심스럽다고 생각되는 인물이 선출되면 그를 찍지 않은 사람들은 절망에 빠진다. 그리고 5년간의 미래를 걱정한다. 단지 5년뿐인데도 그렇다. 그렇다면 조선의 임금들처럼 죽을 때까지 최고 통치자가 되는 경우는 어떨까? 사람들이 가지게 될 심리적 부담을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조선의 임금들은 종신직이었다. 죽을 때까지 최고 통치자로 산다. 선조는 1567년에 16세의 나이로 조선의 왕이 되었다. 그의 미래에 조선은 일본의 침략을 받아 경복궁이 불타고 임금이 종묘사직을 버리고 다른 나라로 망명을 준비하고 조선왕조실록의 보관 창고가 송두리째 불타버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누구도 그런 일을 예견하지 못했고, 누구도 그런 사건의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았다. 선조 자신도 처음부터 자신의 나라를 그렇게 멸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으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선조는 명나라로부터 조선의 국왕이라는 공식적인 통보를 받고서 나라 안의 대학자들을 궁궐로 불렀다. 장시간 동안 ⌈대학⌋ 공부를 하고 있던 그때, 그는 불려온 성리학자 기대승(奇大升, 1527-1572)에게 이렇게 질문했다.

“정자나 주자가 관직을 떠나 물러간 것은 그 당시 임금이 소인의 이간질로 지성으로 대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약 임금이 지성으로 했더라면 어찌 참소가 있겠는가?”

어진 사람들을 곁에 두고 훌륭한 정치를 펼쳐보고 싶다는 포부를 이렇게 바꿔 말한 것이다. 선조 자신은 정자나 주자처럼 훌륭한 학자들을 지성으로 대할 자신이 있다는 의사 표시이기도 하였다. 기대승이 이 앞의 설명에서 명도(明道)나 이천(伊川) 그리고 주자의 관직 생활이 여의치 않았으며, 자신들의 꿈을 정치에서 충분히 펼쳐 보이지 못했음을 설명하자 거기에 대해 그렇게 질문을 한 것이다.

기대승이 이렇게 대답했다.

“임금님의 가르침이 지당하십니다. 하지만 소인이 군자를 해치는 데는 천만 가지의 방법이 있기 때문에 임금이 비록 지성으로 어진 사람을 등용하려 해도 어진이가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중국 남송 때의 효종(孝宗)은 유능한 임금이었습니다.
주자는 근본을 바로잡고 근원을 깨끗이 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세 번이나 입궐하여 진언한 것이 모두 환관을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효종이 비록 어질다고 하더라도 왕에 오르기 전에 총애하는 자들이 주변에 많았기 때문에 인정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주자는 아첨꾼들이 조정을 좌지우지하고 있으면 임금이 비록 진심으로 국사를 운영한다고 하더라도 끝내는 반드시 후환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물러갔습니다.”

훌륭한 학자를 곁에 두고 일을 맡기려고 해도 그것이 쉽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소인이 군자를 해치는 방법이 수없이 많기 때문에 임금의 뜻이 그대로 이루어지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당시 기대승은 41세였다. 그 뒤 3년 뒤에 관직을 버리고 낙향할 것을 선택하였는데, 왜냐하면 기대승은 이미 조정에서 불합리하게 벌어지는 많은 것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또 기대승은 이렇게 말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어진이를 알아보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알고서 신임하는 것이 어렵다’고 했습니다. 만약 신임하지 않는다면 소인의 참소와 이간질이 어찌 이르지 않겠습니까.
우리 조정의 일로 말하더라도 중종 초년에 조광조(趙光祖, 1482-1520)가 정성을 쏟아 지극한 정치를 도모하고 마음을 다하여 국사에 임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학문이 성현의 경지에 미치지 못하여 당시 실시한 일들이 간혹 적중하지 않기도 했습니다. 그리하여 소인들의 무리가 끝내 사직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라고 모함하자, 중종도 믿지 않을 수 없어서 결국에는 큰 화를 입게 되었습니다. 대신을 신임하게 되면 소인은 이간질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어진이 하나가 참소를 받고 물러간다면 사람들은 세상을 등지고 발걸음을 멀리 할 것이며 조정에 나오는 자들은 녹만을 탐할 뿐입니다.”

기대승은 또 선조가 이황이며, 이항, 조식 등 원로 대학자를 초빙한 점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했다.

“지난번에 이황(李滉), 이항(李恒), 조식(曺植)을 올라오게 하신 일은, 그것이 비록 선왕의 뜻이었다고는 하지만 임금께서 계승하시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 이상 가는 일은 없습니다.
다만 이황은 1501년생이고, 이항은 1499년생이며, 조식 역시 1501년 모두 70세의 고령입니다. 이처럼 날씨가 몹시 추울 때에는 불러올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미 부르시는 명령이 내리셨으니 아마도 물러나 있기가 미안하여 괴로워 할 것입니다. 만약 집에 있으면서 병을 조리하는 것을 어렵게 여겨 길을 떠났다가 병이라도 얻게 되면 길에서 죽을까 걱정됩니다.
전하께서 만나보시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고 하더라도 어진 선비를 만나 뵐 때에는 관대하게 해야지 몰아붙여 촉박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날씨가 춥고 병이 있다면 일의 형세를 보아가면서 올라오도록 다시 명령을 내리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젊은 임금 선조는 이렇게 대학자들을 모시고 자신이 나라를 다스리는데 귀중한 조언을 듣고 싶어 했다. 기대승은 선조의 관심에 부응하여 이황과 이항 그리고 조식에 대해서 자신이 듣고 본 바를 상세하게 소개했다. 예를 들면 그는

“이황과 이항은 신이 직접 보아서 잘 알고 있으며 조식은 신이 보지 않아 잘은 모르지만, 일찍이 여러 벗들을 통해 그들의 사람됨에 대해서 들은 바가 있습니다. 이황에 대한 평을 보면, 자질이 매우 고명하고 정자와 주자를 조술(祖述)하여 근래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인물이 드뭅니다. 그의 성품이 명예나 이익에는 관심이 없으며 젊어서부터 벼슬살이를 싫어하여 고향에 내려가 사느라 고생이 많다고 합니다.”

라고 하였다.

하지만 젊은 선조가 너무 급하게 일을 추진하는 것을 염려하여 기대승은 다음과 같이 충언을 덧붙였다.

“부득이 성상(임금)의 학문이 고명해지신 뒤에야 정무(政務)의 득실과 시비, 그리고 여러 신하들의 현명함과 그렇지 못함, 나쁜 점과 좋은 점을 볼 수 있으실 것입니다. ⌈중용⌋ 구경장(九經章)에 이르기를 ‘몸을 수양하면 도가 확립된다.’라고 하여 ⌈중용⌋의 도는 수신을 근본으로 삼았습니다. 이천(伊川) 역시 뜻을 세우고, 현명한 인물을 구하고, 임무를 맡길 때 전적으로 맡기는 것을 천하를 다스리는 요체로 삼았습니다. 근본을 바로잡고 근원을 맑게 한 뒤에야 어진이가 기꺼이 등용되고자 할 것입니다. 어진이를 등용하지 못한다면 그들이 비록 큰일을 하려고 해도 어찌 진심을 다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뜻을 임금께서는 유념하셔야 합니다.”

이렇게 말한 기대승 자신 역시 선조 곁을 떠나 낙향을 선택하였다. 조정에서 그는 자신을 경계하던 영의정 이준경과 끊임없이 갈등을 겪었다. 결국 이준경의 문제점을 들어 기대승은 선조에게 상소까지 하였으나 선조는 이준경을 감싸고 돌았다. 이준경은 선조가 왕에 오를 때 큰 공헌을 한 사람이었다. 옷자락을 붙잡는 선조를 뿌리치고 길을 떠난 기대승은 낙향 길에 조그마한 종기가 몸에 퍼지면서 사망하였다. 선조는 그의 죽음이 안타까워 그가 경연장에서 남긴 말을 모아 문집으로 만들도록 하였지만, 엄밀히 따지면 기대승을 떠나게 한 것은 선조 자신이었다.

 

선조의 중국 유교사 공부


<역사속의 유교이야기 19>

선조의 중국 유교사 공부

 

선시대는 유교가 국교와 마찬가지의 위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특히 성리학은 하나의 정치 이념과도 같은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는데 어떤 과정을 통해서 그러한 영향력을 갖게 되었을까?

선조가 즉위한 해, 즉 1567년에 이루어진 경연의 기록은 그러한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다. 당시 16세였던 선조는 대학을 공부하면서 기대승에게 다음과 같은 중국 유교사 강의를 들었다.

“요임금, 순임금, 우임금, 탕임금, 주나라의 문왕, 무왕, 주공 그리고 춘추시대의 공자는 도(道)의 정통입니다. 요임금, 순임금 시대에는 고요(皐陶)·직(稷)·설(契) 같은 이가 있었습니다. 탕임금 시대에는 이윤(伊尹) 같은 사람이, 그리고 주나라의 기초를 세운 문왕에게는 태공망(太公望)과 산의생(散宜生) 같은 이가 있었습니다.”

이들이 유교를 만들어낸 것은 아니지만, 중국 유교의 역사는 이들 없이는 성립되지 않는다. 이들의 존재를 전제로 유교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요임금과 순임금은 하나라 이전의 임금들이다. 우임금은 하나라를 세운 왕이고, 탕임금은 은나라를 세운 왕, 그리고 문왕은 주나라의 기초를 세운 왕, 무왕은 그의 아들로 주나라를 세운 왕이며, 주공 단(周公 旦)은 문왕의 아들이요 무왕의 동생인데, 무왕 사후에 그의 아들 성왕을 도와 주나라의 발전 기반을 튼튼히 한 정치가이다. 그는 또 주나라 창업의 공신이기도 하고, 노나라의 시조이기 때문에 유교를 집대성한 공자가 특히 흠모하였다.

기대승은 이러한 소개를 한 뒤에, 유교의 역사에 대해서 이렇게 이어갔다.

“공자에게는 3천 제자가 있었습니다. 3천 제자들 중에서 안자(顔子)와 증자(曾子)가 그 종지(宗旨)를 얻었으며, 그 뒤에 자사(子思)가 증자의 전승을 받았고, 맹자(孟子)는 자사의 문인에게서 수업을 하였습니다.”

중국 근대시기에 활약한 사상가 양계초(梁啓超, 1873-1929)는 ⌈논어⌋와 ⌈맹자⌋가 한나라 때만 하더라도 2급, 3급의 책으로 치부되었으며, ⌈맹자⌋의 경우는 그 이름조차도 희미하여 제자백가 중의 하나 정도로 밖에는 인정받지 못했다고 하였다. 당시 중요한 유교 경전은 오히려 다섯 경전, 즉 오경인 ⌈시경⌋, ⌈서경⌋, ⌈예기⌋, ⌈춘추⌋, ⌈역경⌋이 중요한 책으로 꼽히고 있었다. 그러나 기대승은 성리학자로 송나라 때 형성된 신유학, 즉 성리학의 영향을 크게 받았기 때문에 중국 유교를 말하면서 공자 → 증자 → 자사 → 맹자로 이어지는 도통을 중시하여, 젊은 왕에게 그러한 관계를 설명한 것이다. 성리학적인 이념은 조선의 통치자에게 이렇게 전파되었다.

이어서 기대승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맹자가 죽은 뒤에는 공자의 도(道)가 끊어져서 천여 년을 내려오다가 송(宋)나라 때 이르러서 비로소 끊어진 도통이 이어졌습니다. 대표적인 인물로 염계 선생(濂溪先生)인 주돈이(周惇頤)가 있었는데, 학문이 고명하며 저술로는 ⌈태극도설(太極圖說)⌋과 ⌈통서(通書)⌋가 있습니다. 또 두 정씨가 나왔는데 형인 정호(程顥)는 호를 명도 선생(明道先生)이라 하였으며 저술로는 ⌈어록(語錄)⌋이 있고, 아우 정이(程頤)는 호를 이천 선생(伊川先生)이라 하였으며 저술로는 ⌈역전(易傳)⌋이 있습니다. 이들은 후학들에게 학문을 강론하여 유교를 공부하는 사문에 공로가 있었는데, 그들 제자로는 귀산(龜山) 양시(楊時)와 예장(豫章) 나종언(羅從彦)이 있습니다. 연평(延平) 이동(李侗)은 나종언에게서 배웠고, 주자는 이동의 제자로서 경서의 주석을 찬정(撰定)했으니 결국 두 정씨를 비롯한 여러 유학자들의 학문을 집대성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북송의 신유학자들과 주자에 대해서 상세한 설명을 하였다. 선조가 신하들과 유교 공부를 하면서 경우에 따라서는 깊이 있는 대화가 가능했던 것은 이러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조를 가르치는 당시의 유학자들 역시 기대승이 소개한 중국의 사상가들의 철학적 사유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선조는 기대승의 설명을 유심히 듣고 있다가 이렇게 질문했다.

“요·순·탕·무는 모두 훌륭한 신하를 얻어 함께 지극히 훌륭한 통치 성과를 이룩했으나 삼대(三代) 이후에는 비록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할 어진이가 있더라도 벼슬하기를 좋아하지 않고 도를 스스로 지키면서 은거하였다. 이는 그들이 때를 얻지 못하여 그런 것인가, 당시의 사정이 좋지 못해서 그런 것인가? 비록 태평성대를 만나더라도 그렇게 은거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무엇 때문에 그러한가?”

기대승이 복잡한 중국 유학사를 설명하고 있는 가운데, 젊은 임금인 선조는 자신 앞에 놓인 일에 대해서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국에서 삼대(三代)란 태평성대를 구가했던 하․은․주 시대를 말한다. 이 이후에 역사는 타락과 혼란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중국인들의 상고(尙古)주의적인 역사관이다. 옛 시대는 훌륭하고 그 이후 지금은 태평성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삼대의 시대에는 훌륭한 신하들이 많이 나왔기 때문에 그러한 좋은 시대가 되었는데 왜 나중에는 그렇게 좋은 신하들이 나오지 않고, 초야에 은거를 해버리게 되었는가? 그 때문에 세상은 더 혼탁하게 된 것은 아닌가? 지금 조선에 훌륭한 학자들이 많은데 그들을 어떻게 불러낼 수 있을까? 나는 어떻게 하면 요임금, 순임금과 같은 훌륭한 임금이 될 수 있을까? 선조 임금은 자신의 문제를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대승은 중국에 있었던 다양한 고사며 사례를 설명하며 지식인들이 자신의 임금을 위하여 일을 하려고 하였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았음을 설명하였다. 예를 들면 그는 고요(皐陶), 기(虁), 후직(后稷), 설(契), 이윤의 사례를 소개하고, 한 무제(漢武帝)와 같은 자는 ‘진시황(秦始皇)의 분서갱유(焚書坑儒) 이후에 육경(六經)을 드러내었으니 함께 일해 볼 만한 임금이라고 할 수도 있으나, 대체로 큰 공로를 좋아하여 내심에는 욕망이 많고 외면으로는 인의(仁義)를 과시했기 때문에 동중서(蕫仲舒) 같은 어진 사람을 얻고서도 등용하지 못하였다’는 이야기나, 송나라 때 정명도(程明道)나 정이천(程伊川)이 벼슬에 나가지 못한 일, 그리고 주자와 장횡거가 자신들의 포부를 펼치지 못한 사례를 아주 길게 설명하였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끝을 맺었다.

“후세에 간혹 조용히 물러나서 세상에 나오지 않으려는 자도 있고, 위에서는 알아주나 동료들의 질투로 등용되지 못하는 자도 있으며, 임금과 뜻이 맞지 않아 물러나는 자도 있지만, 진실로 성심을 다하여 어진 사람을 구한다면 후세에도 어찌 그런 자가 없겠습니까. 또 유학자로서 오직 학문에만 힘을 쏟고 임금을 섬기지 않으면서 자기의 지조만을 고상하게 가지려는 자가 어찌 없겠습니까. 대체로 어진이가 자중(自重)하지 못한다면 비록 등용한다고 한들 국가에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기대승의 설명은 단순 명쾌한 것은 아니었다. 젊은 임금의 질문을 간략히 파악해서 정곡을 찌르는 답변을 하지 못했다. 마지막 문장은 그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지도 잘 파악이 안 되게 만드는 말이었다. 그는 중국의 사정은 장황하게 잘 알고 있었으나, 젊은 임금을 옆에서 모시면서 우리나라를 태평성대로 만들어가고 그를 요순에 버금가는 성군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는 명쾌한 답을 내놓지는 못했다. 이러한 문제가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의 뒤를 이은 차세대 젊은 유학자 율곡 이이에게 선조가 깊이 빠져든 이유는 아니었을까?

요임금과 순임금


<역사속의 유교이야기 18>

요임금과 순임금

 

국인들의 가슴 속에 품고 있는 이상적인 군주는 요임금과 순임금이다. 이들 두 임금은 그 실체가 모호한 존재이지만 그러한 실존 여부와는 상관없이 이들은 항상 존경과 흠모의 대상이 되었다.

중국인들이 이들 군주를 실존의 인물로 생각하고 그리워하는 것을 우리까지 쫒아서 따를 필요는 없지만 그들이 왜 그러는지는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전통적으로 중국 고대의 통치자들은 그 대표적인 인물들을 ‘삼황오제(三皇五帝)’로 불렀다. 세 사람의 황제와 다섯 사람의 임금들이다. 이들은 중국문명을 만들어낸 시조, 혹은 중국이라고 하는 나라를 만들 위인들로 칭송을 받는다. 삼황은 경우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보통 천황(天皇), 지황(地皇), 인황(人皇)을 그리고 오제는 복희, 신농, 황제(黃帝), 당요(唐堯), 우순(虞舜)을 꼽는다. 당요는 당나라 요임금, 우순은 우나라 순임금을 말한다. 이중 황제는 중국문명의 아버지로 추앙되며, 최근에 부쩍 중국 전역을 통합시킬 수 있는 상징적 존재로 부각되고 있다.

삼황오제가 실존했던 인물이 아니라는 것은 중국의 역사학계가 이미 오래 전부터 인정하여 왔으나 최근에는 중국 정치권 일각에서 실존하는 인물로 복권을 시도하고 있다. 하나의 중국으로 굳건히 통합된 중국을 만들기 위한 사상적 작업의 일환인 것이다.

논어⌋의 맨 마지막에 있는 요왈편에서도 요임금, 순임금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요임금이 말했다.

“아아, 순(임금)이여. 하늘이 정한 운수가 그대에게 있으니, 중용의 도를 지키도록 노력하라. 천하가 곤궁해지면 하늘이 준 복록도 영원히 끊어지리라.”

순임금이 그대로 우왕에게 일러주었다.

(우임금의 뒤를 이은) 탕임금이 말했다.

“이 탕은 삼가 검은 황소를 바쳐 하늘에 계신 상제님께 아룁니다. 죄인은 용서하지 않겠으며, 상제님의 신하는 모든 것을 감추지 않겠으며, 모든 것을 상제님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제게 죄가 있다면 백성들과는 상관이 없고, 백성들에게 죄가 있다면 그 죄는 모두 제게 있습니다.”

탕 임금은 은나라 창건자를 말한다. 탕임금이 한말도 사실은 신화에 가까운 것이지만, 중국인들은 이 기록을 사실로 보고 요임금, 순임금 등과 함께 흠모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들 고대의 성군들의 사상적 특징은 철저하게 백성 위주, 백성 중심이라는 것이다. 즉 민본(民本)사상의 실천자들이다.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정치를 행한 성군의 모범으로 그들을 흠모한다. 위에 든 인용문에서도 탕임금은 자신 죄는 당연히 자신의 것이요, 백성들의 죄도 자신의 것이라고 하였다. 오늘날 우리나라 정치가 중에서 이렇게 생각한 사람들이 한명이라도 있을까?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조선시대 지식인들도 이러한 임금을 이상적인 군주로 생각하고 그러한 이상적인 모습을 조선의 왕들에게서 찾고자 하였다. 경연에 참가한 학자들은 왕에게 고전을 설명하면서 반드시 그러한 군주가 되도록 노력하기를 당부했다.

선조 1년(1567년, 11월 17일)의 경연자리에서 선조 임금은 학자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요임금과 순임금도 서로 비교해보면 우열이 있는가?”

당시 경연에 참석 중인 고봉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이 이렇게 답했다.

“어찌 우열이 있겠습니까. 복희(伏羲)·신농(神農)·황제(黃帝)·요·순은 다 같이 ‘생지(生知)’의 성인이라 실로 우열이 없습니다.”

생지(生知)의 성인이란 태어나면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성인을 말한다. 정상적인 인간은 이렇게 태어날 수 없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누구나 백지상태에서 태어난다. 그 뒤에 언어를 알고, 지각을 갖게 되며 자신에 대한 정체성을 구축해간다. 그런데 당시 대학자로 존중을 받은 기대승은 복희·신농·황제·요·순을 태어나면서 모든 것을 알고 있던 성인이라고 설명했다. 이 오제는 어차피 허구의 인물이기 때문에 태어나면서 어떤 상태였는가는 논의할 가치가 없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이들 사이에 우열은 없을 수밖에 없다.

기대승은 이어서

“다만 우(禹)의 덕은 무왕(武王)과 비슷하고, 문왕(文王)의 덕은 요·순과 비슷합니다. 만약 탕왕(湯王)이나 무왕을 요·순에 비교한다면 다소 차이가 있을 듯합니다.”

라고 하였다.

우왕은 하나라를 창건한 임금이며, 탕왕은 은나라를 창건한 임금이고, 무왕은 주나라를 창건한 임금이다. 소위 하․은․주 3대의 창건자들이다. 이들은 역사적으로 실체가 인정되지만 유교 경전에 언급된 이들의 말이나 인물 묘사는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전설인 경우가 많다. 기대승이 말한 문왕은 무왕의 부친으로 주나라의 창건 기틀을 만든 인물이다. 그래서 문왕은 요임금과 순임금의 위치까지 올려서 칭찬했다.

선조 임금은 기대승의 설명을 듣고 다시 이렇게 물었다.

“요임금과 순임금 중에 누가 나은가?”

앞의 질문이나 별반 차이 없는 질문이었다. 아무래도 선조에게는 기대승의 설명이 불만스러웠을 것이다. 기대승도 그것을 느꼈는지 그 질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장황하게 설명을 하였다.

“요순시대는 1년으로 말한다면 4월과 같은 때입니다. 요임금의 덕은 공손하고 총명하고 우아하고 신중하시어 온유하셨습니다. 순임금은 여러 가지 고난을 두루 경험하여 농사짓고 질그릇 굽고 물고기까지 잡았습니다. 깊은 산중에 있으면서 목석(木石)과 같이 살고 사슴이나 멧돼지와 같이 놀았지마는 한 마디 착한 말을 듣거나 한 가지 착한 행동을 보게 되면 양자강이나 황하의 물을 터놓은 듯 막힘이 없이 통달하였습니다.”

요순에 대해서 배운 중국 고전의 표현을 모두 동원하여 그들의 훌륭한 모습을 그렇게 설명한 것이다. 이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정자(程子)는 ‘요와 순은 서로 우열이 없다.’고 했는데 이 말이 과연 그렇습니다. 문왕 역시 생지(生知)의 성인이신데 ⌈시경⌋에 이르기를 ‘슬기도 없고 지혜도 없는 속에 천리(天理)에 순응한다.’라고 하였으며, 또 ‘상천(上天)의 일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다. 문왕을 본받으면 온 세상이 믿고 따르게 되리라.’라고 했습니다.”

요순에 대해서 질문을 했는데, 기대승은 정곡을 찌르지 못하고 정자(程子), 즉 북송의 학자인 정이(程颐, 1033-1107)가 한 말, 즉 ‘요와 순은 서로 우열이 없다.’라는 말을 반복하였다. 말하자면 ‘중국의 성리학자들이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으니 그들 사이에는 우열이 없는 것입니다.’라는 뜻이다. 이어서 대뜸 선조가 물어보지도 않은 문왕, 즉 무왕의 아버지를 소개한다.

그리고 문왕의 뒤를 이어 공자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했다.

“문왕의 뒤에는 공자가 주(周)나라 말기에 태어나 모든 임금의 본보기가 되었는데 그 제자의 말에 ‘내가 선생님을 본 바에 의하면 요임금이나 순임금보다도 훨씬 더 훌륭하시다.’라고 했습니다. 대개 요순시대에는 백성이 잘 다스려져 화평을 누렸는데 그 은택이 한 시대에만 있었으나, 공자는 만세토록 법을 드리워 그 공이 요․순보다 더하였으니 이른바 성(聖)이라는 지위로 말하면 다름이 없겠지만 공으로 보면 다른 점이 있습니다.”

결국 기대승은 공자를 끌어들여 설명하는 것으로 선조의 질문에 답을 하였다. 공자는 요임금, 순임금 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더 나은 이유는 만세도록 유교의 가르침을 전하였기 때문이다.

이렇듯 기대승이 선조의 질문에 답한 것은 다소 동문서답으로 흐른 감이 없지 않으나 16살 먹은 어린 임금에게 공자의 가르침을 본받아 ‘요임금, 순임금과 같이 되시오’라는 것이었다. 천하가 곤궁해지지 않도록 노력하고 백성들의 모든 죄는 당신에게서 시작되는 것이라는 점을 가슴에 새기고 정치를 하시오라는 가르침이었다.